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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ALON] 연출 김민정·배우 박건형 [No.108]

글 |이민선 사진 |김호근 장소협찬 | 이리카페 (02-323-7861) 2012-10-04 6,586


 

그들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바다 위를 유영하는 중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는 접속사가 없었다.

상대의 말에 맞장구치며 동의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툭툭 제 머릿속의 이야기들을 맥락 없이 내려놓았는데, 묘하게 한 사람의 것인 듯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백하자면, 기자는 둘의 소통에 감히 합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만남에서는 그 소외감마저 자연스러웠다.

 

 

두 키덜트의 만남

 

김민정  전 종종 이 카페에 와서 작업을 하거나 멍하니 앉아 있곤 해요. 여긴 혼자 와도 전혀 외롭지 않고,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도 안 어색한 곳이죠. 이곳의 음악 선곡은 좀 남달라요. 밤이 깊어질수록 음악이 좋아요.
기   자  두 분은 연습실과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만나기도 하나요?
박건형  가끔? 그런데 지금 굳이 의미를 찾자면, 연출님의 아지트라고 할 만한 공간에 제가 들어왔단 거죠. 여기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김민정  이곳 말고도 좋아하는 공간이 또 있지만, 마음 편한 건 여기였어요.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도 아니고, 있어 보이는 데도 아니지만, 편한 곳.


기   자   두 분이 처음 함께한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죠? 이전에도 서로 알고 계셨나요?
박건형  전 (연출님을) 몰랐어요. 처음 뵈었을 때, 되게 신선했어요.
김민정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박건형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일상을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연출님 덕인 것 같아요. 처음에 배우와 스태프 모두 모여서 인사를 할 때, 연출님이 3분짜리 모레시계를 가져 오셨어요. 3분 동안 자기소개를 하는데, 첫 만남부터 갑자기 모든 게 특별해지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통과하고 있지만 그냥 흘러서 지나가 버리잖아요. 그런데 연출님을 통해서, 스쳐 보냈던 생각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전에도 했던 생각들이지만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게 된 거죠. 저한테는 정말, 아, 경이로운 경험이었어요.
김민정  글쎄, 건형이는 그냥 알 것 같은 애? 제 머릿속에는 수없이 많은 서랍들이 있고, 그중에 직관과 영감으로 가득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랍이 하나 있어요. 그 서랍 안에 있는 애?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이유는 저도 몰라요.
박건형  연출님과 작업할 때는 무장하지 않아도 돼요. 완전히 해제된 상태에서 해요.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생성되든, 그게 여기서 나오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그걸 가지고 놀아보자고 하세요. 제가 극도로 긴장할 때도 있고 극도로 편할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다 소통 방법이 있어요.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모자란 대로 또는 넘치는 대로, 그 상태에서 시작해요.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웃음)
김민정  너에겐 축복이지, 내 맘을 니가 알어?
박건형  방향성이 같다는 데 무언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다른 건 상관없는 것 같아요. 텔레파시 게임 있잖아요. 내가 마음속으로 무슨 숫자를 생각하는지 맞혀봐, 이런 거.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상대가 진짜로 맞혔을 때 생겨나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이미 한번 경험했다면 또 경험해보고 싶은 거죠.
김민정  제 작업의 전제 조건은 몸의 세포를 다 열고 시작하는 거예요. 연출가는 배우뿐만 아니라 각 파트의 스태프들과 다 교감해야 하기 때문에, 연결점이 열려 있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돼요. 건형이가 유달리 더 특별한 이유는 그도 연습을 시작할 때 세포를 다 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무방비 상태로, 그가 가진 모든 감각을 다 열어놓거든요. 조금만 건드려도 몸을 움츠리는 말미잘처럼, 건형이도 모든 것에 반응하기에 연출에게는 특별하고 매력적이죠. 이건 찬사예요!
박건형  음하하하하. 제가 작품에 임하는 자세는 늘 같지만, 저의 그런 무방비한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어요.
김민정  저는 감당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그게 정말 행복해요. 배우가 내 눈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게.
박건형  처음 뵈었을 때, 체구도 작으시고 내가 보기엔 연출님이 되게 어린애 같은데, 나를 완전히 어린 꼬마 바라보듯 보시더라고요.


