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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풍월주> 아쉬운 판타지 사극 [No.105]

글 |박정환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CJ E&M 2012-06-11 4,264

어느 순간부터, 정확하게 표현하면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사극을 다루는 경향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역사적 문헌에 기초한 ‘팩트’를 토대로 만드는 정통 사극은 21세기 이전부터 얼마든지 있어왔다. 그런데 정통 사극과는 다른 형태의 사극이 21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바로 ‘팩션 사극’이다. ‘팩트’라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결합한 장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뿌리 깊은 나무>와 영화 <왕의 남자>, <미인도>, 공연 <밀당의 탄생> 등이 ‘팩션 사극’에 해당한다. 정통 사극과 사극이라는 장르적 성격은 공유하되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입혀진 ‘픽션’으로 말미암아 정통 사극과는 차이를 갖는다. <풍월주> 역시 ‘팩션 사극’이다. 역사 속 ‘팩트’인 진성여왕이 등장하고 풍월주라는 단어 역시 화랑을 지칭하던 용어인 ‘팩트’다. 남자 기생이라는 모티프를 제공한 ‘화랑세기’ 또한 실제 사료 아니던가.

 

하지만 <풍월주>가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픽션’이 덧입혀진 ‘팩션 사극’에 머무는 걸 넘어서서 ‘판타지 사극’으로 자리하면서부터다. 다른 ‘팩션 사극’과는 달리 두 주인공인 열과 사담은 가공의 캐릭터다. 이 두 사람이 극의 키워드를 쥐락펴락한다. 반면 실존 인물인 진성여왕은 전체적인 비중으로 따져볼 때 열과 사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가공과 역사적 사실이 뒤섞인 공연인 <엘리자벳> 또는 <에비타>만 보더라도 실존 인물이 동선을 좌우한다. 하지만 <풍월주>는 <엘리자벳>이나 <에비타>와는 정반대다. 가공이 실제보다 하위에 속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거꾸로 가공의 인물이 실존 인물을 압도하는 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풍월주>가 판타지로 변모하는 두 번째 지점은 열과 사담이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 야오이 코드와 맞물리면서부터다. 열은 엄밀히 말하면 ‘양성애자’다. 남자인 사담과 사랑을 나누는 사이이자 동시에 진성여왕과도 육체적 교감을 이루는 양성애자다. 하지만 양성애자라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담과의 사랑이 진성여왕과의 사랑보다 중요하다. <풍월주>가 ‘판타지 사극’으로 규정되는 다른 이유는 동성애라는 판타즘 때문이다. 공연에서 동성애가 여성 관객을 불러 모으기 위한 하나의 흥행 코드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경향이다.

 

‘발상의 전환’ 역시 <풍월주>를 ‘판타지 사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성의 육체를 탐닉하는 주체는 십중팔구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다. 하지만 <풍월주>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비튼다. <풍월주>에서는 여성이 젊은 남성의 육체를 탐닉한다. 화랑을 지칭하던 용어인 ‘풍월주’가 남자 기생을 뜻하는 명사로 탈바꿈하질 않나, ‘운루’가 여성 고객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으로 바뀌는 ‘팩션 사극’의 이면에는, 이성을 탐닉하는 주체인 남성의 지위와 욕망의 대상으로 투사되던 여성의 위치를 180도 바꿔놓는 ‘발상의 전환’이 자리한다. <풍월주> 속에서는 남근이 없는 쪽이 권력을 잡은 기득권자로 자리한다. 극 초반 궁곰이 손님인 여부인과 진부인을 질펀하게 접대하는 장면은 그 단적인 사례다.

 

<풍월주>는 ‘팩션 사극’이자 ‘판타지 사극’이면서 동시에 ‘퓨전’ 스타일의 뮤지컬이다. 배우의 복식은 전통 한복과는 거리가 멀다. 휴고 보스가 <풍월주>를 위해 디자인했다고 착각할 듯한 유려한 디자인의 양장이다. 음악은 어떤가. 작년에 개봉한 영화 <히트>의 배경음악은 모두 국악으로 구성됐다. <히트>의 배경음악처럼 극적이진 않더라도 <풍월주>의 배경음악에는 부분적으로 ‘국악’ 가락이 섞여있다. 열의 춤사위 가운데에는 ‘전통 무용’이 후반부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한국적인 이야기 가운데 동양과 서양의 양식이 고루 섞여있다.

 

애절한 사랑, 하지만 왜?

