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된 것은 서울예술단의 <바람의 나라>에서 그가 해명태자를 연기했을 때였다. 대무신왕 무휼의 죽은 형인 비운의 태자 해명 역에 김법래와 더블 캐스팅된 이 예술단 배우는 묵직한 저음으로 정평이 난 선배와는 또 다른 무게감을 가진 우아한 바리톤으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좋은 목소리만큼이나 매력적이었던 것은 균형 잡힌 사람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분위기였다.
“법래 형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알베르트 역과 어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실 초연 때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는 베르테르 역에 끌렸죠. 20대였으니까. 아, 지금도 시켜주시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마음 한편에 ‘언젠가는…’이라고 묻어뒀던 작품이지만 예술단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그리고 단체를 나온 후에는 <캣츠>와 공연 일정이 겹쳐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을 앞두고 알베르트 역을 제의받은 것은 한없이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김민정 연출은 그에게 이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와 롯데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에서 벗어나 알베르트의 슬픔까지 함께 부각시킬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장면과 넘버가 늘어났다. “기존의 알베르트는 어쩌면 악역으로까지 보일 수 있는 인물이었죠.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롯데를 정말 사랑하지만 그녀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어떻게 놀아야 할 줄 몰라서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베르테르와 더 대조되는 사람인 알베르트의 입장에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실 거예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초연 때부터 주역부터 앙상블까지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몰입도가 남다르기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연습실에서나 대기실에서까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극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라앉아 있다는 <베르테르> 팀 특유의 분위기가 여전하냐고 묻자 그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진지하고 우울한 작품이니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계속 평소와 똑같이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다니고 있네요. 제가 원래 좀 무대 밑에 내려오면 바로 털어버리는 성격이에요.” 예술단의 <공길전>에서 장생을 맡았을 때 상대역이었던 김재범에게 대기실에서 ‘공길아!’ 하고 부르는 것도 그 장난 중 하나다. 자기가 그렇게 부르면 김재범은 새초롬한 척 반응한다며 웃는다. “연습을 할 때 마주보고 있으면 당장 <공길전> 대사를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농담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제가 하도 장난을 치고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김)지우는 ‘오빠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도 하더라고요.”
그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던 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상적이었던 해명태자 이후 예술단을 나와서 처음 출연한 <컴퍼니>의 데이비드나 <캣츠>의 멍커스트랩, <대장금>의 중종까지 그는 대체로 믿음직하거나 무게감 있는 성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들을 맡아왔다. 그런데 무대 위와 아래의 구분이 신기할 정도로 확실하고 간단하게 이뤄지는 담백한 성격의 그에게 단 한 번의 예외인 작품도 있다.
“<서편제>의 유봉 역은 그게 안 됐어요. 처음이었죠. 그 작품에 깔려있는 한의 정서라는 게 한국인인 저 자신에게도 원래 잠재돼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고 많이 힘들어 했는데 배우로서는 그런 경험이 좋기도 했어요.”
늘 적정 온도를 유지하면서 갑자기 들끓거나 식어버리거나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그이지만, 한양대 성악과에서 공부를 하면서 졸업 후에는 유학을 다녀와서 오페라 가수가 되거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면 합창단에 들어가겠다고 굵직한 인생 설계를 끝냈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벼락처럼 일어난 변화를 생각하면 의외의 일면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성악과 전공 학생들이 가는 캠프가 있어요. 거기서 만난 누나가 저에게 한번 들어보라며 <미스 사이공> 음반을 빌려줬는데 단번에 반해버렸어요. 제가 그때까지 공부했던 음악과는 정말 다른데, 이 노래들을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죠.” 운명처럼 새로운 꿈이 생긴 갓 스물의 홍경수는 무작정 대학로로 갔다. 뮤지컬의 대중화는커녕 저작권 협약도 체결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 그는 길거리에서 포스터를 붙이는 일까지 함께하며 <미스 사이공>을 재해석한 소극장 뮤지컬 <킴>에서 크리스 역으로 출연했다.
여느 집이라면 펄쩍 뛸 일이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앞날을 알 수 없는 도전에 청춘을 던지는 아들을 믿고 그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성악도가 뮤지컬을 한다는 것은 대중 가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백안시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공평하게도 뮤지컬계에서도 성악 전공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할 때였다. “오디션을 보러 가면 ‘성악 전공 하셨어요?’ 하고 곧바로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겨우 길이 트인 건 군대에 다녀와서 서울예술단에 입단을 하면서였죠. 학교 선배인 민영기 형이 그때 예술단에 먼저 들어와 있었어요.”
극단 성격의 관 단체라는 독특한 환경의 그곳에서 홍경수는 배우로서 갖춰야 할 기본기를 모두 배웠다. 오늘 주역을 하다가 내일은 갑자기 가마꾼으로 무대에 서야 하는 외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도 있고, 작품을 할 때마다 함께 소화해낼 수 없는 다양한 조언이 선배들로부터 쏟아져 갈피를 잡기 어려운 상황들도 반복되었지만 결국은 다 그의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그가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서울예술단에서 나와 도전한 첫 작품은 손드하임의 <컴퍼니>였다. 그는 이 작품을 하던 시절이 자신의 배우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고 기억한다. 오랫동안 ‘외부’였던 예술단 밖의 작품, 게다가 정서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완전히 생소한 손드하임의 뮤지컬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눅 들고 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이 점점 더 자신감을 잃게 했다. 하지만 이지나 연출은 그가 결국은 다시 치고 올라올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믿고 맡겨주었다.
<캣츠>의 멍커스트랩은 그 자신이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작품에 덜컥 캐스팅이 된 경우였다. 그 정도로 몸을 많이 쓰는 작품을 해본 적도 처음이었고, 앞으로 더 하라면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캣츠>는 단지 춤이 많았다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의미에서 그에게 색다른 도전이었다. “예술단 시절에 했던 작품들은 모두 창작뮤지컬이었으니까 제가 맡은 역할도 대본에서 시작해서 처음부터 사소한 디테일 하나까지 제가 만들어 나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라이선스 뮤지컬을 할 때는 그 작품의 그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고 제가 그에 맞는 연기를 해내야 하는 거니까 아무래도 접근 방식이나 공연이 끝나고 나서의 기분도 달라요.”
배우로서 10년 차가 넘지만 오랫동안 무한 경쟁의 자유 시장 밖에 있었던 그에게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따내는 과정들도 쉽지만은 않다. 연차가 그 정도이니 도전할 수 있는 배역도 한계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마니아들 사이에 믿음이 가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는 것에 비해 그의 경력은 차분한 편이다. 크게 부족한 것은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만한 작품이나 배역이 주어질 법도 하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그 자신에게는 없을까. 늘 배우가 부족하다고들 말하지만 또 너무 한정된 배우에게만 작품이 편중되는 것 같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연을 만드는 분들은 티켓 판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 부분은 현실적으로 이해를 해요. 물론 하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많죠. <지킬 앤 하이드>는 특히 꼭 해보고 싶고요.” 작품을 할 때도 제3자가 되어서 보면 좀 더 잘 보이는 것들이 많다고 말하는 홍경수는 지금까지 10년 넘게 무대에 선 날들 중 단 하루도 잊고 싶거나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 없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뜨겁거나 누구보다 강렬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온도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믿음직스러운 이 배우, 그의 삶은 내일 이후도 그러할 것이다.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11호 2012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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