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오만석이 제일 많이 언급한 단어는 아마 ‘부담’이었을 것이다. 7년 만에 서는 <헤드윅> 무대, 그리고 그의 이름 앞에 놓인 ‘오드윅의 귀환’, ‘<헤드윅>의 레전드’라는 수식어들 때문이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말들이지만 누군가의 좋았던 추억을 깨뜨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덕분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새로운 연출, 새로운 해석을 더해 선보일 자신의 무대가 궁금하다는 오만석. 다시 무대로 돌아온 ‘오드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드디어 다시 <헤드윅>으로 돌아왔다. 감회가 새롭겠다. 대본을 다시 읽다가 깜짝 놀랐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웃음) 이걸 내가 어떻게 했나 싶더라. 노래 가사도 많이 잊어버려서 다시 외워야 하고 생각보다 할 게 너무 많더라. 벌써부터 힘들다.
에이, 그래도 초연 때만큼 힘들까.
확실한 건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부담된다는 거다. 초연 때는 겁이 나서 안 하려다가 ‘이왕 하기로 한 거’ 하면서 멋모르고 부딪쳤는데, 지금은 ‘어휴, 이걸 내가 어떻게 했나’ 싶다. 그래서 먼저 한 달 전부터 축구를 비롯해 낮에 하는 야외 운동을 다 끊었다. <헤드윅> 끝날 때까지는 햇빛 받는 근육 운동은 자제해야 할 것 같더라.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호텔 체크아웃 하기 전에 마음 좀 가다듬어보자며 헤드윅 모드로 돌아가 왁싱을 했다. 호텔방에 있는 면도기로. 근데 한쪽 다리털 미는데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거다. 내가 왜 하필 그때 그런 생각을 한 건지…. 카운터에서는 내려오라고 전화 오지, 반바지 입고 짝짝이 다리로 다닐 수는 없지, 마음은 급한데 면도기는 안 들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피까지 봤다.(웃음)
그러다 다이어트 얘기까지 나오는 거 아닌가.(웃음)
그렇지 않아도 슬슬 시작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아침, 점심 다 굶었다. 근데 먹는 거 참는 것보다 좋아하는 술을 ‘3일씩이나’ 못 마시고 있어서 더 괴롭다.
<헤드윅>이 초연된 지 벌써 7년이나 지났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당신이 연기했던,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인 그래서 더 슬퍼 보였던 헤드윅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말이다. 당시 ‘조승우 보러 갔다가 오만석에 반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드윅의 무대에 매료된 관객들이 많았다.
괜히 다시 출연해서 좋았던 추억을 다 깎아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들도 너무 부담스럽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콘서트 때 마흔 전에 다시 하겠다고 얘기한 것도 있지만, 지금쯤이면 뭔가 다른 무엇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올해 제안받은 뮤지컬이 몇 작품 있었는데 <헤드윅>을 거부하지 못하겠더라. 알지 못한 사이에 나 스스로 그 무대를 갈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이끌리듯이 여기까지 왔다.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의외의 행보다.
전부터 제안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즐겁고 싶어서 시도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비교적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이 일을 하는 건데 지난 공연은 정말 너무 힘들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괜히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일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
<미녀는 괴로워>를 얘기하는 건가. 사실 그 작품에서 이름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해졌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 같다. 왜, 사람을 볼 때도 키, 얼굴, 몸매 등 다른 기준으로 보지 않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이 좋아서, 인맥 때문에,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이 작품이 잘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정한다. <내 마음의 풍금>을 연출하면서 이름 있고 기대되는 배우들을 섭외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작품은 좋다고 하지만 재공연이다보니 막상 도전은 안 하려고 하더라. 나라도 잘 만들어진 창작뮤지컬이 재연할 때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시기에 <미녀는 괴로워>가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일 거라고 해서 거기 일조하고 싶었다. 막상 해보니 쉽지가 않더라. 좋은 공부가 됐다. 인생 공부도 많이 했고.
