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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2) <빨래> 2천 회, 2천 번의 위로를 만든 사람들 [No.110]

대담 참여자 | 추민주(극작, 연출), 민찬홍(작곡), 최세연(의상, 수박 대표) | 진행 및 정리 | 김영주 2012-11-27 5,967


 

빨래를 널기 시작하다

 

 

<빨래>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추민주 : 2003년 12월 17일, 18일에 연극원에서 졸업 공연으로 올라갔던 작품이고 우리 세 명과 함께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신동, 김태영, 이재준, 오미영, 민준호에요. 다 잘됐죠? 제 자랑을 하자면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추민주와 함께 작업을 하면 다 잘된다’(일동웃음). 아, 그때 성기웅 연출도 참여를 했어요. 기타 연주를 했죠. 다들 친구였고,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때는 학교 작품이었으니까 전문적으로 잘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같이 작품을 만드는 분위기 자체를 저는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대신 작곡가가 좀 고생을 했죠.(웃음)

민찬홍 : 아무래도 학교 작품인 만큼 체계적인 프로덕션의 단계를 거치면서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쓰고 연출을 하는 추민주 연출님의 상황에 따라서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공연을 완벽하게 준비하기에는 굉장히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학생이었고 어렸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대본을 먼저 쓰고 곡 작업을 하다보니까 막판에 연습을 하면서 남은 곡을 쓰게 됐는데 그때는 일주일 정도 집에 처박혀서 곡을 쓰면서도 좋았어요. 작업을 하는 느낌보다는 노는 느낌, 작업을 하는 것이 곧 노는 일이었죠.

추민주 : 서나영이라는 이름도 주연을 맡은 친구의 이름을 쓴 거예요. 처음부터 나영이한테 가서 ‘네가 내 졸업 작품에 출연을 해, 그리고 작품 속에 니 이름을 쓸게’ 그렇게 던지면서 시작을 한 거였죠.(웃음) 이 작품은 시작부터 그래요. 반지하방에 살 때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갔더니 방글라데시 청년 세 명이 있었어요. 웃통을 벗고 트렁크 팬티 차림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나타나니까 자기들끼리 니가 인사해, 니가 인사해 하고 서로 미루다가 빨래를 턱하니 입더니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어왔어요. 이 작품이 태어나게 된 그 순간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 같아요. 그 날은 일기에 그 이야기를 길게 썼어요. 그 사람들이 나한테 했던 말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시간이 좀 흘러서 졸업 작품을 하게 됐을 때, 결국 작가든 연출가든 세상에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내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가 했을 때, 나를 공연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마을이고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서울에서 방을 찾아다니면서 대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어요. 그리고 수많은 빨래들을 봤죠. 가난한 학생이었으니까 가난한 동네에 살았고, 그 빨래들을 많이 본 거죠.

 

최세연 : 난 공연한 첫날이 기억이 나. 어떤 그림이었는지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데, 처음 대본을 받고 나서는 그냥 그 당시에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의 옷을 준비할까 그 생각밖에 안 났어요. 그때의 나는 이들처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

추민주 : 이쪽이 제일 고생을 했죠. 세연이는 그때 이미 프로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중에서 가장 전문적이었어요. 작업하는 방식도 가장 프로페셔널했기 때문에 세연이는 정말 다르다 생각을 했어요.

최세연 : 이미 영화 쪽에서 3년 정도 일했을 때였어요. 그때 집이 구리였는데 거기까지 가서 엄마 옷, 할머니 옷을 쓸어오곤 했어요. 돈이 없다보니까 배우들에게 말도 안 되는 사이즈의 옷을 입히기도 했는데 이재준 연출이 푸대처럼 큰 바바리 코트를 입고 연기를 하는 모습은 지금 영상으로 봐도 웃겨요. 그때 우리가 학생이었지만 정말 풋풋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좋더라고요.

