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전을 꿈꾼다
2005년 창작뮤지컬 <불의 검>의 주인공 아사 역으로 임태경이 처음 뮤지컬 무대에 섰을 때, 그가 부른 (지금도 남자 뮤지컬 배우 지망생들의 오디션 단골 넘버로 사랑받고 있다) ‘그대도 살아주오’에 반하기는 했지만 7년 후까지 그를 뮤지컬계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잘나가는 팝페라 가수의 외유 정도로 생각했던 그와 뮤지컬계의 인연은 기대를 뛰어넘어 꾸준히 이어졌고, 다양한 역할을 통해 연기의 폭을 한 뼘씩 넓혀가던 임태경은 자신의 전공 분야로 보이는 <황태자 루돌프>로 오랜만에 신작에 도전한다. 함께 캐스팅된 배우 안재욱이 사석에서 말한 대로 ‘연기로 어떻게 표현이 안 되는 그냥 진짜 황태자 같은 기품을 타고난’ 그에게 비운의 황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드디어 황태자 역을 하시는군요. 햄릿도 왕자였지만 이번엔 실존 인물이다보니 좀 더 리얼하게 ‘드디어!’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아.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작품을 안 하려고 했는데…(웃음) <라카지>를 비롯해서 다섯 작품이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라카지>에서는 무슨 역이요? 설마, 자자?
당근.(일동 웃음) 했으면 진짜 재밌었을 거 같아요. 진짜 하고 싶었어요. 배우로서 도전해볼 만하다 싶었죠. 그런데 <라카지>는 <모차르트>와 시기가 겹쳤어요. <모차르트>를 이번에 하면 몇 년간 안 한다고 하니까… 아쉽지만 그렇게 결정을 했죠.
처음에는 꺼렸던 작품을 결국 선택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사실 너무 뻔하잖아요. 내가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임태경에 대해 흔히 왕자니, 황태자니 그런 말을 잘 갖다 붙인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꺼려졌는데 음악이 정말 좋아요. 결정적으로 음악에 반했어요. 와일드혼의 작품은 처음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좋아할 만한 곡을 쓰는 거 같아요. 뽕기라고 하는 그 감성이 아주 넘쳐나는 음악인데, <황태자 루돌프>의 경우에는 음악이 너무 좋아서 배우로서는 좀 위험할 수 있어요. 가장 기억할 만한 아리아, 가장 사랑할 만한 아리아가 너무 많아서 자칫하면 오히려 다 묻힐 수가 있어요. 거의 모든 곡이 ‘지금 이 순간’ 같은 곡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러다 보니 잘못하면 그 곡이 그 곡 같고, 다 좋긴 한데 돌아서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반대로 배우가 각 곡마다 창법이나 감성적으로 섬세하게 변화를 줘서 잘 표현하면 관객들이 O.S.T를 내달라고 아우성을 칠 만한 작품이에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역에 딱이라고 하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듯해요.
그래서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접근을 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완전히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내 색깔을 찾아갔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과 너무 비슷할 수 있는 캐릭터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통 하는 방식의 ‘액팅’을 시도해보고 있어요. 나를 버리기 위해서요. 여태까지는 제가 연기자로서 큰 것도 아니고, 액팅을 노련하게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극에 몰입해서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 배역의 모습이 나오게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원래 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저를 버리기 위해 연기를 하려고 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 역할에 어울리니까 편하게 하면 되겠네, 수월하겠다고 말을 하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더 힘들어요. 원래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제가 무대에 섰을 때 황태자 루돌프가 아니라 그냥 임태경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어요.
그냥 원래 자기 모습 그대로 해도 관객들은 속을 거 같은데 어렵게 가시네요.
제가 좀 성격이 그런 것 같아요. ‘편하게 해도 되는 작품이잖아’ 라는 말을 못 견디겠어요. 제가 듣고 싶은 말은 ‘원래 임태경이랑 잘 어울릴 줄 알았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단순히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각이 살아있고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만약 못 듣더라도 어쨌든 그걸 목표로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제가 반전을 좋아하거든요. ‘임태경 노래 달달하지, 러브신, 낭만적으로 잘하겠지, 원래 황태자 이미지잖아’ 그냥 그런 생각을 하고 보러 오신 분들께도 ‘어, 근데 직접 보니까 뭔가 달라. 생각 못했던 부분이 있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황태자 루돌프라는 인물은 양극단의 모습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인정받지 못한 유약한 문인 같은 면이 더 많다고요.
