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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욕심을 내지 않은 미덕이 과했다 <피크를 던져라> [No.80]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사진제공 |아티스탄 2010-05-17 5,807

꽤 오래 전에 나는, 연극과 노래가 결코 잘 어울리는 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적이 있었다. 노래와 연극을 엮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작곡가와 연극 연출가가 팀을 이루어 대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한 달 내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짓을 계속하는 것을 옆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다. 대강의 줄거리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 연출가가 써온 대본은 연극이 중심이고 노래를 막간공연처럼 넣어놓은 데에 그치고 있는 반면, 작곡가가 써온 대본은 노래를 중심으로 한 콘서트에 약간의 설명 정도가 덧붙은 것 같은 형국이었다. 각기 다른 장르를 몸에 지닌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을 정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표현했다. 둘은 한 달 내내 함께 먹고 자며 밤을 새웠는데, 연출가가 지쳐 잠이 들면 작곡가가 노래 중심으로 고쳐 쓰고, 그 다음 날은 전날 밤을 새운 작곡가가 곯아떨어진 후 연출가가 연극 중심으로 다시 고쳐 썼다. 대본은 매일 밤 다시 쓰였지만, 결국 한 달 내내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 끔찍한 한 달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은, 내가 뮤지컬에서 노래와 연극이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 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연극과 노래가 매우 다른 종류의 예술이라는 것, 연극이 인간의 싸움을 보여줌으로써 시간을 밀고 나가는 예술임에 비해, 노래는 감정과 감각의 어느 한순간에 시선을 머물게 함으로써 이를 심화시키는 예술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뮤지컬 속의 노래는 보통의 노래와 달리 연극의 한 인물, 한순간을 포착하면서도 앞으로 달려 나가는 연극의 시간성을 껴안는 노래여야 하고, 뮤지컬의 연극은 한편으로 노래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멈춰지고 극이 늘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감정과 감각에 집중하여 연극에서는 성취하기 힘든 서정적 고양을 이룩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뮤지컬은 유명 극작가와 유명 대중가요 작곡가가 손을 잡음으로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이런 방식의 조합으로 망한 뮤지컬이 얼마나 많았던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창작뮤지컬이 보여주는 한 경향, 즉 노래나 춤을 좀 더 강화하고 극을 약화시키는 경향은, 노래 .춤과 연극이 유기적으로 엮이는 뮤지컬 창작을 잘 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수 있다. <피크를 던져라>(박계훈 극본, 지영관 연출)는 이런 발상으로 만들어진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능력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이다. 즉 연극적 측면을 채울 능력이 취약하다고 판단하고 아예 이를 과감히 축소해버린 점이다. 우선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아주 단순한 줄거리를 선택했다. 무명의 가난한 록밴드, 젊은 혈기로 몇 년 버텼으나 멤버들은 돈이 없고 군대 징집 때문에 아슬아슬한 상황, 여기에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노래를 거부하며 록 정신을 고집하느라 칙칙한 노래만 짓는 선배 리더와 이보다 젊은 멤버들 사이의 갈등, 멤버들 사이의 약간의 사랑 등이 뒤섞이는 이야기이다. 별 설명이 없어도 다 짐작할 만한 뻔한 이야기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이런 극적 측면을 만들고 설명하는 데에 드는 시간을 과감히 축소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디션>이 보여준 문제점, 즉 뻔한 이야기를 할 뿐 아니라 극적 형상화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도 이런 극적 장면에 불필요하게 긴 시간과 공간을 할애한 문제점을 상당히 약화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마치 콘서트처럼 장면은 노래 한 곡을 중심으로 도막도막 나뉘어 있고, 그래서 암전이 잦지만 그리 불편하지도 않다. 무대는 시종 록밴드 연주 때처럼 악기가 차지하고 있는데, 연극적 장면 역시 여기에서 그다지 벗어날 필요가 없이 설정되어 있으며, 대부분 코믹 릴리프이므로 극적인 전개가 필요하지 않아 부담이 없다. 극을 만드는 수준은 초보 중에도 왕초보이되, 자신이 초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능력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은 채 관리 가능한 수준의 극적 요소만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이 작품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너무나도 욕심을 내지 않아, 연극적인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에서 음악이 비어버리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갈등의 삼중창 같은 음악극적인 노래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물들의 고민과 고통이 가장 최고조로 도달하는 장면에 어울리는, 작품의 감정적 고양을 뒷받침해줄 만큼 가슴을 뒤흔드는 노래의 배치 정도는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도리어 이런 장면에 노래가 없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뻔한 이야기에 있다. 대중적인 작품이 늘 새롭고 참신한 내용을 담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뻔한 이야기란 당대 대중들의 누적된 체험이 만들어낸 진액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명의 연예인 지망생이, 절정기를 넘어선 선배의 사고를 계기로 결국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는 백스테이지 뮤지컬의 뻔한 내용, 억압적 교사와 욕심 많은 부모 아래 중고생이 성적과 인생 문제로 고통스러워 하다가 자살을 택한다는 청소년물의 뻔한 내용 같은 것이 그러하다. 무명의 예술인이, 돈과 사랑, 그리고 동료 간의 예술적 차이로 괴로워 하다가 한때 뿔뿔이 흩어져 팀 해체의 위기를 겪고, 다시 의기투합하여 페스티벌이나 오디션에서 성공하는 이야기 역시 이 못지않은 상투성이다. 음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체험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 뻔한 이야기야말로 이런 종류의 뮤지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의심하게 만든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로  몇 편을 더 만들 수 있을까. 관객들은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더 반복적으로 보아주고 넘어갈 것인가 하는 의문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런 콘서트 성격의 뮤지컬의 미래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뮤지컬이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 춤이 강화되는 작품은 댄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노래가 강화된 작품은 음악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그친다면, 이런 방식의 작품은 너무도 뻔한 서사의 틀을 맴돌게 된다. 콘서트처럼 악기를 벌여놓고 뮤지컬을 진행하되, 음악인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도 다룰 수 있는, 새로운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즉 노래 한 곡 한 곡의 독립적 완성도를 충분히 살려주면서도, 그 안에서 좀 더 풍부한 산문적 내용, 극적 내용, 서사적 내용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야말로, 이런 콘서트형 뮤지컬의 양식 실험에서 핵심이다. 그러나 음악인을 인물로 하여 자신들의 체험과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노래의 대부분을 프로덕션 넘버(극중 예술인 인물들이 공연을 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채우는 방식으로는 이러한 고민과 실험에 정면승부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이 작품이 콘서트적인 뮤지컬치고는 음악의 질이 좀 떨어진다는 점이다. 코믹 릴리프를 포함한 연극적 측면을 소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음악인이 아닌 연극인을 캐스팅한 탓인지, 각 연주자들의 연주 질은 들쭉날쭉했다.욕심은 버리되, 고민은 좀 더 날카롭게 벼릴 필요가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0호 2010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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