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건 프로덕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닥터 지바고>라는 콘텐츠 자체가 갖는 특성 때문이니까. 노벨상 수상작이라는 후광에 걸맞게 <닥터 지바고>는 휘리릭 읽기에 녹록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의 밑바닥에 무게 있게 깔린 주제와 의미를 곱씹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자. 우선 눈에 드러나는 면으로만 살펴봐도,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등 역사적인 큰 사건의 흐름이 <닥터 지바고>의 시공간이다. 이상과 광기가 뒤섞인 잔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가 줄 수 있는 ‘재미’는 한숨과 무거움을 동반한다. <닥터 지바고>의 인물들은 전쟁의 부조리와 이념의 당파성 위에 서있다. 사회가 집단의 가치로 움직일 때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이 발 디딜 곳이란 그 어디에도 없는 법. 격변기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애당초 버거운 일이다.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한 사람의 삶이란 곧 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축약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닥터 지바고>의 주된 줄기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들을 잇는 열정의 끈에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으면서도 또한 무엇조차 버릴 수 없는, 경계선에 선 사람들의 절박함이 배어있다. 그들의 사랑은 이념의 논리와 체제의 윤리를 넘어서는 자유의 본능,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랑은 완성이 목표일 수 없다. 오히려 사랑하고 있음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살아있는 생명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인 것이다.
자, 이런 방대한 서사와 세밀한 서정을 어떻게 연결 짓고 또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택한 방법은 명확해 보인다. 이 작품은 역사적 서사에 집중하기보다는 주인공 지바고를 중심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그의 내면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접근은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의 미덕과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충분히 현명한 선택이다. 지바고를 정서적 몰입의 구심점으로 삼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은 분명하다. 극적 배경이 되는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설명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큼 디테일하게 제시되기는 어려운 바, 역사적 서사의 성근 이음새를 메울 수 있는 접착제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가장 잘 해낸 것은 음악이다. 우아하면서도 서정적인 이 작품의 음악은 작품의 질감과 분위기를 대변한다. 음악적 구성의 대부분은 격랑과 같은 시대의 혼돈보다는 섬세함과 열정이 공존하는 지바고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서의 결을 담아내기에 많은 공을 들인 음악임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으니, 특히나 지바고 역할을 맡은 홍광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자면 귀만 아니라 마음까지 뻥 뚫리는 것 같다. 이 작품이 택한 방향과 전략은 어느 정도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음악이 작품의 서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면, 작품의 서사적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역할은 무대공간이 맡았다. 다양한 장소의 이동과 시공간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비워놓은 무대는 바닥에 경사를 둠으로써 공간의 깊이를 더했는데, 이야기 자체가 스펙터클을 품고 있는 이 작품을 위한 설정으로는 기능적으로 적절한 컨셉이었다. 다만 큐빅 패턴의 고정된 바닥 문양이 저택과 벌판을 오가는 수많은 장면 이동의 공간적 약속을 명확하게 구분시키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였지만, 무대 공간의 활용은 이 방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무리수가 없었다. 김지우, 강필석, 서영주 등 배우들도 종종 모자라거나 넘치는 경우가 보이긴 했어도 극적 인물의 이미지를 무난히 소화해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뮤지컬 <닥터 지바고>는 공들인 티가 역력한 성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구색이 다 갖춰졌는데도 묵직한 감동이나 공감이라는 재미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지루하게 늘어지는 작품의 호흡은 단지 긴 원작의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늘어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에서 오로지 주인공은 지바고 하나뿐이다. 지바고가 겪는 사건과 지바고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지바고의 정서와 내면의 흐름으로 작품은 이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 작품이 놓쳐버린 것이 있다. 정작 지바고라는 한 개인의 갈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닥터 지바고>라는 작품 안에서 갈등의 주체는 개인과 역사, 그리고 개인과 사회이다. 지바고로 하여금 정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갈등의 상대는 바로 그가 살았던 시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바고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부각되려면 역설적이게도 시대와 사회라는 집단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지바고라는 개인의 내면과 갈등이 살아나면서 그의 절박한 사랑도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굵직한 극적 사건들, 예를 들어 1차대전이라든지 러시아 혁명 등은 그저 한두 마디의 대사로 ‘설명’해 버린다. 누군가 ‘전쟁이 터졌어!’라고 말하면 그냥 전쟁이 벌어진 거다.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위한 무대의 시각화는 성공적이었지만 정작 그 무대를 채우는 시각적 스펙터클은 빈약해져버린 것 또한 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스펙터클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지바고를 둘러싼 정황을 설명해주는 적극적인 갈등의 주체가 되어야 했음에도 그 역할을 도맡진 못했던 거다. 그나마 등장한 전쟁터의 병사들은 오합지졸 같아 보이고, 지바고의 집을 점령한 공산당이나 빨치산들은 어쩐지 80년대 반공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사람들같이 전형적이다. 그 무대 형상화의 상상력이 진부하고 지루하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 지바고의 극적 역할도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다. 극적 사건이 없으니 그저 사건을 지켜보듯 무대 주위를 서성거릴 뿐이다. 이런 설정은 애초에 없던 극적 긴장감을 더 없어 보이게 만든다. 촌각을 다투며 퇴각하는 전쟁터에서 라라와 연심을 나누는 지바고의 태평함이란. 공산당의 감시를 피해서 온가족과 목숨을 건 탈출을 할 때도 가족 피크닉 가는 것처럼 여유롭기가 그지없다. 사건의 정황과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기란 쉽지 않은 일. 홍광호의 절창에도 불구하고 지바고에게 빠져들기란 영 어려워 보인다. 갈등도 없으니 극적이지도 않고 주인공은 혼자 사색하느라 바쁘니 극적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사적 설명자도 아닌 지바고의 내적 갈등과 절박한 사랑은 관객들에게 그저 남의 일일 수밖에.
세 시간 남짓한 공연 시간이 무색하도록 이 작품의 전개는 지바고의 설명적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아름다운 노래는 사건의 진전보다는 내면의 고백에 집중하고, 대부분의 장면은 한두 명의 캐릭터에 의해 채워지고 있을 뿐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관계를 엮게 되는지 설득력 있는 전개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지바고와 라라가 왜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는지는 각자의 노래를 들어야지만 어렴풋이 짐작 가능하고, 라라의 과거를 알고 복수하기 위해 무대를 박차고 뛰어나갔던 파샤는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빨치산 두목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며, 뜬금없이 불쑥불쑥 아무 데서나 나타나는 코마로브스키는 신출귀몰하기가 거의 홍길동이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긴 시간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인물들은 순서에 따라 등장할 뿐이고 사건은 이어진다기보다는 나열될 뿐이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는 서정에 진지하게 몰입하느라 박진감 넘치는 서사의 맥락을 놓쳐버렸다.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이 엇박자를 잘 조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작품은 훨씬 멋있어질 거다. 자꾸 몇몇 배우에게 이 작품의 운명을 떠넘기려고 하지 말고 그 노력으로 작품의 속살을 더 정성껏 매만졌으면 좋겠다. 재미없다고 툭 내뱉기엔 여러모로 이 작품이 아깝지 않나.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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