민찬홍 :  저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냥 무조건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 그 당시와 지금은 제가 추 연출님의 대본을 받아보는 기분이 좀 달라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1~2년 동안 알고 있었고 추 연출님이 처음 쓴 대본을 보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때는 마치 팬이 작품을 보듯이 그냥 다 좋아했어요. 약간 팬심이 있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대본을 받아볼 때 작업자의 입장에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저에게 어떤 의식이 형성된 후부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사실은 이 작품이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구나 하는 것도 몇 년 후에 더 깊이 알게 됐어요.
추민주 : 12월 17일 공연인데 첫 곡이 11월 30일에 나왔죠. 너무 빠듯하게 부탁을 했어요. 찬홍이가 좀 늦게 작업을 시작했는데 노래 연습도 시켜야 하고 곡도 써야 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았죠. 찬홍이의 첫 곡이 나왔을 때는 우리 모두 정말 기뻐했어요. ‘서울살이 몇 핸가요’가 첫 곡, 그다음이 ‘빨래’였어요. 그땐 정말 다같이 재밌었어요. 사진도 많이 찍었죠.

 


마음으로 하는 빨래

 

첫 공연 때 러닝타임이 몇 분이었죠?
추민주 : 1시간 25분? 지금은 두 시간 반이에요. 노래는 리프라이즈 포함 7곡에서 18곡으로 늘었고요. 아, 또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처음에 ‘슬플 땐 빨래를 해’를 빼곡한 대사로 적었어요. 그런데 찬홍이가 그걸 보더니 ‘누나, 이거야 말로 노래야. 여기서 노래가 나와야 하고 노래로 이 장면을 풀어야 해’라고 말을 해줘서 그때 가사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넣었더니 이 작품이 딱 완성이 됐어요. 그 역할을 찬홍이가 했죠.

최세연 : 둘이 되게 잘 맞아. ‘내 딸 둘아’도 원더스페이스에서 공연할 때 되게 금방 만들었던 곡이지?
추민주 :  두산에서 미팅이 있어서 갔다가 커피숍에 앉아서 썼지. 그런데 내가 짧은 시간에 금방 써서 얘한테 넘기면 노래도 금방 나와. 내가 지지부진하면 얘도 그래.
최세연 :  그 곡을 정은 언니가 처음 불렀는데 내가 그 곡을 듣고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한 걸음’, ‘안녕’도 정말 금방 나왔어요. 그런 합이 정말 잘 맞아요.
추민주 : 처음에는 그 곡들의 가사를 지금의 두 배로 줬지. 찬홍이가 ‘누나, 사설시조 이제 그만’ 그랬어.(웃음) 그렇게 조율해 가는 과정도 재밌어요. 학교를 다닐 때부터 우리는 작품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하고 공동 작업을 하는 게 몸에 좀 배어있어요. 그리고 각자 생각해 와서 회의를 많이 했어요. ‘한국말 다 알아’는 이쯤에서 극의 분위기가 한번 밝아져야 하니까 이 곡은 춤곡이었으면 좋겠다든가, 이 타이밍은 곡이 들어가야 한다 아니다, 이런 걸 회의에서 결정하고 집에 가서 가사를 써서 찬홍이한테 넘기는 식이었어요. 중극장인 두산아트센터로 넘어가면서 ‘한 걸음’과 ‘안녕’이라는 나영과 솔롱고의 아리아가 각각 한 곡씩 나오게 됐는데, 솔롱고가 부르는 아리아가 한 곡 생기면, 나영이가 부르는 아리아도 똑같이 한 곡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한 것도 작곡가였어요. 그렇게 둘의 밸런스를 맞춰야 한다면 그 곡이 들어가야 할 타이밍은 어딜까, 그건 제가 찾아냈어요. 술 마시면서 흥얼거리는 걸로 시작했죠. 그런 식으로 작업을 했어요.
민찬홍 :이 작품의 특징이 있다면 세 번에 걸친 개발 과정이 있었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초연을 한 후에 두 번 정도 보완할 기회가 있었어요.

추민주 : 03년에 졸업 작품을 올리고, 얘는 군대를 가고, 04년에 제작을 준비해서 이듬해 처음 국립극장에서 발표를 할 때는, 작곡가가 없었어요. 그리고 06년에 다시 이 작품이 올라갈 때 다른 작곡가들이 새로 작업을 했고 그해 하반기에 얘가 제대를 했을 때 07년도에 다시 공연을 하기로 결정이 났죠. 그때 전체 공연을 민찬홍 작곡가의 곡으로 통일하기로 확정했는데 그러면서 비로소 지금의 <빨래>가 됐어요. 사실 06년에 얘가 군대에 가 있을 때 제가 굉장히 긴 편지를 보냈어요. <빨래>를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 사실 좀 힘든 일이었고, 다시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고, 나의 상태는 이러한데 나의 상태를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이 작업을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친구이자 작곡가인 찬홍이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했던 심경 토로 같은 거였죠.

