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뮤지컬 인사이드] <넥스트 투 노멀> 행복한 가족의 이데올로기가 빚은 비극 [No.116]

글 |박병성 사진제공 |뮤지컬해븐 2013-06-02 5,287

붕괴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담은 <넥스트 투 노멀>은 진지한 내용과 고민들로 뮤지컬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특별한 아픔을 겪은 한 가족이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와해되고 만다. 판타지적인 요소와 극적인 반전으로 스토리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초연 때 한국 연출을 맡은 변정주 연출이 이번에는 단독 연출로 참여했다. 변정주 연출이 들려준 작품의 이야기는 필자가 생각한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작품을 창작자와 수용자가 다르게 받아들이지만 느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품은 결국 개별 주체와 작품의 만남을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던 자리였다.

 

* 이 기사는 스포일러성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재공연이다. 그래서 달라진 점이 있는가?
부분적으로 충분히 풀지 못했던 장면들이 보완됐다. 이를 테면 전기 요법으로 기억을 잃은 다이애나에게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초연 때는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반응했다면, 이번에는 아버지는 좋은 기억만 심어주려 하고, 나탈리는 좋든, 나쁘든 사실을 전달해주려 한다는 큰 라인을 잡았더니 더 자연스럽게 되더라.

 

 

기억을 되살리려면 나탈리처럼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댄은 과거를 좋은 기억으로 왜곡해서 전달하려고 한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느껴졌다.
작은 꽃다발을 건네준 것을 꽃들이 둘러싸인 곳에서 결혼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왜곡이라기보다는 과장이다. 좋은 기억으로만 다시 리셋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가족을 버리라는 이야기인데, 기획팀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뮤지컬’이라고 홍보한다. 임신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예쁜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다이애나는 병을 얻는다. 그리고 가족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자유를 찾는다. 그래서 가족이 보기에 적당하지 않은 뮤지컬이지만 그래서 봤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엄마에게, 아빠에게 딸에게 서로를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지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가족이 봐야 하는 뮤지컬이 맞다.

 

가족 구성원이 가족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관계는 나빠진다. 특별한 상처를 지닌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게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문제가 없는 가족은 없다. 오히려 힘든 과정 없이 평탄하고 화목한 가족이 일반적이지 않다. 그것은 TV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회가 주입한 가족의 모습이다. ‘평범하다’는 것이 중요한 작품의 키워드다. 다들 자신만 평범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데 겉모습만 보니까 다른 이들이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드라마를 강화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가 정신병까지 앓고, 담배 피고 술 마시는 청소년이 약까지 하는 식으로 과장된 것이다. 사실 모든 가족들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게이브와 댄 또는 나탈리를 대비할 때 이 작품의 갈등 관계가 선명하다.
게이브를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다이애나의 망상 속 인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세계에 실존하는 인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우리는 게이브가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라고 본다. 한 맺혀 떠나지 못한 아들과 소통하는 엄마의 이야기인 것이다. 미국 작품이지만 세계관 자체는 동양적이다. 다른 작품 때문에 만난 무속인이 작품을 봤는데, 그분 말씀이 ‘병원에 갈 것이 아니라, 굿을 해야지, 굿을 하면 싹 낳을 병인데’라고 하시더라. 게이브를 다이애나의 죄의식이 만든 망상이라고 보기에는 게이브가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죽은 아들에 대한 다이애나의 강한 애착이 살아남으려는 의지로 발현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전기 충격으로 기억이 사라졌을 때 게이브는 이 연극에 나올 수가 없다. ‘Aftershocks’라는 곡에서 게이브는 ‘왜 나를 못 보냐고, 봐달라고’ 강하게 어필한다. 만약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무의식이라는 공간이 있지 않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극에 계속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무의식이 스스로 의지를 갖고 의식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게이브가 자신의 의지로 이 세계에 들어오려고 할 때 드라마가 선명해진다.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비논리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설정을 인정하는 것이 더 논리적인 드라마로 만든다. 게이브가 다이애나의 망상이라면 다이애나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게이브를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겠나. 연출은 배우들을 설득해야 하는 자리다.

