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에도 첫인상이 있다
사람에게 첫인상이 중요하듯 공연에도 첫인상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모름지기 첫인상이란 처음 대하는 상대를 향한 최초의 느낌이자 해석일 터. 자칫 첫인상으로 모든 걸 미루어 짐작하다가 큰코다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지만, 이건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해야 할 일이지 공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두세 시간 남짓 집중하면 공연의 첫인상은 바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궁금함, 극장을 들어설 때 처음 눈에 들어오는 무대 공간의 이미지, 배우의 이름에 거는 기대감. 아직 시작하지 않은 공연의 겉껍질을 보면서 공연의 알맹이를 짐작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지만 뮤지컬에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단 겉껍질뿐이겠는가. 어떤 장르의 음악을 어떤 형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리고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운용하는지에 따라 같은 소재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다른 내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뮤지컬은 형식적 특성만으로도 공연의 전모를 기대하게 만드는 재미난 장르이다. 공연의 첫인상에 관객이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공연을 향해 예측 가능한 기대치를 설정할 수 있는 셈이다.
첫인상이 불러오는 기대치
이런 면에서 볼 때 뮤지컬 <머더 발라드>는 첫인상이 확실한 공연이다. ‘머더’라는 소재에 ‘발라드’의 서정성이라니, 제목의 부조화가 의미심장하다. 배우는 모두 4명, 록이 기조를 이루는 음악은 성스루(sung-through)로 진행된단다. 이렇게만 보자면 관객이 공연의 기대치를 어디에 둬야 할지 분명해 보인다. 생각해보시라. 4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면 이야기의 핵심이 규모에 있기보다는 밀도에 있는 셈이다. 이 밀도감은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건을 위주로 삼으면 파격이나 반전으로 나타날 것이고, 인물을 위주로 삼으면 예민하도록 섬세한 관계의 설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나타나는 살인이라는 소재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성스루 형식도 잘 어울려 보인다.
이와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무대 구성이다.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는 이미 클럽 분위기다. 무대 중앙에는 당구대가 놓여있고 손님을 위한 테이블이 세팅됐는데 어머나, 관객이 거기에 앉아있다. 진짜 손님이 된 관객 사이로 배우들은 왔다갔다 농담도 걸고 장난도 친다. 어떤 이들은 관객을 무대 위로 올린 공간 구성을 새로운 시도라고 말하는데, 이런 설정을 새로운 형식으로 보는 시각은 사실 좀 촌스럽다. 이런 공간 배치는 이미 흔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시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이런 설정을 어떻게 극적으로 해결하는지에 기대하게 된다.
여기에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 이야기의 밀도가 더해질수록 관객이 무대에 개입할 여지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관객을 무대 위에 올린다고 해서 무조건 관객이 극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관객을, 무대 양 옆의 객석도 아니고, 무대 정중앙에 앉히는 데는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하다. 이 작품이 만들어낼 이야기의 밀도 안에서 무대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관객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평범한, 너무나도 평범한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짜릿한 첫인상에 너무 빨리 마음을 줘버렸던 걸까. <머더 발라드>의 맨얼굴은 첫인상과 달리 더없이 평범하다. 우선 이야기부터가 그렇다. 일상이 무료한 유부녀가 첫사랑과 일탈을 저지르다 가정파탄의 위기에 맞닥뜨리는 이야기. 제목이 제목이니만큼 살인사건을 기대했건만 그건 맨 끝에 나오더라. 물론 앞에 나오건 뒤에 나오건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살인이라는 결론으로 끌고 가는 포석이 너무 약한 데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해설자의 것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것 이외에 아무런 장치도 없다. 이렇게 빈약한 반전을 위해 그토록 진부한 이야기를 참았더란 말인가. 설사 반전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자아내는 밀도에 초점을 맞췄다고 본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상투성이 그런 밀도의 생성을 방해한다. 이야기만 보자면 ‘머더 발라드’라기보다는 ‘마더 발라드’에 가깝다. 프랭키 어머님, 가정으로 돌아오세요.
마지막 살인의 장면이 느닷없어 보인 데는 이야기뿐 아니라 연출적인 강조점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례로 애증의 관계로 얽혀있는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야구 방망이를 손에 쥐는 장면은, 결말의 의미심장함을 위해 점층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만다. 싸움은 긴박하지 않고 긴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상대를 죽이고 싶은 거구나, 누가 그걸 휘두를까, 관객의 예측을 보기 좋게 깨뜨릴 수 있는 포석은 여기에서부터 깔려야 되지 않을까. 이야기도 음악도 무난하게, 하지만 아무런 굴곡 없이 흘러갈 뿐이다.
무대 공간의 운용도 아쉽다. 상투적인 이야기를 살려내기 위해 이 공연이 선택한 방법은 감각적인 표현 방식이다. 애욕에 눈먼 사랑을 모습을 그려내는 배우들의 모습은 충분히 섹시하더라. 그런데 그걸 보기가 그리 편하지 않았던 까닭은 아무래도 무대 위 관객 때문이었던 것 같다. 관객이 앉은 자리는 분명 연기 공간과 섞여 있는데, 공연의 흐름은 무대 위 관객과는 아무 상관없이 진행된다. 극의 전체적인 기조와 무대 공간의 설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무대 위 관객들이 앉은 테이블 자리는 극을 전체적으로 보기에도 꽤나 불편해 보인다. 굳이 이런 설정을 한 이유를 알 수 없어지는 순간이다. 그저 너무 넓은 공간을 채우기 위한 부득이한 설정이랄 수밖에. 좌우로 넓게 펼쳐진 공간에서 관객들 사이로 드나드는 배우의 동선은 꽤나 부자연스럽다. 이 작품이 그래도 가질 수 있었던 장점을 퇴색시킨 데는 공간의 크기 탓도 있어 보인다.
보이는 건 배우 뿐?
그렇다면 <머더 발라드>의 경쟁력은 온전히 배우에게 있는 셈이다. 남녀 배우가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짜여 있으니, 배우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다. 최재웅과 박은미를 비롯한 배우들은 충분히 멋있더라. 록에 어울리지 않는 발성이라 하더라도 한층 젊어진 홍경수를 보는 것도 반갑고 뇌쇄적인 분위기를 한껏 살린 문진아도 볼 만하다. 극이 시작되기 전의 관객을 향한 경쾌한 응대와 본 공연의 지루함을 잊게 만들만큼 강렬한 커튼콜에서 배우들은 정말이지 신나 보인다. 이때 배우들이 관객에게 지나치게 과감하도록 ‘들이대는 걸’ 보자면, 이들은 무대 위 관객들에게 자기들의 매력이 먹히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무대 위에 굳이 객석을 올린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쉬운 건 배우들이 빛나는 순간이 극의 안에서가 아니라 극의 바깥에서였다는 점이다. 극의 지루함은 캐릭터의 구체성이 이야기의 상투성을 극복할 만큼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일 터. 지금껏 흘러왔던 극의 분위기와는 영 다른 요란한 커튼콜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머더 발라드>를 보면서 슬쩍 생각하는 건 많다. 극장 공간이 좀 더 작아진다면 어떨까, 객석과 연기 공간이 잘 정돈된다면? 오밀조밀 모여 앉은 관객들이 침 꼴딱 삼키도록 아예 더 관능적으로…! 이 작품이 품은 새로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홍보 문구가 아니라 공연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 중 제일 크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3호 2013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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