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바람이 연극을 거쳐 뮤지컬로 넘어왔다. 줄곧 영화와 드라마에서 원작을 골라왔던 최근 창작뮤지컬의 흐름 속에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나온 것은 꽤 오래간만의 일이다. 이렇게 잘 알려진 작품을 뮤지컬로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평론가들은 극작가, 연출가,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작품에 대한 기대의 수준과 방향을 대강 가늠하게 된다. 어떤 질감의 작품이 나올지, 쉽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은 무엇이며, 함정에 빠질 부분은 어디인지 등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구태환이 극작과 연출을, 김형석이 작곡을 맡았다는 정보는, 일단 나에게 뮤지컬다운 뮤지컬에 대한 기대를 살짝 접게 만들었다. 구태환과 김형석은 모두 매우 능력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드는 연극인·작곡가임에 분명하지만 뮤지컬의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다. 능력 있는 극작가와 연출가, 능력 있는 대중음악 작곡가를 무조건 합쳐놓는다고 좋은 뮤지컬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성황후>부터 시작하여 십 수 년 동안 줄곧 확인해 왔다. 좋은 뮤지컬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뮤지컬에 능란한 극작가와 작곡가가 필요하다. 뮤지컬적인 극작, 뮤지컬적인 작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구태환과 김형석의 짝은 다소 불안한 지점이 없지 않았다. 구태환은 <고곤의 선물>, <심판> 등 결코 쉽지 않은 희곡을 긴 호흡으로 잘 소화해내는 연출가이지만 뮤지컬 경험은 두어 편에 불과하다. 김형석 역시, 한때 그가 쉬면 한국 대중가요 음반 출시가 멈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베테랑 작곡가 겸 프로듀서이지만 뮤지컬 작곡은 1990년대 말 <스타가 될 거야>와 <겨울 나그네>, 그리고 최근의 <겨울연가> 정도에 불과하다.
뮤지컬다운 뮤지컬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들의 조합이라면 적어도 극을 짜임새 있게 만들고 무게감을 잃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관중을 사로잡는 넘버 한두 곡쯤은 뽑아내리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성과와 함정도 비교적 쉽게 예상되었다. 5월에 <엄마를 부탁해>를 올리는 것은 기획적으로 비교적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실종된 후 찾지 못하고 결국 죽는 엄마의 이야기, 신경숙의 베스트셀러의 명망, 가정의 달 5월에 개막하여 적당한 효도 선물을 고르는 20~30대 자녀들과 함께 극장을 찾는 50~60대 중노년층 관객, 이 정도의 기막힌 조합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 지닌 대중적이면서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줄거리의 힘이 워낙 튼튼하니, 연극과 음악을 능란하게 조율할 연출가와 작곡가만 결합해놓으면 이미 절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상대로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는 안정감 있는 흐름을 가지고 5월의 관객들을 펑펑 울리는 뮤지컬이 되었다. 음악이 연극과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극 전체를 끌고 나가는 뮤지컬다운 맛은 갖고 있지 않지만, 중노년 관객을 배려한 김형석의 스탠다드팝 스타일의 편안하고 선율적인 노래는 호소력이 있었다. 특히 엄마를 찾지 못한 가족들의 후회로 시작하여 저승길로 떠나는 엄마의 노래로 이어지는 4곡 정도의 흐름은, 중노년 감수성에 호소하는 편안하고 쉬운 음악으로 작곡되어 관객의 누선을 자극했다.