 

 

오르골을 통해 게이브의 존재를 느끼게 된 후, 다이애나는 댄이 아닌 나탈리에게 도움을 청하러간다. 다이애나와 나탈리가 애증의 관계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충돌하고 있었다.
게이브의 존재를 느끼는 장면에서 댄은 한 소년의 약속에 대한 노래(‘A Promise’)를 부른다. ‘소년의 약속을 지킬 거야’라고 노래하는데, 그 노래가 끝났을 때 다이애나는 다시 게이브를 본다. 그녀는 더 이상 댄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 댄은 행복한 가족,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다. 한 남자의 영원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그 약속은 20년째 듣고 있는 약속이다. 때문에 이들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됐다. 더 이상 댄을 의지할 수 없었다.

 

그럼 댄이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원치 않은 임신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은 사회의 룰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이애나가 떠난다고 했을 때 댄은 ‘가지 말라고’ 말은 하지만 그녀를 잡지 못한다. 사랑이 아닌 의무감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놔주니까 그제서야 게이브를 보게 된다.

 

댄도 그전부터 게이브를 봤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써 무시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렇지 않다. 보였다면 댄도 병원에 갔어야지. 다이애나가 게이브를 본다고 하니까 병원에 보내지 않나. 자신도 보이면서 그럴 수는 없다. ‘빛’이라는 노래에서 아들을 보고, 매든 박사를 만났을 때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은 관객이 맘대로 생각해도 된다. 그러나 연기하는 배우들은 분명해야 한다. 그전까지 어떤 접촉도 없었는데 이전부터 봤다면 말이 안 되는 장면들이 너무 많다.

 

앞에 등장한 게이브는 다이애나의 망상이 만들어낸 게이브고, 나중에 댄이 본 것은 댄의 상처가 만들어낸 게이브라고 한다면 앞의 장면들이 이해되지 않나?
그렇다면 게이브를 어떻게 연기할 수 있을까. 다이애나의 게이브를 연기하다 댄의 게이브를 연기한다, 일관성이 없다. 관객들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연출은 일차적으로 관객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작품 안의 논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다이애나와 나탈리가 긴밀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젊은 시절 댄이 다이애나에게 약속을 하는 장면에서 헨리와 나탈리가 같은 의상을 입고 약속을 한다. 나탈리와 헨리도 잘못된 삶으로 빠진다는 암시인가?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게 인생이다. 다이애나와 댄은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이 뮤지컬의 핵심은 사랑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떠났고,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희망이 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관념을 놓는 순간 이들은 다시 사랑을 회복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빛’이라는 노래에서 다이애나는 ‘살아있어야 행복해’라고 한다. 1차 가사 작업에서는 음절  수를 맞추기 위해 ‘살아있는 게 행복’이라고 했는데, 말이 안 된다. 살아있어서 불행한 사람들도 많다. ‘살아있어야 행복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다. 한국말에 맞추기 위해 음표를 쪼개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가사의 글자 수 때문에 주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빛’을 당기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빛인 거다.

 

가사 번역 작업이 어려웠을 것 같다. 특히 ‘next to normal’의 번역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normal’을 ‘정상’으로 하느냐, ‘평범’으로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의사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이 노멀(normal)입니다.’고 할 땐 ‘정상’이라고 하면 되지만 나탈리가 ‘노멀’은 바라지 않아 ‘노멀’ 근처만 있어도 좋겠어. 할 때는 달라진다. 정상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정상이 뭔가. 삶에서 정상, 비정상을 판단할 수 있나. 누구의 삶을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나. 게다가 ‘정상’이라고 하면 ‘peak(꼭대기)’로 들릴 수도 있다. ‘normal’이란 말이 자주 나오니까 한국말로도 한 단어로 반복되는 것이 좋긴 한데, 이것만은 안 되겠더라.

 

무대나 조명이 강렬하다. 이를 설명해준다면?
오리지널 무대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을 연출할 때면 바로셀로나 같은 명문 구단에 주장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그들이 백 년 동안 이루어놓은 스타일을 주장이라고 바꿀 수는 없지 않나. 무대가 굉장히 현대적이고 연극적이다. 특별한 무대 테크닉이 없이 원 세트에서 몇 개의 판넬만 움직이기 때문에 드라마에 더 집중할 수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