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누구보다 강한 자의식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열여섯 소년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질을 발견하고 끄집어내준 스승에 의해 배우가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머리를 올려준 스승에게 평생을 갚아도 모자라다는 이율과, 아직 발현되지 않은 제자의 가능성이 여전히 궁금하다는 김달중 연출. 두 사람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연기할 놈이라는 걸 알았다
김달중 우리 둘이 너무 친한 척하면 재웅이가 삐칠 텐데.
기 자 <대풍수> 촬영 스케줄이 겹쳐서 아쉽게 합류하지 못했어요. 상황 봐서 전화 통화라도 시도할까요?
김달중 아유, 됐어요. 지가 바빠서 못 온 건데 뭘.(웃음)
기 자 이율 씨를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세요?
김달중 율이가 중3 때였을 거예요. 10월 계원예고 입시 면접장에서 처음 만났죠. 당시 제가 교내 프로덕션의 70퍼센트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공연을 잘하려면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예고에는 남학생들이 귀했거든요. 그래서 남자애들을 좀 더 유심히 지켜봤어요. 율이는 당시에도 지금과 비슷하게 틀이 좋았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배우가 외모도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뽑았는데 영화를 하겠다는 거예요. 자존심 때문에 차마 연극하라고 말은 못하고 그냥 보내줬는데 결국 한 학기 지나 돌아오더라고요.
이 율 그때 선생님이 ‘쟤는 연기할 애야’ 하셨어요. 전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 배우를 꿈꿔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냥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왜 계원예고를 가게 됐는지, 전공을 왜 바꾸게 됐는지 정확하게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영화과 친구들이 저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 사실 면접에서 처음 뵈었을 땐 선생님이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지금 제 나이와 비슷한 때였거든요. ‘저 형은 누구지?’ 하면서 좀 만만하게 봤던 것 같기도 해요. 대답도 잘 안 하고 그냥 툭툭 던졌거든요. 나중에 알고 나서는 ‘떨어졌구나’ 했죠.
김달중 외모만 가지고 뽑았던 건 아니었어요. 이런 친구들이 어떤 유형으로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데이터를 나름 갖고 있었거든요. 다 맞는 건 아니고 대략 70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뽑은 거죠. 이런 얘기하면 올드해 보이겠지만, 배우는 어느 정도 헝그리 정신이 있는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율이한테는 그게 보였어요. 또래 사춘기 녀석들에 비해 자의식이 굉장히 강했고, 쓸데없는 자존심도 있었고요. 그게 한풀 꺾여야 빨리 배우로 설 수 있을 텐데 그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예고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굉장히 큰 곳이거든요. 그나마 연극과는 덜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이 율 음, 오디션 프로그램 나와서 어려운 가정사 얘기하면서 동정표 얻는 친구들도 있잖아요. 전략이긴 하겠지만, 전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정말 힘들게 살았거든요. 학교도 간신히 다닐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 시기를 보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형편이 달라지진 않았어요.
김달중 세상과 싸워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녀석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참 힘든 일이거든요. ‘저걸 언제 잡아서 배우를 시키나’ 계속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쓰릴 미>를 만나게 된 거예요.
이 율 마땅히 할 일이 없었어요, 그때는. 한 푼이 아쉬울 때였으니까. 연기보다는 생활이 먼저였고, 그래서 이곳저곳으로 돈 벌러 다니며 방황 아닌 방황을 해야 했죠. 그러다 선생님한테 전화 한 통을 받은 거예요. 딱 한마디 하셨어요. ‘너 배우 안 할 거야?’ 순간, 머리에 번개를 맞은 것 같았어요. 몇 푼이나 번다고 내가, 평생 할 일을 접고 이렇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에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지더라고요.
김달중 잠깐의 포즈 뒤에 ‘해야죠’ 하더라고요. 오래 알아온 사이다 보니 그 포즈가 무슨 의미인지, 뒤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할 거면 연락해’ 하고 그냥 끊었어요. 그때 네가 이천 공장 물류 센터에서 일하고 있었지?
이 율 네. 새벽 임금이 더 세다고 해서 저녁 7시부터 아침 6시까지 냉동 창고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선생님하고 몇 번이나 전화가 엇갈렸잖아요. 선생님은 제 머리를 올려주신 분이세요. 공연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죠. 학교 때도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했어요. 선생님과 조승룡 선생님이 제게 보여주신 관심이 남달랐거든요. 친구들한테 미안하기보다는 신은 참 공평하구나 싶었어요. ‘너희들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잖아. 대신 나는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을게’ 하는 거죠. 학교에 가면 기분이 참 좋았어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걸 처음 느껴봤거든요. 제가 뭘 잘하는지도 알게 해주셨고요.
