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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황태자 루돌프> ‘역사’와 ‘사랑’이 낳은 ‘비극’, 그 평범한 얼굴 [No.111]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2012-12-10 4,162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뮤지컬에서 실존 인물이 극적 주인공으로 환생하는 길은 두 갈래이다. 영웅이거나 희생자이거나. 그것은 역사라는 소재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역사란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이기에 거기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다. 대략 승자의 이야기는 영웅 스토리의 재료가 되고, 패자의 이야기는 비극적 이야기로 승화된다. 영웅 스토리는 이미 알고 있는 공적인 이야기의 답습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자칫 지리멸렬해질 위험이 크다. 오죽하면 감탄사와 사람 이름이 제목으로 나온 작품은 절대 보지 말라는 우스갯말이 나왔을까. ‘아, 광개토대왕!’ 이런 제목에서 기대감이 생겨나기란 사실 불가능해 보인다.

 

그에 비하자면 시대에 스러진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는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극적인 재미가 쏠쏠하다. 거기에선 공적인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사적인 사연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사적인 사연의 최고봉이 무엇이던가. 단연 사랑 이야기이다. 불멸의 사랑이 됐든 세기의 불륜이 됐든 시대를 넘나들며 회자되는 사랑 이야기는 가혹한 시대의 낭만으로 재탄생하는 셈이다. 무대 위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다.

 

 

<황태자 루돌프>의 성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

<황태자 루돌프(이하 <루돌프>)>에서 역사 속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는 비극적 주인공으로 환생한다. EMK뮤지컬컴퍼니의 전작 <엘리자벳>의 속편 격인데, 이름도 어려운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자(母子) 이야기가 한국 관객들에게 이렇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제작사도 같고 옥주현과 박은태를 비롯해 <엘리자벳>의 출연진을 <루돌프>에서도 볼 수 있기에, 이 두 작품은 언뜻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출생지도 각각 다르고 대본, 음악 등의 창작자도 전연 다르다. 무엇보다도 <엘리자벳>은 역사라는 콘텍스트에서 자유롭다. 합스부르크 왕가라는 배경은 그저 주인공을 억압하는 커다란 굴레로만 등장할 뿐 역사적 사실과 주인공과의 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엘리자베트의 운명적 연인이 ‘죽음’이었음을 기억해보시라. 그에 비해
<루돌프>의 극적 중심축은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 긴장이다. 격변기의 오스트리아에서 제국의 가치와 대립되는 진보적 이상을 꿈꾼 황태자 루돌프의 고민과 도전 그리고 좌절이 이 작품의 큰 줄기이다. 마리 베체라와의 사랑은 이러한 줄기 위에서 만개하는 꽃이라고 볼 수 있을 게다.

 

바로 이 지점이 <루돌프>의 대본에서 드러나는 역동성인데, 이 작품에서는 루돌프의 정치적 진보주의와 마리를 향한 사랑을 같은 맥락으로 엮고 있다. 루돌프와 마리가 만나게 되는 것을 비롯해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여는 일련의 계기는 그들이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는 데에서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끌린 까닭은 신분과 외모 때문이 아니다. 마리가 먼저 사랑한 것은 루돌프의 ‘생각’이었고, 루돌프가 마리에게서 발견한 것 또한 자기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었다. 루돌프가 정치적 결단 앞에서 머뭇댈 때 그는 마리를 멀리하고, 마리와 만나 얼굴을 대고 마주설 때 황태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천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과 마리 베체라를 향한 사랑은 루돌프에게 같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작품의 비장미가 만들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황태자의 정치적 이상은 현실 속에서 어처구니없게 좌절되지만 마리와의 사랑은 함께하는 죽음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기 때문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더욱 확고해지는 사랑. 이 간극 사이에서 비장한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관계를 얼마나 잘 그려내는지의 여부야말로 이 작품이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관건인 셈이다.