정말로 강한 인간이었다면 쿠테타라도 일으켰겠죠. 그런데 극 중 내용을 보면 루돌프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다른 걸 모두 다 내려놓거든요. 만약 전사 같은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상이나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했을 거예요. 제가 전사 타입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처럼, 권력자인 아버지는 군인 같은 황제에요. 그런데 루돌프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사상가였어요. 야망을 진취적으로 이뤄 나가는 쪽으로 머리가 움직이는 것보다는, 그 시대 빈에서 로맨틱한 유행병처럼 퍼져 나갔던 자살에 매료되는 로맨티스트였던 거예요. 죽음으로 하나가 되는 사랑을 원하는 로맨티스트를 외국 공주와 정략결혼을 시켜놨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게다가 정치적인 쪽으로는 아버지가 들어먹지를 않으니까 줄리어스 펠리스라는 가명으로 신문에 자기 뜻을 펼치는 글을 기고하는 거죠.
낭만주의자들은 사실은 실패를 좋아한대요. 실패가 주는 괴로움이나 처절함, 슬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매력이 있거든요.
난 이해해요.
전사 같은 성격이면서 어떻게 그 감성을 이해하세요?
테스트를 해보면 제가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에 있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저 스스로 생각하는 제 장점이 그런 면으로 이해의 폭이 넓다는 거예요.(웃음)
호흡을 맞추는 파트너들과는 어때요?
마리 세 명이 정말 달라요. 성격도 다르고 체형도 달라요. 옥주현 마리는 키가 저랑 거의 비슷해요. 저는 이 작품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밸런스도 잘 맞아야 관객들이 몰입하기에 더 좋겠다 싶어서 나는 키나 체형이 김보경 씨와 잘 맞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보니까 옥주현 씨가 음색도 그렇고, 연기 스타일이 저와 잘 맞더라고요. 저는 계산이 딱 되어 있는 걸 맞춰서 하는 것보다 상대 배우와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가는 걸 좋아하는데, 옥주현 씨는 주는 만큼 받아서 돌려주는 그런 면이 저와 잘 맞더라고요. 최유하 씨 같은 경우에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운동권 여성 같은 당당함, 그런 중성적인 느낌이 있어요. 셋이 정말로 달라요. 그래서 누구와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제가 연기하는 루돌프도 변해요. 김보경 씨와 할 때는 제가 더 어른스럽고, 정말 마리를 사랑스러워 하는 그런 캐릭터가 되고, 최유하 씨와 할 때는 저 역시 조금 더 사상가로서의 면이 강해져요. 옥주현 씨와는 연기적인 시너지는 좋은데,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게 내가 오히려 위로받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해요.
루돌프가 모순적인 인간이다보니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없었어요?
저는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은 없어요. 왜 그럴까 싶을 정도로 정말 이해가 잘돼요. 그런데 제가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뭐냐면,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작품을 맡으면 그 배역에 너무 몰입한다고 했잖아요, 대본을 받는 순간부터 평소 생활도 그 인물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 작품을 하면서도, 제가 원래 술을 잘 안 마시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마셔요. 말리는 사람이요? 혼자서 마시는데 누가 말리겠어요.(웃음)
황태자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소재가 하이틴 로맨스 같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이 작품은 성인물이에요. 공연 등급은 12세 이상 관람가여도 자기 아내가 아닌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어서 목숨을 버리는 내용 자체가 성인을 위한 감성이라고 생각해요. 왕자가 나오고 공주가 나오지만 동화가 된다면 원작의 느낌을 왜곡하는 것 같아요. 좀 더 사실적으로 삶의 치부를 파고들어서 30대 이상의 실제 사랑을 해본 기억이 있는 어른들이 ‘아, 내가 그때 저 인물로 태어났다면 저런 결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공감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쁜 판타지가 되기에는 권총 자살이라는 소재 자체가 안 어울리죠.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좀 더 그늘진 판타지고요. 같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발레 <마이어링>도 그렇지만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정말 어둡고 야한 작품이 될 것 같은 그런 이야기에요. 죽음으로 끝나는 금지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동화의 감성이 있다면 이 작품은 실사, 현실의 드라마 같은 거죠. 그 감성이 제대로 표현되면 사람들이 정말 꺽꺽대고 울면서 볼 거 같아요.
이 작품이 치밀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배우의 역할이 더 큰 작품 같아요.
네, 맞아요. 게다가 이건 쇼 뮤지컬이 아니기 때문에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을 홀릴 수도 없어요. 얼마나 사랑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아버지가 저렇게 압박을 하면 저 황태자라는 위치에서 얼마나 괴로울까, 그렇게 핵심적인 부분에서 계속 공감할 수 있도록 정서를 잡고 가지 않으면 관객들이 지루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노래로 연기를 하는 것과 대사 연기에 차이를 느끼세요?
<황태자 루돌프>가 좀 특이한 게 다른 작품에서는 사실 노래에서 제 캐릭터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었는데, 이번 작품은 오히려 노래를 할 때는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작품에서 노래는 드라마를 이어주고 캐릭터를 표현해주는 역할을 주로 하는 게 아니라, 보통 뮤지컬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큰 볼거리들이 하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도리어 드라마적인 대사 연기를 해야 하는 부분에서 캐릭터가 더 잘 살아나는 것 같아요.
