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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OPLE&PEOPLE] 장민호 선생과 함께 한 오만석 [No.69]

글 |박병성 사진 |이맹호 2009-06-29 7,277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길, 장민호

 

‘살아 있는 전설’ 요즘은 흔히 쓰지 않은 클리셰다. 그러나 연극배우 장민호 선생에게 붙여질 때만큼은 더 이상 클리셰가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배우 양성기관인 조선배우학교 출신, 한국성우협회 이사장(1966년), 한국연극협회 부회장(1968년), 한국텔레비전 연기자협회 명회회장(1977),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등. 장민호 선생은 연극무대뿐만 아니라 라디오, TV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하며 배우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국립극단장도 두 차례에 걸쳐 장장 13년간 역임하였고, 국민훈장을 비롯 수상한 상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역사서에서 걸어나온 듯한 선생을 인터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오만석이다. 오만석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로 장민호 선생을 공공연하게 언급해왔다. 장민호 선생님을 만난다는 말에 오만석은 바쁜 스케줄을 조정해가며 선생이 연습하는 남산 연습실을 찾았다.

 

 

장민호 선생은 배우라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 선생이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상과 영예를 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23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통해 무대 위에서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올해 선생의 나이가 여든다섯. 거동도 쉽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놀라운 자기관리로 여전히 무대에서 건재함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번 무대는 자신의 추억이 살아있는 명동예술극장의 복원 개관작 <맹진사댁 경사>이다. 오만석의 방문에 장민호 선생은 오랜 만에 만나는 후배를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장민호(이하 장) : 어서 와. 우리가 함께 출연한 첫 작품이 <보이체크>였던가?
오만석(이하 오) : 아니요, 선생님. <금강>이 먼저였습니다. <금강> 먼저 하고 다음해에 <보이체크>를 한 후에 <금강>으로 평양을 갔었습니다.
장 : <보이체크> 총연습을 하다가 세트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쳤었잖아. 절룩절룩 하면서도 다 해내는 것이 잊혀지지가 않아.
오 : 예. 그때 인대를 다쳐서, 좀 고생을 했습니다.
장 :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이 참 좋았어. 오만석이라. 오백석만 해도 큰 부자인데 오천석도 아니고 오만석이라니 얼마나 좋은 이름이야. 오만석짜리 배우가 되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 보면 오만석짜리 배우가 되고 있는 것 같아. TV에도 나와, 영화에도 나와, 뮤지컬도 나와 내가 젊었을 때 하고 비슷한 것 같애.
오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선생님 젊었을 때와 비교가 안 되죠.
장 : 우리 때는 순수연극만 진짜 예술이라 해서 악극은 조금 천시하는 분위기였어. 그래서 지금도 노래를 하라고 하면 도망가는데, 만석이는 노래도 잘해서 여러 가지로 배우로서의 조건이 오만석짜리 배우가 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유명한 배우와 신인 때 같은 무대를 섰다는 게 좋은 추억거리가 되겠구나 싶고.

선생님의 황송한 칭찬에 오만석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당시 <보이체크> 때 함께 출연했던 서희승 배우에 의하면 다리를 다쳤는데도 열심히 임하는 오만석을 보면서 앞으로 크게 될 거라며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드러내서 칭찬을 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오만석의 성실함과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장민호 선생과 오만석은 여러 모로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이 차이가 50세 정도 나니 한국 공연계도 그만큼의 차이가 나겠지만 우선 둘은 당대 최고의 배우 학교를 거쳤다. 오만석은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 졸업생이다. 최근 황지우 총장이 문광부의 무차별적인 감사에 자진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한예종은 지금까지도 한국 최고의 종합예술학교이다. 반면 장민호 선생님은 명칭부터가 무게감이 느껴지는 최초의 배우 학교인 ‘조선배우학교’ 출신이다. 원래 ‘조선배우학교’는 1925년 일제시대 때 현철이 세운 배우 양성 교육기관이었다. 20여 명을 선발해 교육했는데 학생들이 캐스팅의 문제를 삼으면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교하였다. 해방 후 현철은 다시 조선배우학교를 세우고 근대 연극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을 양성하였다. 바로 해방 후인 1947년 장민호 선생은 이곳에서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오 : 지금은 교재나 자료도 많고 교육기관도 많잖아요. 그런데 40년대에 어떻게 배우들을 양성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장 : 지금은 각 대학마다 연극영화과가 있고, 배우 학원이니 다양한 교육기관이 있지만 그 시절에 배우 학교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야. 우리 신극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현철 선생이 일본에서 근대극을 공부하고 자기 수련을 하고 오셔서 해방 직후 서울역 앞에서 ‘조선배우학교’를 세우셨지. 그때는 교실이 아니라 조그만 방이었어. 거기에서 이론 강의도 하고 실기도 하면서 학문적으로 배우니까 차차 기본이 생기더라고. 그때 연극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불러줘서 오늘 같은 배우가 되지 않았나 싶어. 그러다 보니 이제 슬슬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해.
오 :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건재하신데요. 우리나라 초창기 배우학교를 나오시고 연극이나 TV, 라디오 등 초창기 우리 예술계가 태동할 때 기반을 다 다져놓으셨잖아요.
장 : 라디오에서는 47년에 처음으로 성우를 했어. 요즘으로 말하면 성우인데 그때는 그런 말이 없었고 다 배우라고 그랬지.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배우 모집한다고 해서 지원을 했는데 뽑혔던 거야. 그래서 우리나라 제1기 성우가 됐고, TV는 화신 백화점 맞은편에 민간 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작했지. 그리고 KBS가 개국하면서 라디오 방송 하fi, TV 프로그램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하게 되고, 연극은 연극대로 하게 되고 정신이 없었지.
오 : 무척 바쁘셨겠네요. 선생님이 실력이 좋으시니까 아무래도 많은 일이 몰렸을 것 같아요.
장 : 그때는 TV도 라이브로 하던 때라 대사가 많은 캐릭터가 있으면 나한테 섭외가 들어오는 거야. 나는 연극을 했으니까 아무래도 대사를 암기한다거나 하는 면에서는 나았지.
오 : 맞아요. 지금도 무대 위에서 집중력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이 무대 위에 서 연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장 : 젊었을 때 바쁘게 보내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다 보니까 틀이 없어지더라고.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한 작품만 해서 그 인물의 틀에 젖어버리는 거야. 그게 제일 나쁜 습성인데 워낙 다양한 장르에서 여러 역할을 하니까 그럴 새가 없었지.