기   자  얘기를 듣다 보니….
김민정  둘 다 앤가요?


기   자  네, 그래서 두 분이 잘 맞고, 또 <헤드윅>에도 어울리는 걸까요?
김민정  헤드윅의 세계는 결코 어른의 세계가 아니죠. 제가 말하는 아이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독창적이고 대담하고 이기적이죠. 사실 그게 크리에이터의 기본 아닌가요? 어른들은 너무 겁이 많고, 의식해야 할 시선도 많고, 이미 자기 안에 룰이 많잖아요.

 

기   자 헤드윅도 그렇고 베르테르도 그렇고, 박건형 씨는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작품마다 김민정 연출님과 함께했어요.
김민정   건형이가 베르테르를 맡았을 때, 저는 의외의 캐스팅이란 걸 뒤늦게 알았어요. 전작을 통해 갖게 된 이미지 때문이더라고요. 저는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반응이 더 의아했죠. ‘왜? 이상하네. 박건형은 소년인데 왜 안 되지? 잘할 거야.’
박건형  제가 베르테르를 맡았을 때, 제 주변의 98퍼센트가 반대했어요. 헤드윅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는 알잖아요. 저에게도 서랍이 있다면, 그 서랍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저만 알아요.


기   자  내게도 분명히 이런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요?
박건형  물론이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난 되게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하고, 사람들도 ‘응, 그래, 넌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구나’라고 답하고 날아가 버리는 것도 원치 않고요. 내가 분명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너무 오랫동안 간직만 하다 보니까 막상 그걸 꺼내어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어요. 내가 그걸 보여주기엔 너무 늦어버린 걸까 생각한 찰나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김민정 연출을 만났어요. 그때 제가 그 얇은 끈을 잡아버린 거죠. 그때 그 끈을 잡지 않았더라면, 헤드윅을 연기하는 저도 없었겠죠.

 

 

흘러가는 대로


박건형  저는 작품에 참여할 때, 제가 연출가와 안무가, 음악감독의 아주 재밌는 장난감이 되길 바라요. 저를 여기에 놓았다가 저기에 놓는 시도를 거듭하면서, 연출가가 구상하는 그림 속에 어울리는 게 제 목표죠.
김민정  좀 얄밉기도 해요. 건형이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게 정말 어울리니까.
박건형  연출님은 연습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세요. 연습실에서는 제가 누워서 대사를 하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서 있든 상관없어요. 어디에 있든 모두 다 나였어요. 그런데 무대에 섰을 땐 음악이 나오는 순간, 조명이 들어오는 위치에 정교하게 들어가 있어야 해요. 이때, 제가 그냥 정해진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연습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나들이 다 통합돼 그곳에 서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받았던 느낌들이 무대 위의 저에게 다 들어오는 거죠. (카페에 있던 기타를 건네받은 박건형이 ‘Wicked Little Town’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김민정  건형이는 지금처럼 기타를 그냥, 불쑥불쑥 쳐요.


기  자  원래 기타를 연주할 줄 아셨어요?
김민정  기타를 칠 줄 아는 것과 불쑥불쑥 치는 것은 조금 달라요.
박건형  연출님은 싫어해요, 기타도 못 치면서 친다고.
김민정  그건 얘 착각이고요, 사실은 좋아해요. 모르는 척하긴.
박건형  연출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하건 욕하건 무섭지 않은데, 연출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 제일 무섭고 두려워요.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우리가 되게 넓은 바다에 빠져 있어요. 처음엔 좋다고 헤엄치다가 나중엔 힘이 빠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는데, 모르겠대요. 허!
김민정  대신 나도 그 옆에 있잖아, 같이 허우적대면서! 나 혼자 저기 보트 위에 올라가 편히 앉아서 ‘난 모르겠는데~’ 하진 않잖아. 난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니라구.