 

 

 

빨래, 세상으로 나오다

 

학교 울타리 밖에서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들이 있었을 거 같아요.

추민주 : 그쵸. 학교는 엄청난 울타리죠. 저는 이렇게 지하에서 살게 될 인생이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학교에서 작업을 할 때 바깥의 현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지 경험도 없었거든요. 넓은 창에서 햇살이 쏟아지는 나무 책상에 앉아, 때로는 마룻바닥에 누워서 조용하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그게 좋은 줄도 모르고 그냥 맘껏 누리다가 바로 반지하 연습실로 쫓겨난 거죠. 일단 환경의 차이가 엄청났고요. 또 학교에서 연출이자 제작자이자 기획자인 입장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으니 프로듀서가 필요한데, 프로듀서와의 조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투자자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관객과 어떤 식으로 만나야 할 것인가를 대신 결정해주는 제작사가 있었다면 우리의 방향은 굉장히 달라졌겠죠.

최세연 :  애초에 저희는 <빨래>를 가지고 프로 무대에 가야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초청이 되고 상을 받으면서 어어…하는 사이에 이렇게 된 거였어요. 그러다보니까 저희는 계획된 프로 의식 같은 게 없었어요. <빨래>를 사랑하는데 돈이 없으니 각자 다른 직업에서 얻은 돈으로 50만 원씩, 30만 원씩, 마지막에는 진짜 다들 지갑을 다 털어서 19만 원씩 모았죠.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었는데 생활이 힘들어지니까 중간에 나가는 친구도 있고, 또 이 작품을 사랑해서 새로 들어온 친구도 있고 그랬어요. <빨래>말고 다른 작품에서 버는 돈을 모아서 <빨래>를 무대에 올린 거죠. 그러면서 큰 기획사에서 프러포즈도 받았고, 공동 제작을 하자는 회사도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내성이 생기니까 우리끼리 부딪혀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게 06년 하반기 상명아트홀에서의 공연을 하고 나서였어요. 그때부터 우리가 자립을 한 거죠.

추민주 : 세연이는 의상 하느라고 자기 돈을 얼마나 많이 끌어다 썼는지 몰라요. 07년쯤 됐을 때는 우리도 현장에 대한 감이 생기고 내성도 좀 생기고 또 어떤 길을 가야겠다, 이 판 안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자리매김을 해야겠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최세연 :  주변에서 <빨래>에 대한 좋은 입소문도 났지만 우리는 작품에 대한 이유 모를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어요. 어디서 난 자신감인지 관객 점유율은 2퍼센트, 3퍼센트인데 계속 판을 키웠어요. 우리가 미친 거죠.(일동 웃음) 그러면서 원더스페이스를 거쳐 두산아트센터에 올리면서 점점 더 이 작품이 확실해진거죠.

각본상을 받은 건 언제였죠?

추민주 :  2005년 초연 때요. 그것도 되게 재밌어요. 그때 최지원이 대표로 있을 때였는데 ‘우리 여기 내려고 하는데 괜찮겠어?’라고 묻길래 ‘왜에?’라고 했어요.(웃음) ‘뭐 재밌잖아, 한 번 내보자’ 하고 또 잊었어요. 그때 연습 기간 내내 반주를 정말 열심히 해줬던 친구한테 ‘내가 상을 받게 되면 네 이름을 꼭 이야기해줄게’라고 했어요. 빛을 보는 게 없는 자리에서 묵묵히 제일 열심히 해주는 그 친구가 정말 고마웠거든요. 그런데 진짜 노미네이트가 돼서 수박 식구들은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수상자가 ‘명랑시어터 수박 <빠…>’라고 한 순간 그 친구들이 초고음으로 소리를 꽥 질렀죠.(웃음)

수상 소감이 화제였어요.

추민주 : 석관동 주민들에게 감사하고 강아지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강아지가 그 반주해주던 친구의 닉네임이었어요. 그런데 그 수상 소감 때문에 제가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생겼죠. 지금도 저희 어머니께서 부모에게는 감사 안 하고 강아지한테 감사했다고 아주 그냥… (웃음) 참 감사한 일이었죠. 그 상을 받으면서 제가 이 업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을 받았고, 또 많은 분들을 알게 됐죠. 좋은 계기였어요.