솔로 앨범도 있고 가수로도 활동하시지만, 뮤지컬 작품 속에서 노래를 하는 것과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차이가 있죠?
완전히 달라요. 처음에는 제가 그 경계를 잘 못 지켰어요. 그냥 노래를 할 때는 ‘노래’를 잘해야 해요. 근데 뮤지컬에서는 그냥 ‘노래’를 잘하면 극이 끊기고 갑자기 콘서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아마 <스위니 토드> 때부터 제가 그런 식의 ‘노래’가 아니라 ‘노래 연기’를 시작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들리는 이야기가 ‘어, 임태경 연기가 좋아졌어, 그런데 노래가 예전 같지 않아’ 라는 거였어요.(웃음) 그런데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제가 하는 작품을 본 관객들이 ‘어, 임태경, 노래 진짜 잘하더라’라고 하는 것보다, ‘임태경이 나온 뮤지컬을 봤는데 작품이 진짜 재밌더라, 배우들 다 훌륭하더라’ 그게 제가 배우로서 얻고 싶은, 듣고 싶은 이야기에요. 임태경은 최고의 배우라는 이야기보다 ‘임태경이 나온 작품은 정말 볼만해, 그 사람이 하는 공연은 실망시키지 않아’그런 이야기가 제가 더 원하는 찬사에요.
솔리스트로 시작한 사람이 하기 힘든 생각 같아요.
감사합니다.(웃음) 뭐가 더 큰 건지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해요. 내가 더 큰가, 우리가 더 큰가. 간단한 문제잖아요. 주인공이 빛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시나리오 자체도 나를 돋보이게 해줘, 음악도 그래, 연출도 그래, 심지어 조명도 더 많이 비쳐줘, 그런데도 빛나지 못한다면 정말 배우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거꾸로, 그렇게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주어지는 자리에서 연기를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을 했어요. 모든 것이 나를 빛날 수 있게 해주니까, 다른 배우들에게 내 에너지를 주고 호흡을 줘서 그들과 같이 빛나야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함께하는 연기에 눈을 뜨고, 그 재미를 알게 된 거죠.
뮤지컬을 이렇게 오래하게 될 줄 아셨어요?
얼마나 더 오래 할 것 같으세요? 사실 이제 뮤지컬 그만하자는 생각도 했어요. 여러 가지로 정말 힘들었거든요. 작품과 배역에 너무 깊이 빠져서 힘든 것도 그렇고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렇고. 방송이요? 방송도 싫어요. 제가 벌써 너무 루돌프 캐릭터에 동화되었나 봐요. 세상이 다 싫고 불만스럽고 억울하고 그러네요.(웃음) 어쨌든 뮤지컬은… 참 힘들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게 되는 이유가…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참… 그걸 모르겠어요. 제가 자동차를 되게 좋아해요. 그런데 예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시면 제가 갖고 싶어 하던 차를 사주시겠다는 거예요. 저로서는 얼마나 좋은 기회에요? 막 신이 났는데, 계약하러 가기 전날 계속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정리를 해본 거예요. 갖고 싶었던 차를 아버지가 사주신다고 하면 기쁘게 받으면 되는데 제 성격이 그러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장점은 내가 갖고 싶은 걸 갖는다는 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거 외에는 전부 다 단점이에요. 그래서 그냥 안 살래요, 이걸로 어머니 필요한 거 사세요라고 말해서 우리 어머니만 신이 난 일이 있었어요. 그런 식으로 장점 단점을 정리하면 내가 지금 뮤지컬을 함으로써 얻는 장점으로 뭘 꼽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단점은 계속 생각이 나는데.
그런데, 뮤지컬을 하는 이유는?
뮤지컬을 하는 이유는, 마지막에 커튼콜 때 관객들이 보내주는 우레와 같은 공감의 박수. 내가 이만큼 애쓰고 내가 이만큼 내 살 깎아먹으면서 한 일에 이 사람들이 이렇게 공감을 해주는 것이구나, 그 맛에 하는 거예요. 배우들이 그것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 박수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와서 얼마나 말도 못할 고독의 나락에 떨어지는지. 변태들인 것 같아요. 그 극한 고독과 극한 희열 사이에서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저 자신을 보고 불나방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다 태우고 다시 불사르고 하는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뭔가 쌓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걸 경계해요. 그런 것들이 저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뮤지컬은 첫 연습에 들어갈 때가 제일 힘들어요.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괴롭죠. 그리고 고생하고 작품이 끝날 때면 내가 또 뮤지컬을 하나 봐라 하다가도 다시 새로운 작품을 보면 아, 이거 좋다, 이거 진짜 표현해보고 싶다, 그러는 거죠. 계속 그래요.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10호 2012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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