스승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김달중 그때 율이가 정말 잘나갔어요. 영화제를 하면 50% 이상이 율이가 주인공일 정도로.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은 거야 당연한 거고.
이 율 아쉽게도 제가 너무 어두웠죠. 인기에는 관심도 없었고 신경도 안 썼어요. 그냥 단절된 섬 같은 느낌으로 학교를 다녔던 것 같아요. 연기를 너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연기를 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어떤 큰 고민도 다 잊을 수가 있었어요. 그게 좋아서 계속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기 자 만약 조승우, 최재웅, 김다현, 조정은 등의 배우들과 함께 고교 시절을 보냈다면 어땠을까요?
김달중 율이가 지금보다 더 빨리 자리를 잡았을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은 각자가 잘하는 것도 있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얻는 시너지가 있었거든요. 재웅이는 승우를 부러워했고, 승우는 재웅이를 부러워했어요. 다현이나 정은이도 마찬가지였고요. 재능과 매력이 각기 다른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얻게 된 좋은 결과들이 있었어요. 먼저 활동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는 것도 굉장한 힘이 되거든요.
기 자 지저스로 출연했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도 김달중 연출님과 함께 작업한 건가요?
김달중 참여를 안 한 건 아니지만 그 작품은 조승룡 형이 주도한 작업이었어요. 우리가 둘 다 사회성이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메이저는 싫어하고 좋은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 그러다 계원예고를 장악하게 된 거예요. 말 잘 듣는 학생들을 데리고 실험 아닌 실험을 참 많이 했는데, 형이 <지저스>를 하고 싶다고, 율이한테 지저스를 시켜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율이가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어느 선을 못 넘고 있었어요. 좀 더 자기를 버려주면 좋겠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것을 꺼내거나 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죠. 우리도 못 그러고 사는데 어린 녀석이 그러니 얼마나 미웠겠어요.(웃음) 확인은 안 해봤지만, 아이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큰 도전을 시켜서 그들의 자의식을 다 부수고 싶었을 거예요. 근데, 율이가 정말 잘했어요. 계원예고 선생님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저나 승룡이 형도 70%는 놀랐던 것 같아요. 나머지 30%는 배신감이었던 것 같고.
기 자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 애를 태웠나 하면서요?
김달중 그러면서도 그게 녀석의 매력인데 어쩌겠어 했죠 뭐. 분명 재미를 느꼈을 것 같아요.
이 율 확실히요. 덕분에 그 전까지 ‘어유, 저 어두운, 불량한’ 하시던 선생님들의 대우도 달라졌어요. 그땐 참 후련하게 했는데, 지금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연습할 때 선생님께서 스티브 발사모가 부른 <지저스> 음반을 들려주신 적이 있는데 ‘아, 정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쓰릴 미>도 그랬어요.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며 대본을 읽었는데 마이너 중에 마이너더라고요. 한국에서 동성애가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무조건 선생님만 믿었어요.
김달중 연습실에만 오면 애가 사색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공연 4일 남겨두고 머리를 빡빡 밀고 왔겠어요. 계약 위반인 거지. 진짜 아주 난리가 났어요. (류)정한이는 너무 어이없어서 웃고 재웅이는 할 말을 잃고. 고맙게도 배우들이 율이의 돌발 행동을 다 이해해줬어요. 누구에게나 죽고 싶도록 창피하고 잊어버리고 싶은 데뷔작이 있잖아요. 그래도 쓴소리는 좀 들었을 거예요.
이 율 ‘지금 저는 힘듭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새로 시작하는 기분을 갖고도 싶었어요. <지저스> 때도 공연 전날 머리를 빡빡 밀고 학교에 갔어요. 그때도 선생님은 황당해하셨지만 ‘시대를 초월한 예수가 나올 수도 있지’ 하며 이해해주셨어요. <쓰릴 미>는 죽을 때까지 가장 힘든 작품일 거예요. 악몽은 또 얼마나 많이 꿨다고요. 공연 첫날 새 대본이라며 전화번호부만 한 영어 대본을 받지를 않나, 공연장 바뀌었다며 대극장에서 혼자 연기하기도 하고, 캐릭터가 서로 바뀌었는데 이미 재웅이 형은 대사 다 외웠다고 하지를 않나.
김달중 그래도 별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그거 못 이겨내면 배우로 살아가기 힘드니까.
