I’AM WAITING FOR MY NEW DAY
모든 것을 가졌지만 자신이 원하는 단 하나, 자유를 얻지 못해 불행했던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였던 어제의 김선영은,양반네들을 쥐락펴락하는 제주 최고의 기생 애랑으로 내일을 맞는다. 두 인물 사이의 간극이 결코 적지 않으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무대 위에서 보낸 14년 동안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물들을 만났고, 언제나 기대 이상의 무대를 선보이며 운신의 폭을 넓혀 온 배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김선영이 마흔의 문턱에서 들려준 이야기들을 지면으로 옮긴다.
메이크업·헤어|이창은, 진주(라메종) 스타일리스트|이지영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트|진수정·김세희
<엘리자벳> 이후 소식이 뜸해서 좋은 소식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임신 소문은 나도 들었어요.(웃음) 데뷔 이후로 4개월 넘게 작품 안 하고 쉰 적이 없는 데다 결혼까지 했으니까. 여행도 다니고 그냥 잘 쉬었어요. 이제 다시 일해야죠.
무대에서 다시 만나서 좋긴 한데 2세 계획도 세워야 하지 않아요?
아기에 관심도 별로 없었고 그렇게 예쁜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그런 상상을 해봤어요. 나랑 (김)우형이랑 닮은 애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을요.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어떻게 키울지 답도 안 나오고 걱정되는 게 사실이지만 긍정적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눈에 밟혀서 공연장 가기 싫어질지도 몰라요.(웃음) <엘리자벳> 이후 차기작이 <살짜기 옵서예>라고 해서 조금 뜻밖이었어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이 공연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부터는 왠지 모르게 관심이 갔어요. 뭔가 새로운 일, 재밌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이왕이면 의미 있는 좋은 창작품으로 새해를 맞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극단적인 선택일 수 있잖아요. 오스트리아 황후였다가 제주도 기생이 되는 일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선택 자체가 재밌는 것 같아요. 애랑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역할군에서 크게 벗어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김선영이라는 배우를 엘리자베트나 루시, 알돈자, 마리아 등 복잡하고 무겁고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던 여인들로 기억하는 관객들에게는 꽤 낯설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내가 청순하고 지고지순한 캐릭터의 여배우는 아니잖아요. 나를 통해 그릴 수 있는 그림 안에 애랑이 없을 것 같지 않아요. 게다가 난 다중인격을 지닌 사람이라고요. 보여줄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얼마나 애교가 많고 밝고 단순한 사람인데요. 남자들을 유혹하는 색기는 제 안에도 충분히 있어요. 이제야 그걸 발휘할 수 있게 된 거라고요. 많은 분들이 무대 위에서의 제 강한 모습을 떠올리시는데, 알고 보면 애랑도 양반의 앞니까지 뽑아내는 당돌하고 무서운 여인이라고요. 그동안 나한테 잘 어울리고 잘 맞출 수 있는 역할은 많이 했고 소중하게 즐겼으니까, 이제 경험하지 않은 다른 것들에 나를 던져보고 싶어요.
한복도 오랜만에 입지 않아요? 원캐스트에, 오랜만에 예술의전당 공연까지, 뭔가 새로운 일들이 많네요.
그러게요. 공연 일정이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되고 뮤직 넘버가 많지도 않아서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작품들이 무대 위에서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는 스타일이었다면 <살짜기 옵서예>는 오히려 에너지를 받게 될 것 같아요.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도 워낙 실력파들이라, 그들의 무대를 지켜볼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요. 관객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싶은 공연이 될 것 같아요.
결혼 후 처음으로 참여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결혼 생활이 배우로서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결혼 전에는 서울에서 혼자 오래 살았고 막내이다 보니 나한테만 집중하면서 살았거든요. 근데 결혼을 하니까 나만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상대를 더 살피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나를 드러냈던 것들에 대해 조금은 감추게 되고. 나한테 없는 좋은 모습을 가진 남편을 보면서도 많이 배워요. 우형 씨가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들이 참 많거든요.
그러고 보니 2013년은 선영 씨에게 좀 더 특별한 해가 되겠네요. 47년 만에 부활하는 <살짜기 옵서예>의 애랑을 맡게 된 것도 그렇지만, 어느덧 40대 여배우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해이기도 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지혜롭고 따뜻하게 맞을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2012년은 여자로서, 여배우로서,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많은 변화를 겪은 해거든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것에 너무 집중하다보니 주변을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근래 들어 타인을 배려하는 좋은 기질의 DNA를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것도 그중 하나예요. 가깝게는 남편서부터 친구, 동료 등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싶어졌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지혜와 슬기를 닮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의 인생에는 10년마다 들르는 정거장이 있다고 하잖아요. 옛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들을 맞이해야 하는 일들이 굉장히 당황스럽지만 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도 같아요. 내가 또 한 차례 성장통을 겪은 후에 만나게 될 시간들이 기대가 돼요.
선배보다 아껴야 할 후배가 더 많아진 배우 김선영에게도 필요한 마음이네요.
그렇죠. 이제는 나보다 전체를 끌어안고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보다 상대 배우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연기도 더 깊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고요. 좋은 와인이 되려면 포도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버티고 버텨야 좋은 포도가 나온다는 얘기죠. 사람의 인생이라면 참 싫은 얘기지만, 근심 걱정 없이 편하게 살면 과연 뭐가 그리 좋을까 싶기도 해요. 젊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슬픔은 있을지언정, 뭔가를 알아가는 기쁨도 큰 것 같아요. 워낙 성격이 급하고 덜렁대서 실수도 많은 편이지만,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삶의 지혜들을 담을 수 있는 넓고 깊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일을 받아들인 것은 참 멋진 일 같아요. 하지만 여배우로 설 수 있는 무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도 있잖아요.
내가 워낙 미래지향주의적인 인간이라 앞으로 맡게 될 배역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어떻게 하면 나이를 먹는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있죠. 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역할들이 타이틀롤만은 아니었어요.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아도 하고 싶은 작품들이 있을 땐 그 무대에 서려고 노력했던 것 같고요. 저는 제가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뮤지컬이 붐업되는 시점에 배우를 시작했고, 내 실력보다 흐름을 잘 타고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지금은 연예인과 뮤지컬 배우가 더블, 트리플 캐스팅이 기본이 되는 시대잖아요. 의도했든 안 했든 뮤지컬 전문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제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제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뮤지컬만 해도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최선을 다해서 멋지고 아름답게 무대에 설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더 하게 돼요. 모든 장르를 다 통틀어서 여배우로서 거쳐야 하는 과정들을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좋은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선배님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거든요.
그렇지만 선영 씨는 앞으로 몇 년간은 무대 위에서 여전한 아름다움을 뽐낼 것 같아요. 문득 궁금해졌어요. 배우 김선영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나요?
글쎄요, 지금? 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살지 않거든요. 언제나 현재에 만족하고 재밌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것 같아요. 2012년도 재밌었으니 새해도 신나게 보내야죠.
새해 바람이 있다면?
목표를 세우고 살지를 않아서 참 낯설어요. 목표라는 것을 두면 사람이 급해지고 앞만 보게 되거든요. 배우로서도 그렇고 자연인으로서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살면 좋겠어요. 나한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개인의 삶에서 닥치는 일들도 자연스럽게 대처하고. 그런 순리대로 맞고 극복하고, 그걸 통해서 아파야 한다면 감사하게 아프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2호 2013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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