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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라카지> 드래그퀸 스타를 엄마로 둔 아들의 괴로움 [No.107]

글 |이동섭 (『뮤지컬 2.0』 저자) 사진제공 |악어컴퍼니 2012-08-13 4,585

올여름 뮤지컬 중 가장 기대작은 단연 <라카지>이다. <라카지>가 동성연애자들의 사랑과 비애를 다룬 최초의 뮤지컬은 분명 아니지만, 강남의 대형 공연장에서 올려지는 경우는 없었다. <헤드윅>이 언더의 이야기를 언더에서 했다면, <라카지>는 언더의 이야기를 오버에서 한다. 여기에는 사소한 듯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숨겨져 있다. <거미여인의 키스>처럼 아무리 잘 만들더라도, 한국에서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겨우 다뤄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게이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라카지>는 대형 극장에서 상연될 수 있었을까?

 

 

 

호모와 고양이, 두려워서 비윤리적인 것들

베를린, 파리,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게이 프라이드(Gay Pride)라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린다. 유명 DJ들이 집결하고, 동성애자 이성애자 구별 없이 모두 모여서 한바탕 광란의 디오니시스 축제에 빠져든다. 파리에서 그 축제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퍼레이드에서 내세운 캐치프레이즈가 ‘평등’, ‘모두에게 결혼을’, ‘호모 커플도 부모가 될 수 있다’ 등이었다. 프랑스는 대단히 자유로워 보이지만 가톨릭 문화가 강했던 탓에 생각보단 보수적이다. 그곳에선 여전히 동성 결혼이 인정되지 않는다. 호모 친구나 가족을 가진 프랑스 사람들에게 호모의 권리나 인권 문제는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친구, 내 가족의 일이었다. 어디서나 호모는 문란한 성생활, 더 나아가 에이즈를 퍼트리는 타락한 인간들로 간주된다. 특정 종교가 강한 나라일수록 그런 관점은 더욱 공고하여 심지어 동성애자들을 범죄자보다 더 나쁜 족속들로 취급한다. 그 핵심적인 이유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섹스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를 갖는 심리의 기저에는 게이는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성애자들은 이성과 동성을 다루는 태도를 교육과 경험을 통해 확실히 습득했으나, 동성애자의 정체와 그들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그걸 모르니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불편하여 거부한다. 단순한 논리이기에 더욱 의심 없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것은 고양이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와 비슷하다. 다른 짐승과 달리, 고양이는 사람과 짐승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모포비아나 캣포비아들은 그것들을 두려워서(나와 다르니 무서워)가 아니라 비윤리적(나와 다르게 음탕해)이서 싫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나약함을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것들을 차별한다. 차별은 분류를 향하고, 분류는 곧 분리와 같다. 분리의 최종 목적은 격리를 거쳐 처벌을 통한 소멸이다. 특히 섹스의 문제와 결부될 때 두려움을 비윤리로 만들어 처벌하려는 경향은 더욱 커진다.

 

 

 

새장 속에 갇힌 게이는 안전하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은교>에서 여고생 은교를 향한 노시인 이적요의 사랑은 중산층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작품은 보지도 않은 채 판단은 이미 끝났다. 그들의 도덕률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말인즉슨, 그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간 자기도 그걸 원한다는 본심이 들키기 십상이니 적당히 감춰야 한다. 그때 도덕과 전통을 내세워 자신의 불행하고 불운한 처지를 위무한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비난과 자신의 불행을 맞바꾼다. 그런 중산층에게 호모 섹슈얼리티는 관용을 드러내기 좋아서 긍정하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비난하기 적합하다. 어린 여자와의 로맨스는 중산층 남성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나, 끝내 이적요는 은교의 몸은 갖지 못한다. 소재는 소녀와 노인의 관계였으나, 주제는 섹스가 아닌 사랑과 욕망이었다. 결국 중산층 관객들이 이적요를 질투할 구실이 없었고, <은교>는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로 포장되면서 로맨스와 불륜의 구별을 절묘하게 비켜갔기에 백만 명 이상의 관객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라카지>도 <은교>처럼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에 머물렀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다. 저들의 이야기, 잠시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처럼 아늑하고 내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기에 편안히 즐길 수 있다. 풍경은 상처를 통해서만 인식된다던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라카지>는 관객을 웃기고 화려한 쇼를 보여주면서 내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에 기꺼이 즐길 수 있다. 웃음은 기본적으로 내가 그에 속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니 <라카지>의 무대와 관객석의 차이가 확실할수록 관객의 확장성이 커진다. 그래서 게이 부부와 극우 보수 정치인 부부의 상견례를 위험하지만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만들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유발되는 캐릭터들을 이용한 소동극에서 <라카지>의 웃음이 비롯된다면, 감동은 다른 지점에서 비어져 나온다. 거기에서 정성화의 힘은 사뭇 매력적이다.

 

 

 

정성화가 연기한 우리들의 엄마

정성화가 보여준 앨빈은 클럽 라 카지 오 폴(새장 속의 광인들)의 슈퍼스타이지만, 집에서는 조지의 아내이자, 생물학적 엄마보다 더 모성애가 들끓는 장미셀의 엄마이다. 그렇지만 게이이기 때문에 사돈에게는 엄마로 소개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다. 여기서 앨빈은 어떻게 엄마에게 제일 먼저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을 수 있냐며 분노하다가 무엇보다 아들의 행복이 중요하다며 결국 조지와 장미셀의 요구를 들어준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한데, 왜냐면 그는 게이 드래그퀸 슈퍼스타 자자이면서 남이 낳은 아들을 키우는 조지의 부인 앨빈이라는 특수한 처지를 벗어나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재는 다르지만 <라카지>를 <맘마미아>의 자매 작품으로 본다. 물론 두 작품의 공통분모는 엄마였고, 자식을 위한 엄마의 희생 스토리였기 때문에 강남의 대형 공연장에서 상연될 수 있었다. 즉 <라카지>는 나와 상관없는 게이 부부의 특수한 이야기인 줄 알고 왔는데 보다보니 우리를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않는 엄마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관객들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거의 전적으로 앨빈을 맡은 배우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정성화는 엄마 앨빈과 슈퍼스타 자자를 완벽하게 1인 2역으로 소화한다. 보통 1인 2역일 경우, 확연히 두 인물이 분리될수록 연기력을 인정받는다. 여기서는 캐릭터의 이동이 거의 티 나지 않아야 한다. 공간의 이동으로서만 배역이 달라짐을 인식할 수 있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앨빈과 자자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척하지는 않으나, 앨빈과 자자는 서로의 역할이 달랐고 드러낼 수 있는 공간도 달랐다. 그래서 극 후반부 레스토랑 ‘쉐 자클린’에서 사돈인 딩동 부부 앞에서 자자로 소개받은 앨빈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대단히 감동스럽다. 왜냐면, 그동안 하나인데도 사회적인 시선으로 인해 분리된 두 개의 인격체로 살아왔는데 비로소 그 둘이 하나임을 당당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정체를 반드시 숨겨야하는 사람들 앞이었으니 그 해방감은 한층 클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다시 한 번 <맘마미아>의 도나가 떠올랐다. 우리는 엄마도 예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임을 좀체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랬던 나는 <맘마미아>를 보고 많은 반성을 했다. 이처럼 <라카지>는 우리들 엄마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는데, 물론 정성화의 연기력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는 엄마로 불릴 수 있는 특질을 가진 존재들의 고마움을 불러일으켰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7호 2012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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