이 율 늘 그렇지만 선생님은 <쓰릴 미> 때도 특별히 노트를 주지 않으셨어요. 공연 끝날 때까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죠. 덕분에 제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선생님은 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으시거든요. 각각의 다양한 과정들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제가 답을 찾도록 기다려주시고, 답을 찾지 못하면 또 다른 길을 알려주세요. ‘배우는 작품을 가리면 안 된다’, ‘너무 쉬면 안 된다’ 하시면서요.
김달중 옳든 그르든 판단은 본인의 몫이니까요.
기 자 무엇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 같아요.
이 율 죽을 때까지 갚으면서 살아야죠.
함께할 때 더 빛난다
기 자 같이 작품을 하지 않을 때도 종종 찾아뵙나요?
김달중 명절 때나 무슨 날이 되면 사무실에 이상한 거 사가지고 많이 와요. 그만 좀 하라고 하는데 같이하자고 한 5년을 채울 모양이에요. 내가 쟤 형편을 뻔히 다 아는데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아직은 내가 더 잘 버는데. 비싼 선물이면 좋아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형편도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하잖아요. 가지고 오는 선물들을 보면 그 과정들이 보이니까 마음이 불편해요.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면 좋겠는데.
기 자 지난 5년간 배우 이율은 잘 걸어온 것 같으세요?
김달중 제 선생님이 저를 보시면 얼마나 한심하시겠어요. 이걸로 답을 대신할게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그런 것 같아요. 잘하는 것보다 잘 못하고 있는 게 먼저 보이는. 그래서 저도 선생님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거고요. 개인적으로 율이나, 재웅이, 정은이, 다현이 다 불편해요. 난 제자라고 생각 안 하고 작업하는데 밖에서는 다들 그렇게 먼저 보시니까.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는 곱절로 더 마음이 불편해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트레이스 유>도 재웅이와 율이랑 같이하게 됐는데, 내가 먼저 손 내밀지 않았다는 거 이 자리를 빌려 밝히고 싶어요. 둘 다 자기 발로 왔다고.
이 율 어떤 작품이든 의뢰가 들어오면 선생님께 항상 상의 드리거든요. 이번 공연도 제작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전화를 드렸어요. 역시나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라고 하셨지만, 선생님 작품은 왠지 어명 같아서 하게 돼요.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선생님과 하는 작업이 제일 재밌고 스트레스가 적어요. 제가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라.
김달중 네가 아직 덜 성숙해서 그래. 율이나 재웅이한테 아직 대본을 안 보여줬어요. 독특한 작품이라 내러티브만 보면 무리수가 느껴질 것 같아서. 홍대 록 클럽을 배경으로 록커가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품이에요. 어느 한곳에 너무 매진하다가 약간의 똘기를 갖게 된 인물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하게 되는 내용이에요. 걱정은 음악적으로나 드라마적으로 분명히 다른 작품이지만, 우리 셋이 함께하는 2인극이라 <쓰릴 미> 얘기가 나올 거라는 거예요.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이미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요.
이 율 전 오히려 셋이 함께해서 좋았어요. 무엇보다 형과 같은 역할로 무대에 서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고요.
김달중 록커에 음악이 거칠어서 배우들이 많이 힘들 거예요. 게다가 템포 조절 안 되고 도망갈 데도 없는 2인극이거든요. 다른 것보다 율이가 건강 관리 좀 잘하면 좋겠어요. <풍월주> 하는 동안 아파서 공연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속이 많이 상했거든요. 배우한테 가장 소중한 게 자기 몸인데 그걸 못 지켰다니 얼마나 화가 나요. 20회 공연이지만 두 팀으로 나눈 건 그 때문이에요. 정서적으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배우들의 매력이 잘 보이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욕심이 있다면 <쓰릴 미>나 <헤드윅>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이 오래 가는 거예요. 초연 배우들도 함께. 그동안 율이가 잘 해왔지만, 앙코르 공연을 잘 안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배우한테는 신작도, 재공연도 다 필요해요. 신작은 그 시즌에 작품이 완성됐다고 할 수 없잖아요. 전 시즌에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다듬어서 다시 무대에 오르는 건 배우에게 좋은 도전이에요. 근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율이가 했던 작품들 중에 앙코르 공연한 게 별로 없기도 해요. <트레이스 유>는 이번 공연 마치고 내년 2월 즈음에 바로 앙코르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율이한테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신작에 목말라하는 재웅이한테도 좋은 시간이 되면 좋겠어요.
(*이 글은 뮤지컬 의 최종 배역이 결정되기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내용입니다. 본 공연에서는 최재웅, 이창용 배우가 본하 역할로, 이율, 윤소호 배우가 우빈 역할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9호 2012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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