배우 캐스팅의 기준은 어떻게 되죠?
최세연 :
  민주 언니는 얼굴 보고 뽑고요, 찬홍이는 작곡가니까 노래 보고 뽑죠.(웃음) 찬홍이는 실컷 캐스팅해 놓으면 전화해서 딴소리하다가 ‘누나,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누나, 이 배우 공연 한번 봐봐요’ 이래요.
민찬홍 : 아, 몇 번 안 그랬어요. 저는 요즘에는 예스맨이에요.
일동 : 거짓말! 배우들이 그렇게 키 좀 낮춰달라고 해도 거절하면서.
추민주 :  너는 누가 어떤 곡을 불렀을 때 제일 기뻤어? 궁금하네.
민찬홍 : 좋았던 기억이 몇 번 있죠. 내 머릿속에 있는 음악이 배우를 통해서 노래로 불린 순간은 머리로 음악을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죠. 그 감동 때문에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5차 두산아트센터 공연 캐스트로 녹음을 했는데, ‘참 예뻐요’가 대표곡이라면 대표곡이잖아요. 홍광호 배우가 그 곡을 녹음하는데, 제 기억에 거의 한 번에 갔던 거 같아요. 아주 작은 디테일은 조금 손봤지만 거의 처음 불렀던 대로 오케이가 되어서 그 녹음이 남아있죠. 그때 참 좋았어요. 물론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도 그랬지만 녹음을 하면서 들어보니까 반복해서 수정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딱 부른 것만으로도 이 노래를 가장 잘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고마웠고 기억에 많이 남아요.

일본으로 간 빨래

학전에서 장기 공연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추민주 :
  <지하철 1호선>을 했던 배우들이 2008년에 대거 <빨래> 팀으로 들어왔고, 제작감독이었고 지금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김희원 선배가 학전 출신이에요. 두산아트센터 이후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했을 때 애초에 관객과 가깝게 만나야 하는 작품이라는 판단을 했어요. 마침 <지하철 1호선>이 막을 내려 학전그린이 비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렇다면 <지하철 1호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 그 기운을 받아서 그곳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김민기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주시던가요?
추민주 :
소극장에서 창작뮤지컬을 계속한다는 것은 벌거벗은 기분으로 하는 작업이라고. 어떤 허위의식이나 어떤 부채 없이 만들어야 한다고, 그 작업에는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일본 공연 당시 문화적이 차이 때문에 어렵지 않으셨어요?
추민주 :
처음에는… 막막했죠. 이분들과… 어떻게 이것을… 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스타일에 차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같은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같은 노래를 부른단 말이죠. 이미 그 곡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고 일본 배우들이 그걸 알고 있었어요.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첫 리딩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 다음에 숙제가 있었죠. 굉장히 절제하고 예의 바른 이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 것인가. 공연 후에 제가 노트를 할 때 배우들이 둥글게 모여서 무릎을 꿇고 제가 할 말을 기다려요. 그래서 제가 의자에 앉아있지 않았어요. 저도 바닥으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죠. 인사를 할 때도, 표현을 할 때도 스킨십을 많이 했어요. 작품에서 나영이가 울 때 주위에서 쓰다듬어주고 위로해주는 걸 일본 배우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사람이 울고 있으면 혼자 있게 해줘야지 왜 우는 사람에게… 이런 거죠. 그런데 우리 감성으로는 우는 사람을 내버려두는 문화가 아니잖아요. 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한국의 뮤지컬을 일본에서 올리는 게 아니라 진짜 문화를 교류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경험이었어요.


시대의 변화를 작품에 반영하실 생각이에요?
최세연 :
사람들이 <빨래>가 어느 시대 배경인지 알쏭달쏭해 하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은 현재의 서울살이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맞춰가야 하는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월세나 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죠

추민주 : 아, 재밌는 게 있어요. 우리나라 최저임금이 2003년에 54만 원이었어요. 지금은 95만 원이거든요. 최저임금의 변화는 계속 가사에 반영을 해왔어요. 그건 재밌는 변화인 듯해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0호 2012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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