기   자  하하, 그래서 결국 그 답은 누가 구하나요?
박건형  제가 구해야 해요, 저 스스로. 작품을 준비하는 건 우리가 함께 놀 놀이터를 만드는 것 같아요. 난 우리가 만든 미끄럼틀이 제일 재밌는 미끄럼틀로 보이도록 재밌게 타야 해요. 내가 재밌게 타려면 그게 정말 재밌는 미끄럼틀이어야 하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재미가 없어졌는데도, 난 계속 재밌는 척 타야만 해요. 그럴 땐 처음 미끄럼틀을 타고 재밌어 했던 순간들을 떠올려요. 그런 순간들, 조각들이 모여서 제 인생이 되겠죠. 전 일상의 모든 것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잘 간직하려고 해요.
김민정  아우, 피곤하겠다. 일상을 기억해야지, 담아둬야지,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박건형  왜요, 재밌잖아요. 전 즐거운데요?


기   자  연출님은 작업할 때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시는 것 같던데, 이번 작품 준비할 때 영향받은 이미지도 있나요?
김민정  이번에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많이 봤어요. 그녀는 지금 런던에서 가장 파워풀한 아티스트예요. 이전에도 좋아했는데, 그녀 작품의 색채와 질감이 <헤드윅>하고 잘 맞아요. 그녀의 히스토리도 만만찮고요. 그녀의 작품을 보는 건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무언가를 열렬히 갈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박건형  연출님이 이런 얘기를 하면 알아들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요. 알아들었을 땐 ‘와, 내가 이런 걸 알아들었어!’ 그러고, 모를 때는 ‘어, 뭐지?’ 하고 우리에게 얘깃거리가 생겨서 좋아요.
김민정  건형인 뭐든 알고 싶어 해요. 그게 원동력인 것 같아요. 알고 싶어 하고 찾고 싶어 하는 것.
박건형   제 원동력은 끊임없는 호기심? 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내 발로 걸어가서 내 손으로 만져보고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어보고 내 입으로 먹어보고 내 코로 맡아보고 내 몸을 다 담궈보는 거죠.
김민정  건형이는 직접 경험을 좋아해요. 스스로 체득하고 자기 세포로 끌어안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거죠.
박건형  전 작품을 할 때 여름처럼 해요. 여름에 미친 듯이 비가 오고 나선 또 미친 듯이 태양이 작열하잖아요. 그 타들어가는 느낌! 전 여름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벌써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의 냄새가 나네요, 하. 이번 여름에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헤드윅> 연습하는 동안 제가 정말 좋아하는 햇볕과 뜨거움들이 다 지나가 버렸어요!
김민정   우리가 나누는 건 작품 이야기뿐인데, 그 외엔 햇빛과 바람, 그런 이야기 정도?


기   자  실내에서 연습하는 동안 자연을 만끽할 시간이 없었군요.
박건형  저흰 쉬는 시간이 굉장히 많았답니다. 제가 연습실 밖 주차장에 옷 벗고 누워선 버티고 안 들어와서, 하하.
김민정   뭐, 누워 있어야 해서 누워 있는 거니까, 그래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작품 모두 여름에 연습했네. 다음엔 건형이랑 겨울에 작업하고 싶네요. 그때 우린 어떨지.
박건형  기자님, 왜 질문이 없어요?


기   자  뭐, 굳이 두 분께 질문을 드리는 게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김민정  우리 무슨 이야기 더 하지? 저희 둘이 별로 말을 많이 하진 않아요. 우린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하자.
박건형  마무리? 우리 기사에 마침표는 찍지 말아 주세요.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중인 것처럼. 애들이 놀 때 모레로 댐을 쌓아 물을 괴여 놓아도 결국 다시 흘러가잖아요.
김민정  그들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어느 순간에 강렬하게 불탔다가 그것이 지나간 다음에 깊은 어둠 속에서 고독해하고 또 끊임없이 흘러가고…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8호 2012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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