극의 동선은 진성여왕이 열의 아기를 갖는 지점으로부터 양분된다. 그 이전에는 남자 기생은 주체로 자리 잡지 못한다. 고객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접대하는 남자 기생만 있을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 남자 기생을 좌우하는 주체는 진성여왕이나 여자 귀족, 또는 운장 어른이다.

 

하지만 진성여왕이 임신하면서부터 남자 기생은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여성 고객을 접대하는 장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열과 사담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변되던 운장 어른 또는 진성여왕은 후반부 들어 남자 기생 앞에 무릎마저 꿇는다. 입지의 역전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진성여왕은 사랑을 갈구하고, 운장 어른 역시 운루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열에게 간구하는 입지로 바뀐다. 입궐해야만 하는 열의 운명 앞에 사담과의 사랑은 최대 위기를 맞으며 ‘타나토스’는 꿈틀대기 시작한다.

 

<풍월주>는 퀴어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역할의 고정’을 비껴간다. 사담과 열 중 누가 남성 역할을 하고 여성 역할을 하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성 역할을 부여하지 않음으로 열과 사담의 관계는 연인의 이야기를 남성의 우정으로 볼 수도 있게끔 만드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성 역할을 탈색하다보니 두 남자의 사랑은 육체적 열정에 따른 에로스적 관계라기보다는 ‘플라토닉 러브’로까지 보인다.

 

진성여왕은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내는 여린 여자다. 천하를 호령하면서 사람 목숨은 파리처럼 가벼이 여길 줄도 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뼛속 깊은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다. 열과 진성여왕의 관계는 얼핏 보면 ‘교미 후의 사마귀 커플’ 같아 보인다. 교미를 마친 후에는 암컷 사마귀에게 머리를 뜯어 먹히는 수컷 사마귀의 비애처럼, 열은 진성여왕에게 쾌락을 안겨드려야만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비천한 사내다. 하지만 진성여왕에게 열은 그 이상의 존재다. 진성여왕의 이름을 불러준 유일한 남자가 열이고, 진성여왕이 품에 안기고픈 남자가 열이다. 하지만 열과 사담의 관계가 워낙 단단히 결합하기에 진성여왕은 이 두 사람의 관계 가운데서 소외된다. 진성여왕은 열이 사담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 자신이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진성여왕은 사담의 위치에 영영 다다르지 못하고 소외당한다.

 

한데 <풍월주>에는 열과 사담의 사연이 없다. 어린 시절에 물에 빠진 사담을 열이가 구해주었다는 사연 외에는 두 사람이 어떻게 목숨을 걸 만큼 단단히 결합됐는지 알려주는 사연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근데 이게 심각한 문제로 똬리를 튼다. 열과 사담에게 사연이 없다는 건 단순히 사건과 다음 사건을 연결하는 연결 고리 하나 빠진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에 문제다. 수학으로 비유하면, 제곱근을 이해하지 못하면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삼각비를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심각한 차원이다.

 

 

이를 좀 더 살펴보자. 열이 진성여왕의 남자로 궁에 입궐한다는 건 열이 신라를 거머쥔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런데 열이는 이 절호의 기회를 단호히 거절한다. 사담과 헤어질 수 없어서다. 그렇다면 <풍월주>는 열과 사담 두 사람의 사연을 공고히 구축했어야만 한다. 단순히 사담이 열이의 옷을 몰래 만들어 입히려는 평면적인 연출을 넘어 그 이상의 깊은 사연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열과 사담 둘이 맺어지는 과거 사연을 등한시한다. 이 때문에 열이가 왜 왕의 남자가 되는 영광을 뿌리치면서까지 사담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당위성, 또는 두 남자가 목숨을 내던질 만큼의 애절한 사랑이 휘발하고 만다.

 

넘버 ‘너의 이유’나 ‘꿈의 소리’가 관객에게 호소력 있게 전달되길 원한다면, 넘버 이전에 관객으로 하여금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드는 연출이 필요하다. 하지만 연출보다 넘버의 호소력을 신뢰한 탓일까. 열과 사담, 진성여왕이 애절하게 부르는 넘버는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연극이라면 모를까, 음악극이나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넘버가 호소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인가 우정인가를 헷갈리게 만드는 것 역시 열과 사담 두 사람의 사연이 없는 탓이다.

 

프리뷰 티켓 오픈 당시 2,400석이 단 5분 만에 동이 난 <풍월주>, 정작 본 게임에선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하는 타자로 전락하고 만다. 산만함과 개연성을 더 보완해야 ‘관객 만족’과 ‘작품성’이라는 타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5호 2012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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