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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OPLE] <빨래>의 이정은 [No.69]

글 |배경희 사진 |박인철 2009-06-29 8,040

단 0.1그램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 그 날까지

 

<빨래>는 신파적 요소의 완성판이다. 받은 월급보다 밀린 월급이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 솔롱고,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고된 삶에 꿈을 잃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영, 사지절단의 장애인 딸을 홀로 키워온 할머니. 우리네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이들이 모여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니 어서 힘을 내라고 말한다. 그게 턱없는 희망의 노래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나고 힘이 난다. 그 팔 할은 욕쟁이 주인 할머니, 그러니까 이정은 덕분이다.


 

무대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한양레퍼토리에서 5~6년간 극단 생활을 했어요. 정식적인 첫 데뷔작은 돌아가신 박광정 선배님의 <저 별이 위험하다>에요. 선배님의 공연으로 이름을 조금 알렸고, 제게는 행운과 같은 작품이죠. 뮤지컬은 96년에 곰보할매 역으로 출연한 <지하철 1호선>이 첫 작품이에요. 김민기 선생님께 빨강바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 빨강바지는 예쁜 배우들이 해야 한다고 안 시켜주셨어요.(웃음) 그때는 나이가 어렸는데 뭘 알았겠어요. 그냥 대충한거죠.(웃음) 아마 이것도 몇 년이 지나고 보면 성에 안 찰 것 같아요. 연기라는 게 늘 그래요.

그 당시 <지하철 1호선>은 정말 붐이었고, 오디션이 굉장히 까다로웠던 걸로 알고 있어요. 일종의 낙하산이었어요.(웃음) 아버지가 아프셔서 극단 생활을 접고 연극을 그만두려고 하고 있을 때였는데, (설)경구 형이 병원으로 찾아와서 너도 같이 해보자고 해서 그길로 불려나가 개인 오디션을 봤죠. 선생님 쳐주시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 곡 불렀는데, 그 정도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옛날에는 제가 노래 잘했거든요. 이 정도 하면 먹어줬어요.(웃음) 요즘에는 뮤지컬이 굉장히 전문화됐고,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아져서 지금 한다고 했으면 아마 떨어졌을 거예요.

 

영화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던데요.
원래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영화판 쫓아다니면서 중단편 영화도 찍고 단역으로도 많이 출연했는데, 몇 년 전 나문희 선생님이 출연하신 <열혈남아>를 보고 ‘더 이상 영화판에 기웃거리지 말자’고 결심했어요.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기회가 되서 내게 그런 어머니 역이 주어진다면 그때 멋지게 해내야지라고 마음먹었는데, 이번에 개봉하는 <마더>에 또 단역으로 출연했어요.(웃음) 드디어 김혜자 선생님을 만났어요. 저는 눈 한번 깜박하면 없어지지만 어쨌든 기념비적이죠.(웃음)

 

뮤지컬은 몇 작품 안 하셨는데, <빨래>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셨어요?
뮤지컬 <토킹>에 출연하고 있을 때, 추민주 연출이 공연을 보러 왔었는데 그게 인연이 됐어요. 어느 날 추민주 연출이 곧 공연을 올리는데 이 역을 맡아줄 수 있겠냐고 전화를 했어요. 그때는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대본도 안 보고 거절했거든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원더스페이스에서 앙코르 공연이 올라갈 때, 이 역을 해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잊지 않고 두 번이나 전화를 주니까 고마웠죠. 내가 재주는 없지만 일단 대본을 보고 해보겠다고 대본을 봤는데, 시대가 한 바퀴 돌고 온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시대가 변해도 똑같이 반복되고,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는 순환적인 이야기였어요. <빨래>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사실 그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여러모로 필요한 이야기겠다 싶어서 같이 하자고 했어요. 처음에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웃음)

 

<빨래>를 보면서 단순히 연기를 위한 연기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0년 쯤 일인데 연극 <라이어>에 출연하고 있었을 때, 장기공연이라 싫증이 나기도 했고 ‘지금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다 그만두고 몇몇 지인들과 연극을 만들었던 적이 있어요. 두 편을 제작했는데 두 개 다 말아먹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제작비를 지인들에게 빌렸던 터라 그걸 수습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했어요. 그 빚은 아직도 못 갚았지만.(웃음) 김밥 장사, 녹즙 배달, 시장에서 야채 장사까지 해보고 나니까 제가 지금까지 했던 연기가 좀 잘 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너무 머리로만 했던 거죠. 배우들하고 트레이닝해서 작품을 올리고 실패하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삼년 정도 시간을 보냈는데 그 후 다시 무대에 섰을 때, 선배들이 연기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일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겠네요.
사람다워졌죠. 이렇게 생겼으면서 옛날에는 내가 스타가 될 줄 알았다니까요. 진짜로.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할 때 제 기사가 크게 난적이 있었거든요. 그걸 보고 ‘난 이제 됐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나요. 그때 낙담도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권)해효 오빠가 와서 “네가 잘하면 그 자체로 빛이 날 텐데, 네가 아직 못 하는 거야. 그냥 작업만 열심히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배우가 유명세를 바라지 않는다는 건 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작업자로서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빨래> 이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시잖아요.
개인적인 인터뷰도 많이 했고 방송에도 많이 나왔지만 사실 저는 이게 물거품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비범했던 사람이 다음날 가장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한 작품으로 기억됐던 배우가 다음 작품에서는 실패하고 잊혀질 수도 있어요. 그 때 이후로 바뀐 게 이런 인식이에요. 그 전에는 모든 작품이 다 성공할 거라 믿었고 제가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했었어요.(웃음) 실제로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까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하고 매번 살기 위해 매달려야 하고. 그런 문제가 무대에도 똑같이 존재해요.

 

<빨래>를 보고 나면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바보 같은 기대를 갖고 열심히 살아 보겠노라고 다짐하게 돼요.(웃음) 매일 공연하는 사람으로서 어떠세요.
그게 연출자의 트릭이라니까요.(웃음) 저는 혼자 있을 때는 굴을 파고 여럿이 있으면 힘내자고 하는 타입이에요. 나 혼자라면 어떻게 되도 상관없겠지만 2인 이상이 모인 사회라면 반드시 해나가야 할 어떠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공연을 하면서 항상 두 가지 생각이 교차돼요. “그래서 뭐?”, “그래도” 아마 관객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연기를 하시는데, 특별히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는 것들이 있나요.
저 다큐멘터리 광이에요. 다큐멘터리도 다 연출되는 거라고 하지만 그 속에도 진짜 배우가 있어요. 예전에 김혜자 선생님이 좋은 음악을 들으면 자신의 연기가 하찮은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렇게 느껴요. 얼마 전에도 ‘풀빵엄마’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사람은 정말 죽고 사는 그 기로에 서있는 건데, 그걸 제가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냐는 거죠. 그런 것들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하면서 박수 받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요.

 

앞으로의 목표는 뭐예요.
허락되는 한 계속 배우로 남는 거요. 나중에는 “저 사람이 배우야?”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을 똑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봤을 때, ‘딱 나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요만큼의 거짓도 없었으면 하는 게 제 꿈이고 바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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