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멜로드라마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가 뮤지컬로 장르 이동할 때 그 정체성이 역사물이 아니라 멜로물이 되어야 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원작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뮤지컬이란 장르 자체가 곧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시라. 소위 컨셉 뮤지컬이라 불리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사랑 이야기가 빠지는 뮤지컬은 거의 없다. 색깔과 농도는 다르다손 치더라도 사랑은 뮤지컬의 필수 요소이니 멜로는 뮤지컬의 메타 장르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어떤 주제의 어떤 이야기든지 결국 다다르게 되는 뮤지컬의 시작이자 결론은, 사랑이다. 그러니까 <두 도시 이야기>를 ‘이야기’할 때 찰스 디킨스의 원작으로부터 자유로워져도 괜찮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셈.
이런 면에서 본다면 <두 도시 이야기>가 다루는 사랑은 감각적이기보다는 헌신이라는 점에서 감동의 코드에 가깝다. <두 도시 이야기>에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담겨 있다. 그 사랑의 시작은 이 작품의 여주인공 격인 루시 마네뜨로부터 비롯된다. 루시의 사랑은 그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오랜 시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느라 폐인이 된 아버지에게는 다시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 딸의 사랑으로,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린 채 고향을 떠난 프랑스 청년에게는 사랑의 활기를 일깨우는 여인의 사랑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술에 절어 세월을 낭비해버리는 남자에게는 ‘더 나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끔 만드는 아름다운 발견으로.
루시의 사랑은 그 사랑의 수혜자들에게서 열매를 맺는다. 루시의 아버지 마네뜨 박사는 원수의 핏줄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를 변호하고 책임지는 사랑을 실천하고, 루시의 남편인 다네이는 죽을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사지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는 결단력을 보여준다. 정점을 찍는 것은 시드니 칼튼이다. 그는 루시를 사랑하지만 루시가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헌신적인 사랑이다. <두 도시 이야기>의 사랑은 전적으로 이타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 위대한 이타성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음을 이 작품은 루시를 통해, 그리고 칼튼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아주 진한 멜로드라마이다. 굳이 디킨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가 품고 있는 사랑의 질감이 실로 두텁다. 이런 멜로드라마의 주제가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다면!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이 따로 없을 거다. 브로드웨이에서 <두 도시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의 사랑은 ‘혁명적’이지만…
멜로드라마의 생명은 사랑의 진정성이 관객에게 충분히 납득이 될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과연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로 탄생했을까? 비현실적이도록 헌신적인 사랑의 풍경을 그럼직한 삶의 가능성으로 번역해 전달하는 일차적인 메신저는 다름 아닌 배우일 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두 도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입체적인 인물, 즉 극이 진행되면서 변화하는 유일한 인물은 시드니 칼튼이다. 삶을 포기한 술주정뱅이에서 숭고한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는 칼튼의 사랑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류정한의 공이 크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그의 캐릭터는, 물론 주어진 배역 때문이었겠지만, 힘이 잔뜩 들어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두 도시 이야기>에서 류정한은 확연히 다르다. 힘을 뺀 채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마음먹는 칼튼의 변화를 표현하는 인물 묘사는 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단두대 앞에 선 사랑의 의연함 속에서 비장함이라는 과장을 걷어내고 편안한 안식을 연상케 하는데, 그의 마지막 몇몇 장면에는 사뭇 감동이 있다. 류정한이 보여주는 연기의 폭이 노래라는 범주에서 더 넓은 지평으로 확장된 느낌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연배우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전적으로 성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애써 머리는 끄덕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진심으로 공감하기엔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루시와 찰스 등 칼튼을 제외한 멜로의 주인공들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칼튼과 비교해볼 때 지나치게 평면적이어서 루시는 그저 아무한테나 친절한 여자에 지나지 않고 찰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인물들이 아무리 얽히고설켜 봤자 밋밋한 맛은 그대로일 터. 세 사람의 인연이 짜이는 전막이 한없이 지루했던 건 이 때문이다. 뮤지컬 작품 안에서 극적인 이유를 만들기보다 원작 안에서 제시된 갈등의 축을 늘어놓느라 바쁜 모양새였으니 아무래도 생동감 있는 인물의 원형을 보려면 소설을 읽어야 할 판이다. 이런 맹점은 비단 주인공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인공들과 어우러지면서 동시대의 갈등을 상징하는 드파르지 부부 같은 민중 캐릭터도 전형적이라는 면에서 꽤나 진부하다. 그냥, 얘네들은 사랑의 화신이고 쟤네들은 복수의 화신이다. 그렇게 보자니 이 작품은 많은 면에서 익숙하다. <몬테크리스토>와 <조로>와 기타 등등 비슷한 작품들을 다 모아 섞으면 이런 버전 하나 나올 만하다.
콘텍스트가 되지 못한 혁명
<두 도시 이야기>가 역동적이지 않은 이유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찰스 디킨스의 원작을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지배하는 커다란 사건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민중들의 봉기,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하지만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비전임과 동시에 복수와 유혈의 난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욕망이 복수를 앞서야 할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이로 하여금 온전히 사랑하게 하는 힘.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상상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진짜 혁명이 아닐까. 디킨스가 그려내는 사랑의 위대함은 혁명의 살풍경과 겹쳐질 때 비로소 그 명암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도시 이야기>에서 혁명이라는 사건은 그 어떤 인물보다 현실감 있게 그려져야 할 터. 인물들의 입체적인 설득력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서 혁명의 풍경은 무척이나 피상적이다. 극의 시간적 배경은 십여 년을 넘게 지나가지만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이 나오기는커녕 등장인물들은 늙지도 않는다. 옷도 바뀌지 않는 것 같던데. 사랑을 선택하든 복수를 선택하든 인물들의 동기는 기계적일 뿐, 혁명의 와중에 빚어지는 인물과 사건의 리얼리티는 이 작품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물론 이런 점은 브로드웨이 원작의 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관습적인 연출은 작품의 무미건조함을 더욱 강조한다. 일례로 단두대에 올라가는 사형수들이 마치 면접 번호표 받은 대기자처럼 자기 발로 가볍게 계단을 올라가니 이건 뭔가 싶다. 극 중에서 민중 봉기의 시작이 되는 마차 사고 같은 장면도 그렇다. 어쩜 그렇게 인위적인지. 장면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그림이 있으면 그 안을 채우는 디테일은 연출이 채워야 할 몫이 아닐까. 이렇듯 관습적이고 전형적이며 기계적인 장면 연출 위에서 귀족과 민중의 대비, 억압받는 민중이 곧 혁명의 선은 될 수 없다는 이분법의 붕괴, 다수의 광기를 마주하는 상식의 무력함,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완전한 헌신의 실현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는 그 빛을 잃고 만다.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혁명의 경험을 겪는 공간인 ‘두 도시’ 런던과 파리는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될 판이다. 빨간 조명, 파란 조명으로 두 공간을 나누는 것도 진부할 뿐이고, 철골 구조로 전환되는 무대장치도 빈약해 보일 뿐이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는 여전히 위대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가 실현되려면 이 이야기는 먼저 현실감 있는 혁명의 드라마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칼튼의 사랑이 완성된 곳은 다른 곳이 아닌, 단두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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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9호 2012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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