구태환의 연출은 뮤지컬적인 아기자기함과 역동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가끔 ‘엄마의 한글 공부’ 장면의 한글 인형들의 춤처럼 난감하게 민망한 장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극 같은 점잖은 안정감을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엄마 역의 김성녀의 연기와 노래는 매우 주효했다. 착한 엄마 역으로는 좀처럼 캐스팅되지 않는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와 노래, 몸짓 등에서 모두 중대극장 무대를 충분히 장악하는 에너지를 발휘하였다. 선한 인물형이 흔히 드러낼 수 있는 경직됨과 오버 액션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전라도 사투리로 질기고 단호하며 능청스러운 남도 시골 엄마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김형석의 선율을 국악적 시김새로 소화해낸 넘버들은, 그 캐릭터를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런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애초에 예상했던 단점을 너무도 분명하고 뚜렷하게 지닌 작품이었다. 그것은 바로 원작의 각색 과정에서 배려해야 하는 것을 놓친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신경숙의 원작 소설은 참 영악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글도 못 배운 시골 색시로 평생 바람둥이 남편 수발하고 자식 먹여 키우는 것에 전념하며 늙어간 엄마, 자식에게 늘 미안해하며 늙고 병들어 불편한 몸으로도 시시때때로 음식 장만하여 서울의 자식들에게 부쳐야 속이 시원한 엄마, 그런 엄마를 귀찮아 하다가 결국 뇌졸중 후유증을 앓는 엄마를 잃어버린 후에야 가슴이 찢어질 듯 후회하는 가족들, 이러한 기본 줄거리는 너무도 통속적이고 뻔하며 감상적이어서 일일이 입으로 옮기기도 민망할 지경의 내용이다. 1960년대부터 영화와 텔레비전 등에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신선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은 여전히 눈물을 뽑아낼 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눈물의 성감대를 너무도 직통으로 쑤셔대는 것이 다소 민망하다 싶을 정도이지만, 바로 이 이유로 이 소설은 높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만이라면 아마 평단의 반응은 싸했을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상투적 줄거리를 우려먹고 있어야 하냐고, 거룩한 모성의 신화를 반복 재생산하는 작품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신경숙은 여태까지 소설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2인칭’의 시점을 시도하여 소설에 긴장을 일으킨다. ‘나의 엄마는’ 또는 ‘그녀의 엄마는’이라고 쓸 대목을 ‘너의 엄마는’이라고 씀으로써, 이 뻔한 통속적 이야기가 독자 자신의 것임을 환기시킨다. 작품의 중반부는 실종되었을 때와는 다소 다른 차림으로 자녀들의 옛 주거지에 나타난 엄마를 찾아다니는 자식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현실과 추억, 환상을 묘하게 엉키도록 만든다. 그리고 소설 종반부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승을 떠나가는 엄마가 드디어 ‘박소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자식과 남편에게는 드러내지 않았던 엄마의 욕망과 꿈, 비밀 등을 드러낸다. 이러한 몇 가지 요소로, 이 소설은 통속성, 모성의 신화에 대한 맹목적 반복 등의 비판을 살짝 넘어서면서, 까칠한 독자들로부터도 비교적 우호적 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 독자와 진지한 독자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는 양수겸장의 방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통속성을 넘어서게 만든 요소들이 모두, 매우 소설적인 장치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연극, 뮤지컬로 각색할 경우 까딱 잘못하면 이런 참신한 요소들은 모두 잃어버린 채, 죽는 엄마와 죄책감 느끼는 자식이라는 통속적 내용으로만 남게 되기 십상인 것이다.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는 바로 그 함정에 여지없이 빠져 있는 작품이다. 소설적 장치에 기대어 있던 참신함과 의미들을 뮤지컬로 살려내려면, 연극적이고 뮤지컬적인 형상화 방식으로 의미 있는 긴장감을 만들어내야 했지만, 그런 시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원작 소설의 참신함은 모조리 소거된 채 통속적 내용에 기댄 중노년용의 상투적인 연극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묵직한 문제의식의 본격 연극을 다루어온 연출이어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으나, ‘역시나’였다. 의미화를 위한 긴장감은 어디에서도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공연에 익숙지 않은 중노년 관객을 겨낭한 것인데 그리 큰 기대를 할 수 없다고, 1990년대에 인기를 모았던 악극보다는 낫지 않냐고 자위하지는 말자. 적어도 1990년대 중반 김성열의 악극 <홍도야 우지마라>는 이 작품보다 훨씬 강한 연극성과 음악극의 아기자기함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나이 또래의 중노년 엄마 관객들이, 성년이 된 딸과 함께 발랄한 과거를 찾는 <맘마미아>나, 폐경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경쾌하게 객관화하는 <메노포즈> 같은 작품에 열광했음을 기억해 보라. 엄마 관객들이 엄마 죽는 청승스러운 이야기에 눈물은 흘리지만, 그것이 그렇게 짜릿하게 재미있어서 운 것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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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3호 2011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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