 

 

오만석 역시 연극, 드라마, 뮤지컬, 영화 각 장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배우 오만석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즐거운 인생>의 연출가로 참여해 그의 고집 있는 연출에 호, 불호가 나뉘기는 했지만 주목을 받았다.
50~70년대 문화예술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젊은 시절부터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극에 출연했던 장민호 선생님에게 명동극장은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다. 5월 11일 첫 공연에 앞서 명동예술극장 집들이 행사에서 장민호 선생은 오프닝 독백으로 “내 사랑, 내 명동극장, 이 경사를 살아서 맞이할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며 눈시울을 붉혔다. <맹진사댁 경사>에서 맹노인이 손녀인 갑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하는 대사를 응용해서 명동예술극장의 복원의 감격을 술회한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장민호 선생은 바로 그 맹노인 역으로 출연한다.

 

오 : <맹진사댁 경사>는 선생님과 인연이 많은 작품이죠. 2004년에도 맹노인 역할로 출연하셨잖아요.
장 : 그랬지. <맹진사댁 경사>는 신협 때도 하고, 국립극단에서도 하고 많이 했었지. 극단이 빚을 지게 되면 이 작품을 올려. 이 작품을 하면 빚을 갚을 수가 있거든. 관객들이 좋아하는 연극이야. 우리 전통을 담으면서 의상도 화려하고 결혼식 장면도 있고. 볼거리도 풍부하잖아. 만석이도 시간이 됐으면 신랑 역으로 출연했으면 좋았을 것을.
오 : 지금은 뮤지컬 <드림걸즈>에 출연하고 있어서요. 명동극장에 올린 작품에도 많이 출연하셨겠어요.
장 : 함께 했던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그들이 다 가고 나만 남아있게 됐어.
오 : 선생님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파우스트’셨잖아요. 제가 10년 전에 연극에 데뷔할 때 <파우스트>의 코러스 역할로 출연을 했었어요. 김광림 선생님이 연출하셨고요.
장 : 그래! 내가 <파우스트>에는 네 번 출연했는데 네 번 다 파우스트를 했거든. <파우스트>를 한 지 40년이 되었으니까 10년에 한 번씩은 파우스트를 한 셈이지. <파우스트>를 우리나라에서 초연한 것이 이번에 개관하는 명동극장에서였는데, 이후에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도 하고 여러 번을 했다고.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파우스트>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할 때마다 초만원을 이루는 공연이었어. 그 덕에 내가 조금 유명세를 탔지.
오 : 저희 때도 관객들이 많았어요. 선생님은 오랫동안 배우로서 공인의 생활을 해오셨잖아요. 사람들이 알아봐서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장 : 내가 술을 좋아하니까 마음 놓고 술도 마시고 싶고 자유롭고 싶은데 그걸 잘 못하지. 한 번은 모르는 사람이 테이블로 와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기도 하고, 젊었을 때에는 연애도 마음 놓고 하고 싶은데 사람들 시선 때문에 잘 안 되잖아. 
오 : 맞아요. 선생님.

 

노배우와 젊은 배우는 할아버지와 손자처럼, 아버지와 아들처럼 또는 선배와 후배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 오만석이 물으면 장민호 선생이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지혜로움으로 대답을 해주셨다. 선생은 인터뷰 내내 물을 드시지 않았다. 인터뷰 역시도 선생에게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하나의 공연인 것이다. 그리고 연습시간 10분 전에 인터뷰를 마치고 연습장으로 향하셨다. 장민호 선생은 오만석에게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백 마디 말보다 몸소 실천하시는 선생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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