 

 

성공의 두 번째 조건                                             

다른 작품에 비해 특히나 <루돌프>의 배우에게 섬세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 때문이다. <닥터 지바고>나 <두 도시 이야기> 등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뮤지컬이 적지 않았지만, <루돌프>가 이 작품들과 다른 점은 갈등의 대상이 밖에 있지 않고 자신의 내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에서 주인공은 시대와 갈등하지만 극 안에는 이러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대상으로서 구체적으로 존재했다. 즉 갈등의 대상이 바깥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돌프>에서 갈등의 중심은 오로지 황태자 자신이다. 이 작품에서는 특정한 인물보다는 전체적인 상황이 루돌프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진취적인 선택과 현실적인 설득 사이에서 갈등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다름 아닌 황태자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보여줄 것인가?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이야기의 연결이 듬성듬성한 드라마에서 말이다. 이 작품의 성패는 많은 부분 배우의 연기에 달려 있다. 성공의 두 번째 관건이다.

 

그런 기준에서 볼 때 임태경은 ‘연기하는 배우’보다는 ‘노래하는 배우’에 더 가깝다. 그의 노래는 더없이 섬세하고 간결하지만 그의 연기까지 그렇다고는 선뜻 말하기 어렵다. 김보경의 가늘고 애절한 목소리도 사랑에 빠진 마리의 사랑스러움을 표현하기엔 적합하지만,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대담한 면모를 그려내기에는 그저 고울 뿐이다. 다른 캐스팅은 어떨지 직접 봐야 할 테지만, 관객은 배우에게서 노래와 연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듯싶다. 만족의 기준은 각각 다를 테니까.

 

 

그들의 특별한 사랑이 평범해진 이유                   

그렇다고 이 작품이 밋밋해진 이유를 단순히 배우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을 거다. 앞서 말한 첫 번째 관건도 충분히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루돌프>는 완성도 있는 공연으로 빚어질 만한 자산을 많이 갖고 있다. 감성 발라드를 연상시키며 달달하게 관객의 귀에 감기는 음악도 그렇고, 간단한 파티션과 회화적 이미지의 영상으로 그 많은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만들어내는 무대의 기능성은 멋스러움을 배반하지 않는다. 평면적인 공간에 비스듬히 영상을 덧입혀 입체적인 깊이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도드라지진 않지만 인상적이다. 삼디다스 추리닝을 연상시키는 황태자의 바지나 잘 들리지 않는 노랫말 등 몇몇 마음 주기 어려운 시청각적 면모가 있었으나 그걸로 이 작품의 그럴 듯함을 트집 잡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완성도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 작품이 선택한 역동적인 이야기를 스스로 살리지 못함에 있다. 이야기 자체가 띄엄띄엄 분절되어 있는 것이나, 일례로 루돌프가 헝가리의 왕이 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문제인지 극만 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극작상의 불친절함도 문제이지만, 작품의 전개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장면이 분주하게 개입하는 것도 이야기의 초점을 흐리는 요인처럼 보인다(백작부인과 수상의 내연 관계가 여기서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원작이 이렇다면 이런 불친절함과 산만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연출적 묘사에 있다.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진 않다. 장면을 강조하는 방식은 진부하고(수미쌍관으로 확인되는 황태자와 마리의 인연!) 세밀하지도 않다(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겠다는 황태자의 연설에 환호하는 이들은 모두 귀족이니, 폭동 장면을 주도했던 민중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아쉽게도 <루돌프>는 화려하고 깔끔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매혹적인 인상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이것은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슷한 소재와 규모의 다른 작품들도 장면 연출의 피상적이고도 관습적인 묘사를 극복하진 못했다. 여타의 작품과 비교해볼 때 <루돌프>가 이룬 성취가 그다지 빠지지 않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걸로 위안을 삼기엔 여전히 아쉽다. <루돌프>는 좀 더 멋진 황태자가 될 필요가 있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1호 2012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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