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캐릭터와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음악으로 다른 무대를 보여줘야 한다면 어떨까. 더욱이 그 작품이 수십 년간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라면 그건 새로운 작품의 디자인을 맡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지만 <레 미제라블>의 25주년 기념 투어 공연의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투입된 영국 출신 무대디자이너 맷 킨리는 이 문제를 잘 헤쳐 나간 듯하다. 신예 디자이너나 다름없는 그는 원작의 명성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드디어 <레 미제라블> 한국 공연의 막이 올랐다. 첫 공연을 본 소감은 어떤가?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서 정말 기뻤다. 우리가 하는 일은 관객이라는 마지막 요소가 채워져야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객석이 관객들로 채워지는 걸 보면 항상 기쁘다.
이번 25주년 기념 투어 공연 작업은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
존 내피어(오리지널 공연의 무대디자이너)의 어시스트로 <레 미제라블> 21주년 기념 콘서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의견 조율상의 문제로 콘서트는 무산됐지만, 그게 인연이 돼서 <레 미제라블> 브로드웨이 2008년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브로드웨이 공연 디자인이 지금 버전과 비슷한데, 그때 캐머런 매킨토시(프로듀서)가 이 세트에 장점이 있는 것 같다고 이걸 투어 버전으로 만들 수 있게 아이디어를 구상해 보라고 했다.
<레 미제라블>은 캐머런 매킨토시와 트레버 넌, 존 내피어라는, 둘도 없는 골든 팀이 만들어낸 최고의 롱런 뮤지컬 아닌가. 이 전설적인 프로덕션에 투입돼 새로운 디자인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 같다.
Hugely(엄청나게)! <레 미제라블>이 지금까지 공연될 수 있었던 건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바꿔야 하니 부담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부담이 됐던 건 오리지널 버전의 무대 세트가 규모는 크지만, 굉장히 단순하다는 점이었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이 추구했던 방향대로 발전시키고자 그보다 더 심플하게 만들 순 없지 않나. 또 이번 공연이 투어 버전이라는 것도 고민이었다. 투어 버전이라면 세트의 규모를 줄여야 하는 게 첫 번째 과제인데, 우린 구상 단계에서 전보다 세트가 늘어났다. 존은 <레 미제라블>의 대표 장면인 바리케이드 신에서 한 구조물을 변형해 사용했지만, 이번엔 그 구조물을 분리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거다. 시작부터 세트가 늘어난 셈이니 큰 고민에 빠졌다. 오리지널 공연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생각에 생각이 맞물리면서 잘 풀려갔던 것 같다.
투어 공연의 연출가 로렌스 코너와 첫 미팅에서 어떤 비전을 나누었나? 어떤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됐는지 궁금하다.
정확한 비전을 나누고 나서 작업을 시작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됐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도가 생기기도 하고, 어떤 의도에 대해 말하면서 아이디어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의 작업에서 특별했던 점은, 모델 박스 안에서 실제 모형을 이리저리 배치해 보면서 일을 진행했다는 거다.
수십 년 동안 사랑받아온 공연인 만큼 변화의 수위 조절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캐머런은 이 작품이 오래 공연돼 왔기 때문에 변화를 주고 싶어 했지만, 이미 수백만 명이 본 이 공연이 낯설 만큼 새로워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색깔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닌, 기존의 정서를 유지하면서 다르게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라 그런지 전보다 좀 더 다양한 색채와 빛을 표현하는 거였다.
<레 미제라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회전무대를 없앤 데는 투어 공연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건가? 각각의 극장마다 환경이 다를 텐데 같은 크기의 회전무대를 사용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투어 공연에서 회전무대를 사용하면, 무대 셋업 때 힘들긴 하지만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조금 더 힘들 뿐이지. 캐머런도 원한다면 회전무대를 그대로 써도 된다고 했지만,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전무대라는 큰 장치를 사용하면 아무래도 전과 비슷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투어 공연이라는 점을 감안해 생각한 장치는 영상이다. 영상을 사용하면 많은 세트 없이도 다양한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또 <레 미제라블>은 장면 전환이 많고, 장면에서 장면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빠른 작품인데, 영상으로 그런 문제를 커버할 수 있었다.
회전무대라는 주요 장치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공연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을까?
오리지널 쇼에서는 회전무대가 공연의 다른 요소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트에 맞게 동선을 짜는 건 당연하고, 장면 음악이나 신 전환의 음악 길이도 회전무대가 도는 속도에 맞게 편곡됐다. 그런데 우리는 회전무대라는 핵심 요소가 없어졌으니까, 다른 부분들도 조금씩 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대로, <레 미제라블>은 장면 전환이 많은 작품이고, 전작에서 이를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었던 데는 회전무대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이번 버전은 오리지널 공연에 비해 장면 변화가 많아졌음에도 화려하면서도 신속하게 전환이 이루어지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실제 사이즈의 1/4 규모로 미니어처 세트를 만들어서 실전 연습을 많이 한 덕분이다. 이 세트가 빠지고 다음 세트가 들어갈 때 문제는 없는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다 체크했다. 사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예쁜 디자인 자체에 대해서만 고민하지, 앞뒤 장면 전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건 디자이너의 몫이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는 매 장면이 멈춰있지 않고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연결 부분에 많은 신경을 썼다. 여기에는 영상의 역할이 컸다.
이 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무대디자이너로서 유기적인 장면의 전환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세트는 무대 위에 있다가 어느 순간 마법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퇴장해야 하는 거다. 그러니까 다음 장면에서 이 세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 또 관객들이 공연을 볼 때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는 것에서 얻는 즐거움도 크지만, 여기서 어떻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지를 보는 즐거움 또한 클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번 투어 버전 디자인의 특징은 영상이 아닌가 싶다. 특히 영상이라는 최신 기술을 사용하면서, 현대적이지 않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으로 활용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손으로 그린 듯한 영상 이미지들은 인상파 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맞다, 그런 의도로 한 거다. 이번 디자인은 빅토르 위고의 스케치를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많이 살리고 싶었다. 내가 그림 작업을 완성하면 영상 팀이 그 그림을 영상화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됐는데, 그때 항상 했던 말이 로스트럼 카메라(옛날 필름 카메라)처럼 작업해 달라는 거였다. 화려한 효과를 넣지 않아서 영상인지 모를 정도로 은은하게 만들어달라는 얘기였다. 영상이 아닌 그림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원했던 거다.
작품이 가진 고전적인 정서를 살리기 위해서?
만약 우리가 기술력을 뽐내기 위해 최신 기술을 다 넣었다면, 2년 뒤 어디에선가 공연을 올렸을 때 촌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오늘 개봉하는 최신 CGI 애니메이션도 1년이 지나서 보면 촌스러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최신 기술을 쫓아가면 그런 문제가 있다. 그리고 클래식 미디어인 공연의 정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이룬 성취 중에서 어떤 부분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나?
(당황하면서) 오 마이 갓! 정말이지 내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건 없다. 장면 전환에 변화를 줬는데, 그 부분이 좀 자랑스럽다고 할까.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제일 자랑스러운 것 같다.(웃음)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11호 2012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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