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창작뮤지컬은 ‘수작’보다는 ‘미완’의 작품이 많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관객의 기대를 한껏 모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김빠진 탄산음료 같은 작품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 여름부터 창작뮤지컬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단과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두 신예 작품이 기린아처럼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하는 뮤지컬 <모비딕>이다.
비극을 암시하는 무대
소설의 원작 서사는 방대하다. 혹여 뮤지컬이 방대한 원작을 가감 없이 아우르려 했다면 아마도 나열식의 평면적인 연출에만 그칠 뿐 서사의 강약 조절에는 실패했을 확률이 높다. <모비딕>은 악수(惡手)는 피하고 현명한 연출 방식을 택한다. 원작을 전부 옮겨 담는 것이 아니라 연극 <우어파우스트>처럼 강조해야 할 서사에만 집중하고 생략해야 할 서사는 과감하게 포기하는 ‘집중의 원칙’을 택했다.
요즘 한국에서 막을 올리는 뮤지컬의 경향 가운데 하나는 ‘해설자’의 등장이다. <에비타>에서는 체, <엘리자벳>에서는 암살자 루케니, 그리고 <모비딕>에서는 이스마엘이 해설자가 된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에비타>의 체, <엘리자벳>의 루케니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부수적인 해설자다. 하지만 <모비딕>의 이스마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해설자이자 동시에 에이헙 선장과 함께 이야기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다. 이스마엘이 빠지면 이야기의 동선은 흐트러져 버리기 쉽다. 이스마엘이 회고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이끄는 동선은 초연과는 차이를 갖는다. 초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사가 이어진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홀로 살아남은 이스마엘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옛 이야기를 떠올리는 회고로 서사가 이어진다.
이스마엘과 퀴퀘그의 우정이 오래 이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소설 원작을 모르는 관객이라도 복선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이는 이야기 속의 복선이 아니라 물리적인 요소에서 복선을 찾을 수 있다. 무대를 통해서다. 무대를 통해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이란 걸 알 수 있다고? 배 갑판을 보라. 배 갑판을 보면 수평이 아니라 앞으로 기울어졌다.
필자가 관람했던 공연들 가운데서 경사진 무대를 가진 공연 속 주인공의 앞날은 하나같이 순탄하지 못했다. 국립극단의 연극 <오이디푸스>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에서 블랑슈와 수녀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지바고는 보통 사람처럼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미끄러지는 무대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겪어야 할 인생 여정의 내리막길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모비딕>의 경사진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스마엘을 향해 앞으로 펼쳐질 인생길이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걸 암시하는 복선이다.
비극적 영웅의 사적 복수
<모비딕>에서 독창적으로 구현된 캐릭터는 네레이드다. 남성 위주의 서사에서 단 한 명의 여성 캐릭터라는 유일무이함 때문이 아니다. 뱃사람은 육지 사람보다 금기가 많다. 육지에 다시금 발을 붙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죽음의 공포와 직결되는 터부다. 이를테면 대왕오징어를 보는 뱃사람은 육지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 공포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네레이드는 피아노만 연주하다가 뱃사람의 공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1막 후반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파상풍으로 죽어가는 퀴퀘그와는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
얼핏 보면 네레이드는 마치 퀴퀘그를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한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보다는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와 유사하다. 북유럽 신화 속에서 발키리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어가는 전사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네레이드는 죽음을 알리는 존재임엔 분명하다. 하지만 네레이드가 퀴퀘그의 죽음을 알리는 초자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노래를 통해 퀴퀘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네레이드는 퀴퀘그와 이별의 노래를 통해 교감을 나누면서 동시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네레이드는 퀴퀘그를 저승길로 몰아붙이는 저승사자라기보다는, 다른 뱃사람과는 달리 죽은 고래에게도 감사할 줄 아는-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알고 있던 퀴퀘그에게 피안을 제공하는 ‘발키리’에 가깝다.
에이헙 선장은 ‘하마르티아’(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비극을 초래함을 뜻하는 옛 그리스어)로 대변되는 인물이다. 인간인 에이헙이 자신의 다리를 앗아갔다는 복수심만으로 모비딕에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대자연과의 결투를 신청하는 ‘휘브리스’(교만)와 직결되는 ‘하마르티아’이기 때문이다. 모비딕에 대한 에이헙의 복수는 다른 선원의 생명마저 저당 잡는다. 사적 복수가 타인의 생명마저 담보 삼는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하마르티아’가 다른 선원에게까지 파급되는 양상이다.
<모비딕>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에이헙의 사적 복수가 다른 선원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에이헙의 복수가 전이되는 과정이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에이헙의 욕망과 선원의 욕망이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일 먼저 모비딕을 발견하는 선원에게는 스페인 금화를 주겠노라고 하면서 금화를 상금으로 내걸 때 선원들은 모비딕을 맨 먼저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에이헙이 모비딕을 찾고자 하는 사적 욕망에 선원이 동조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에이헙의 욕망과 선원의 욕망은 괴리를 갖는다. 지향하는 목적이 서서히 달라진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뱃사람으로서의 고독은 육지에 있는 가족을 회상함으로 위안을 받는다는 스타벅, 육지에 대한 향수를 시간 날 때마다 읊조리는 스텁과 플라스크는 있을지언정 에이헙의 모비딕을 향한 복수라는 사적 욕망에 선원 전체가 포획당하는 과정은 에이헙이 선원을 향해 소리치는 고함소리 외에는 별반 찾기 힘들다.
대사와 노래를 대체한 연주
그럼에도 <모비딕>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매력적인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네레이드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함으로 남성적 세계관에 여성 캐릭터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을 덧입혔다는 점과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와 유사하게 묘사한 점은 캐릭터 구현에서의 장점이다.
둘째로는 연주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이다. 흔히 연주는 배우의 노래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부수적인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비딕>은 드러머를 제외한 모든 배우가 연주에 동참해서 연주는 배우의 대사가 되면서 극의 감정선을 고조시킨다. 오케스트라가, 살아 움직이는 배우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에게 감정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가령 에이헙이 처음 등장하고 난 후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험악한 이중주는 에이헙과 모비딕의 긴장 관계를 음악적 선율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여정이 불길하리라는 걸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이스마엘의 피아노와 퀴퀘그의 바이올린 협주는 두 남자의 우정 쌓기를 대사나 노래 하나 없이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그 흔한 화려한 쇼잉 하나 없이도 연주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대사나 노래를 대체한다.
심지어는 악기 자체가 소도구가 되기도 한다. 악기는 연주를 위한 도구이자 망원경도 되고, 고래의 머리가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흰 고래 모비딕이 되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스마엘과 바다의 망자가 된 피쿼드호 사람들이 다 같이 부르는 마지막 넘버인 ‘고래잡이의 추억’은 객석을 벗어나 귀가하는 길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넘버였다.
후배 창작뮤지컬에게 이정표가 될 뮤지컬 <모비딕>에는 유난히 ‘요나서’가 많이 언급된다. 이에 ‘욥기’를 빌려 뮤지컬 <모비딕>에 대한 전망을 피력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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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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