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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대장금>의 강태을 [No.69]

글 |배경희 사진 |심주호 2009-06-22 7,569

어떤 무대도 두렵지 않은 노력가

 

선 굵은 외모로 선 굵은 캐릭터를 맡아 왔던 그가 올해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할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쪽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그리고 다음날 <대장금>을 보러 갔을 때, 전에 봤던 나쁜 남자 돈 주앙은 없고 오로지 강직한 충신 조광조만이 그 무대를 빛내고 있어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 정도의 변신이라면 그에게 로맨틱 코미디가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든 모습들이 진짜 연기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벌써부터 그가 보여줄 로맨티스티가 기대됐다.

 

 

먼 땅에서 시작된 배우 인생

‘준비된 신인배우’라는 수식어로 설명되곤 하는 강태을은 일본 극단 시키에서의 활동을 제외하지 않는다면, 신인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소개되는 편이 맞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극단 시키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한, 다소 특이한 이력을 지닌 그는 그곳에서 이미 손에 꼽을 만한 작품들-<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라이온 킹>, <캣츠>-에서 주요한 역을 맡아 출연했다. 가수를 꿈꿨으면서도 막상 그 기회를 잡았을 때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순히 마음을 돌렸던, 가장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가 어쩌다 저 멀리에서 뮤지컬 배우로 삶의 제2막을 시작하게 됐을까.
그의 배우 인생은 ‘뮤지컬에 대해서 무지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접한 작품으로 뮤지컬에 눈을 뜨게 됐고, 이내 노래를 부르면서, 연기도 하도, 춤까지 춰야하는 뮤지컬에 매료됐다’는 가장 보통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호기심으로 지원한 젊은 연극제 <페임> 오디션에 통과하면서 뮤지컬에 막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김효경 교수는 그에게 극단 시키 오디션을 볼 것을 권유했다. 서울예대 연극과 34명 중 한 명으로 참가한 오디션에서 합격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3년이 걸리든 5년이 걸리든, 배워서 올 수 있는 것은 다 배워오겠다’는 각오였다. 국내 무대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에게 극단 시키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었고, 배우들의 천국이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그에게 체계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은 뮤지컬 배우로 첫 단추를 꿰기에는 더없이 적합했다. 매일매일 성악, 발레와 재즈 수업을 들으면서 어떤 배역으로 어떤 무대든 오를 수 있도록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종일 훈련을 했다.
외국 배우여서 특혜를 받았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라서 감내해야 하는 시간들은 그를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너는 한국 사람이라 춤을 못 추는구나” 그런 말을 듣는 날에는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춤을 췄다. 엉덩이가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 쾌감은 그를 지독한 연습 벌레로 만들었다. “일본에 갈 때만 해도 춤을 전혀 못 췄어요. 안무 수업을 듣다 보니까 춤에 흥미가 생겨서 <아이다>의 전문 댄서 역할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오디션에 통과하긴 했는데 저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전문 댄서였으니까, 제가 한참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면 그 다음에 맛볼 수 있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 불가능할 거라고 말했던 것을 오로지 연습을 통해서 어느 순간 딱 이뤄냈을 때의 그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짜여진 틀에 맞춰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룰 것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에서 갈증을 느꼈다. “약속만 잘 지키고 적당히 공연을 하면 월급을 받는, 패턴 속에서 제 자신이 너무 딱딱해져 가더라고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으니까 연기자로서의 고민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았고.” 타고난 자유분방함에 대한 그리움과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줄 오아시스가 절실했다. 하나둘씩 돌아가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그래도 그는 마음을 잡고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캣츠>의 멍커스트랩을 끝으로 본래의 제 고향,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이다’라는 믿음 하나로, 처음 한국을 떠났던 그날처럼 아무런 주저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극단 시키의 배우가 아닌 배우 강태을로
어제와 오늘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고, 전부 새롭게 시작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안에 켜켜이 쌓아 올렸던 공든 탑이 사라질 리 없었다.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공연 포털 사이트에서 오디션 공고를 보고 지원한 <돈 주앙> 공개 오디션에서 당당히 타이틀 롤을 거머쥐면서 관심이 모였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그래서 더욱 필요했던 강하고 남자다운 이미지였기 때문에 그가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 많은 기대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의 가능성을 단번에 알아차려준 이지나 연출을 만나, <돈 주앙>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신념으로 우유부단한 왕을 지키는 조선 충신 조광조와 권위적인 괴짜 과학자 프랑큰 퍼터 박사로 관객을 먼저 만나게 됐다. “이지나 선생님이 네가 극단 시키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딪히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록키 호러 쇼>를 공연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제일 신기했던 건, 한국 관객들은 박수를 통해 바로 바로 답을 한다는 거였어요. 배우들이 잘하면 박수 소리에서 ‘잘했다’는 것이 느껴져요. 근데 별로면 박수가 나오긴 하는데, 그 소리가 ‘그래 뭐 그 정도면’ 이렇게 들리죠.(웃음)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전달이 돼요. 관객들을 더 이해하고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겠죠.” 그는 ‘제아무리 변신을 한다 해도 그 깊이는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내 모습과 가장 어울리는 작품’을 찾는다고 말했다. 올해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해 볼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아마 자신이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로맨티스트를 찾아 무대에 오를 것이다.


뮤지컬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첫 오디션에서 ‘고향의 봄’을 불렀다는 이야기에는 웃음이 났다. 자칫 무대가 아닌 앨범이나 텔레비전 속에서 먼저 만날 뻔한 그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뮤지컬과의 인연은 우연보다는 필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수를 준비하셨던 할아버지와 배우 겸 연출가로 활동하신 아버지. 타고난 재능과 그에 비례하는 노력으로 그 누구보다 올 한해를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보낸 그가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신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작 자신은 “한국에 돌아와서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며 머쓱한 채로 웃었지만, 운이라는 것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지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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