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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무게 있는 기획에는 박수를 <퀴즈쇼> [No.77]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2010-03-02 6,315

대중예술 평론가라는 직업적인 이유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꽤나 열심히 챙겨보는 나는, 가끔 ‘창작뮤지컬만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창작뮤지컬의 세계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복잡한 세상사와는 전혀 무관하고, 그에 대한 문제 제기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본격 문학, 본격 연극 같은 종류의 예술과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루 일을 끝내고 가족들과 보내는 편안한 시간을 즐겁게 해주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비교해도 그렇다.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는 연애와 가족 간의 갈등을 뛰어넘어 사회와 세상, 인생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드라마들이 병원이니 경찰이니 잡지사니 하는 곳을 계속 헤매고 다니는 것은, 냉혹하지만 멋진 직업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미드 팬들의 요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이 사랑과 포용, 타인에 대한 이해 같은 것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냉혹한 곳이라는 깨달음이 너무 보편화되어, 텔레비전 드라마 공간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일 것이다. 한국인들은 작년 한 해 인기를 모았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남편의 실직을 해결하기 위해 회사 임원의 아내 앞에서 별별 굴욕을 견디는 주부, 지자체 10급 공무원이 시장에 출마하면서 겪는 지방 시정의 아수라판, 삼한통일을 이룩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꿈 뒤에 놓인 냉혹한 정치 세계, 망해가는 잡지사를 부여안고 몸부림치는 편집장 등을 보았다. 올 초 드라마들도 ‘찌질이’로 살 수 없어 국립 명문대로 돌진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으니, 올해 드라마 속의 한국사회 역시 그리 만만치 않을 듯하다.

 

반면 창작뮤지컬의 세계는 늘 평온하고 꿈처럼 아름답다. 그 세상에는 남녀의 사랑, 그것이 깨지고 다시 복원되는 이야기만이 존재한다. 대중예술이 꼭 현실을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존재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안 그래도 세상이 이렇게 골치 아프고 힘든데, 왜 돈 내고 시간 내어 보는 뮤지컬까지 마음을 ‘꿀꿀하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항의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늘 정도이다. 대중예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수입된 라이선스 뮤지컬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다. 오로지 창작뮤지컬만 이러하다.

 

그런 점에서 <퀴즈쇼>는 상당히 독특한 뮤지컬일 수밖에 없다. 김영하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이른바 ‘88만원 세대’, 아니 그것도 못 되는 ‘44만원 알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20대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물론 동정의 시선 같은 것은 없다. 대학원생 민수는 부모 없는 사생아지만 여배우였던 외할머니 덕분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가 죽자 빈털터리로 노트북 하나 들고 고시원으로 향하는 신세가 된다.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자기 것이 아니며, 아무리 고학력자라 할지라도 부모도 재산도 없는 자신을 받아줄 멀쩡한 직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편의점 야간 알바생으로라도 살아보려 하지만 그것도 좌절된다. 그의 유일한 낙은 컴퓨터 속 ‘퀴즈방’이다. 그는 그 속에서 능력자로 인정받고 사랑도 이룬다. 전반부가 현실을 그대로 비춰준다면, 후반부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후반부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퀴즈 풀기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후의 상황이다. 마치 프로게이머처럼, 퀴즈 풀기 선수들이 살아가는 비밀스러운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는다. 직업의 세계에 들어오니 비전문적인 컴퓨터 퀴즈방에서 맺었던 관계는 모두 끊어진다. 대신 냉혹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진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그들 세대의 소원이었건만, 막상 그것이 직업이 되고 나니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퀴즈 게이머의 세계 역시 일반적인 직장 생활의 괴로움이 똑같이 존재하는 세계였고, 그는 결국 거기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튕겨 나온다.

 

대강 살펴보아도 <퀴즈쇼>가 다루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 이렇게 묵직한 내용을 다룬 창작뮤지컬 작품은 아마 이주 노동자와 고졸 여사원의 사랑을 그린 <빨래>, 중년이 되면서 겪는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 <천사의 발톱> 이래로 처음인 듯싶다. 아니다. 바로 작년 늦가을에 올린 <달콤한 나의 도시>가 <퀴즈쇼>와 이란성 쌍생아 같은 작품이었으니까. 그러나 성장소설 같은 내용의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나의 도시>는 연애와 결혼이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퀴즈쇼>보다 훨씬 달콤하고 편안하다.


그렇게 보자면 <퀴즈쇼>에서 가장 과감한 부분은, 바로 이런 작품을 만들고자 결정한 기획이다. 그리고 그 과감한 기획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한 번도 이런 작품을 대극장 창작뮤지컬로 만들어 멋지게 성공해본 적이 없다. 지난 호에 이야기했듯이 <달콤한 나의 도시>가 연애가 아닌 인생의 깨달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목에서 창작력의 한계를 드러냈고, 본격 연극의 작가로 출발한 자작 연출가 조광화의 만만찮은 창작력으로 만든 <천사의 발톱>이 상당한 완성도에 이르렀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빨래>나 그보다 앞선 <지하철 1호선> 같은 소극장 작품은, 다소 묵직한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어도 롱런에 성공하고 있다. 물론 이런 소극장 작품이 완성도에서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소 결함이 있더라도 소극장의 실험성으로 봐주고 넘어가게 되고, 장기공연을 하면서 조금씩 수정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게 된다(<지하철1호선>이나 <모스키토>의 초연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은, 롱런을 하면서 작품을 다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것이다). 소극장에서 관객들은 창작자의 실험과 지속적 노력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대극장에만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화려하고 세련되며 편안한 작품을 요구한다. 문제적인 주제의식이나 실험성이 있는 작품일수록 완벽한 완성도와 화려함으로 치장해서 그 부담을 줄여주어야만 대극장 관객은 참고 넘어간다. 아니면 한국인의 아킬레스건인 애국주의를 건드리는 대대적 마케팅이라도 해야 잠시 부담스러움을 눈감아준다.

그러나 <퀴스쇼>는 그렇지 못했다. 원작에서 주제를 제대로 추출했고 여기에 충실했다. 방마다 사람들이 들어찬 네모난 고시원, 소통 없는 네모의 작은 방을 중심으로 하는 박동우의 무대미술도 주제에 충실했다. 작곡가 노선락은, 그동안의 작은 작품에서 대중가요 같은 쉬운 노래만 짓던 답답함을 떨쳐버리고 오랜만에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보여주는 음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예정·전수양의 극작과, 박칼린의 연출은 주제를 제대로 잡았음에도 극을 밀고나가는 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소설을 각색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누차 지적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노정되었다. 에피소드를 엮어가면서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방식은 <달콤한 나의 도시>보다 못했고, 무엇보다도 민수의 행동이 없어 주인공으로 돋보이지 않았다. 연출은 음악의 관리에 능했으나, 배우의 행동, 몸의 에너지, 시각성을 모두 모아 전체를 관통하여 밀고 나가는 힘을 갖지 못했다. 각 장면을 채우는 아이디어에 골몰한 결과 극의 흐름이 도막도막 끊겼고, 게다가 선까지 가늘고 자잘했다.

 

 

결과적으로 매우 무모한 기획이었으나, 그간 창작뮤지컬을 답답하게 생각한 관객으로서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세상은 무모함으로 변화하니까. 단 아쉬운 것은 이런 무모함이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좀더 영리한 계산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 본 리뷰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7호 2010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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