그럼 이번 <헤드윅>에는 어떤 기준이 작용했나. 모든 게 다 섞여 있다.(웃음) 인맥과, 배우로서의 도전 의지와, 작품에 대한 애정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정… 뭐 다 들어간 선택이었다. 그 모든 걸 생각하다보니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배하게 된 거고 그러니까 그냥 이끌린 거 같다.
사람 좋아하고 잘 챙기는 사람이라는 건 이미 유명하다. 연출가로 배우들을 만날 때에도 득이 많을 것 같다. 뮤지컬 <즐거운 인생>으로 연출 데뷔할 때 시기적으로 고민은 없었나.
학교 때부터 연출을 해왔고 관심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땐 무대뿐만 아니라 방송과 영화 등에서도 바쁘게 활동하던 때가 아니었나.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왜 그때 안 했을까’ 후회하는 것보단 그냥 하고 싶을 때 해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일단 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는 편이고. 또 사실 배우로 잘 나가봐야 얼마나 더 잘나가겠나. 아무리 해도 ‘한류 스타’, ‘톱스타 A군’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닌 사람이다. 또 그렇게 사는 인생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신비주의로 지내다가 대형 작품 하나씩 하고 인사 다니는 게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다. 지금도 나는 충분히 내가 기대했거나 의도했던 것보다 필요 이상으로 노출되고 알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인생>은 비록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재밌는 작업이었다. 후회도 없고 오히려 만날 때마다 언제 재공연하냐고 물어봐 주시는 배우, 스태프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당신에게 <헤드윅>은 어떤 작품인가.
‘도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자, 답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준 작품이다. 공연으로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고 또 치유받을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한 공연이기도 하고. 공연을 마칠 때면 내 안에 뭔가를 다 비워내고 새로 채우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분장실에 들어가 10~15분 정도는 거의 진공 상태처럼 그냥 누워 있어야 했고. <왓츠 업>에 나왔던 대사처럼, 작은 구멍으로 다 쏟아내고 박수 소리로 잠깐 채워놨다가 다시 또 쏟아내는 그런 느낌들을 경험하게 해줬다.
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려고 연습 기간이 그렇게 힘들었나보다.
아무래도 트랜스젠더니까 성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도 필요했고, 록커니까 록 음악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록 음악에 문외한이었다는 거다. 록 발성도 아니었고. 헤드윅은 록을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체화해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록은 투, 포에 박수를 쳐야 하는데 나는 원, 쓰리에 박수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걸 몸속에 녹아들게 하는 것도 정말 힘들었는데 트랜스젠더의 감성으로 무대에 서야 하니까 더 어려웠다. 다행히 연극 <이> 등을 하면서 섬세한 감성을 뽑아내는 훈련이 어느 정도 되어 있었지만 몸짓이나 감성까지 다 새로운 것들을 집어넣어야 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바(Bar)에 가서 그들과 술 마시면서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관찰도 열심히 했고. 결국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이었지만 그게 참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헤드윅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려 했고 그걸 관객들에게 과연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컸다. 그냥 할 게 너무 많았던 거다. 노래 연습하면 리듬 못 타, 얼굴은 까맣고 근육질인데 요염하게 표현해야 해, 다이어트도 해야 하고, 블랙 코미디를 우리 식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철학적인 이야기는 또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전달해야 하나…. 산 너머 산이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면서 놀랄 때도 많았겠다.
정확한 접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Wig in a Box’가 그랬다. ‘루터에게 버림받고 이혼까지 당한 빈털터리 여자’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볼 때 울컥 쏟아지는 감정들이 있다. 그런 접점을 느낄 때면 그냥 감사하다. 감정적으로 와 닿지 않는데 억지로 만들어서 연기를 하는 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형태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연기를 가둬야 하니까.
그런 경험들이 있었나.
많았다. 특히 군대 가기 전에 학교에서 한 작품들은 거의 다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느껴져야 내 식으로 해볼 텐데 오지를 않으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하긴 해야겠고, 뭔가를 흉내 내는 나를 느끼면서 비참함을 많이 느꼈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오면서 자연스럽게 깨졌다. 군대라는 곳이 함부로 감정을 들춰서는 안 되는 억눌린 생활을 해야 하지 않나. 그동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배우다가 반대로 그걸 참아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한 거다. 에너지를 모아놨다가 탁 쏟아내면 그 힘이 엄청나다. 똑같이 대본을 읽고 대사를 하는데도 뭔가 감정의 폭이 넓어졌구나 싶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더라. 연기라는 게 계단처럼 한 단계 한 단계 느는 게 아니라 답보 상태로 머물렀다가 한 번씩 ‘탁’ 하고 점프하는 것 같다.
이번 공연은 김민정 연출가의 지휘로 연주된다. 이미 경험한 작품이긴 하지만 연출가의 해석에 따른 변화가 없지 않을 거다.
물론이다. 큰 맥락이 변한 건 아니지만 조금씩 변화가 있다. 새로운 시도들도 재밌고 좋다. 일주일 정도 대본만 가지고 분석하고 이야기하고 다시 셋업 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우선 무대 활용이 달라질 것 같다. 프로젝션이라든지 그런 사항들이 덧칠될 것 같고, 대사들도 변화가 있다. 조금 애매했던 부분들은 더 깊게 들어가고 빼놓고 날렸던 부분들은 되살렸다. 아직도 다 풀리지 않았지만 계속 얘기 나누면서 작업 중이다.
호흡은 잘 맞나.
작품으로는 처음이지만 우린 한예종 동기다. 누나는 연출과 1기, 나는 연기과 1기. 학교를 같이 다녔다. 물론 군대 간 사이에 졸업했지만. 내가 동기여서 잘 아는데 그 누나가 학구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 서울대 출신이고 우리 학교에서 4명밖에 안 뽑는 연출과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방향성을 꾸준히 준비하고 제시해주면서 배우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준다. 초연 때와 비교해 호흡이나 템포가 달라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들을 제시해주니까 생각할 여지도 많고 더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 반갑고 재밌다.
함께 출연하게 된 박건형은 어떤가. 워낙 마초적인 성향이 강한 배우라 캐스팅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다.
상남자 맞다. 하지만 집요함이나 섬세함은 헤드윅과 많이 닮아있다.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도 연습실에 오면 힐부터 신는다. 그런 열정들은 어느 헤드윅 못지않기 때문에 충분히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건 나와는 확실히 다른 색깔의 헤드윅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거. 난 수다쟁이 아줌마 스타일이지만 건형이는 시니컬하면서도 철학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새로운 헤드윅이 될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서 어떤 모습의 헤드윅을 보여주고 싶나.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다. 초연 이후로 <헤드윅>이 시즌제로 공연되면서 작품 자체가 브랜드화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쁘게 말하면 본질에서 조금 벗어나 가볍고 예쁜 쇼 위주의 공연으로 변질된 것 같다고나 할까. 웃음으로 가장한 숨은 이야기들이 많은 작품이다. 조금 퇴색됐던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꼬집어줄 수 있는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지금은 그게 제일 큰 바람이다. 아, 관객들이 공연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고 공연장을 찾으시면 좋겠다는 얘기도 꼭 하고 싶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만석이 생각하는 <헤드윅>은 과연 어떤 작품인가.
글쎄, 그러고 보니 한번도 그런 얘기를 해본 적 없는 것 같다. <헤드윅>은 그냥 나같이 생긴 사람이, 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가발 쓰고 여자 옷 입고 나와서 노래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처음에는 헤드윅에 나를 맞추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내 안에 있는 오욕칠정을 끄집어내서 나만의 헤드윅을 만들어가게 되더라.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 않나. 실제로 내가 다혈질인지, 심사숙고 형인지, 즉흥적인지 정확하게 판단이 안 선다. 그때그때 너무 다른 사람이다. <헤드윅> 역시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작품인 것 같다.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7호 2012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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