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소설이었지만 완성은 영화였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둘러싼 분단의 비극은 이병헌과 송강호,
그리고 이영애의 연기를 통해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됐다.
그래서 소설을 무대로 옮긴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는
원작을 토대로 하면서도 스크린 속 인물들의 이미지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더블 캐스팅된 배우들은 차별화된 연기를 통해
‘그날 밤’의 이야기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다.
지그 베르사미 임현수 vs 이정열
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베르사미는 중심적인 역할임에도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익숙한 영화적 각색 대신 베르사미의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원작의 설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소설은 거제도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스위스로 망명한 베르사미의 인민군 아버지 이야기가 예의 ‘DMZ 사건’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원래 주인공이었던 베르사미를 되살린 뮤지컬은 DMZ 사건의 뒤에 있는 분단의 비극을 그의 가족사와 엮어 새롭게 풀어낸다.
지난해 워크숍 공연부터 참여해온 임현수는 딱 부러지는 원칙주의자 베르사미를 보여준다. 그는 조금의 농담이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수혁과 오경필 등 남북한의 군인들이 진술하는 그간의 사연이 앞에서 진행되는 동안, 임현수의 베르사미는 철저히 이 이야기의 바깥에 머무른다. 때문에 그는 전반부에서 종종 해설자나 방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차례의 회상이 반복되는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는 거의 배경처럼 그대로 앉아 있다. 수사관으로서의 직분과 제3국 군인이라는 중립성을 엄격히 고수하는 그에게서는 냉철한 이성이 유독 돋보인다.
이정열의 베르사미 역시 완고해 보이지만, 후반부에서 밝혀질 자신의 고민과 번뇌가 1막부터 표정에 가끔 담긴다는 점이 다르다. DMZ 사건의 진실이 앞에서 재현될 때 뒤에 앉은 그는 앞의 인물들과 그 시간을 함께하듯 표정을 계속 변화시킨다. 자잘한 애드리브도 많다. 가령 김수혁이 오경필과 정우진에게 선물을 전해주는 회상 신에서 그들의 뒤를 배회하다 자연스럽게 정우진의 옆에 앉아 카라멜을 건네받는 디테일은 그만의 것이다.
한편 배경에 머물던 베르사미가 전면에 나서는 부분은 극 전반을 지배하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그마저 삼킬 때이다. 중립국 국적의 베르사미지만 그의 아버지인 인민군 소좌 김형우와의 혈연이 그를 흔들리게 한다. 이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 베르사미가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대역하는 포로수용소 장면이다. 임현수는 혈육 살해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김형우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한국에 대한 자신의 강박적인 거리 두기를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반면 이정열은 베르사미보다는 김형우의 입장에서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하는 데 주력한다.
모든 상황이 정리된 결말에서 두 베르사미는 사건의 진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한다. 임현수는 이때도 특유의 딱딱한 인상을 유지하며 끝까지 냉철한 조사관의 이미지를 이어간다. 반면 이정열은 분단의 비극을 관객에게 환기시키듯 살짝 격앙된 모습으로 웅변한다.
김수혁 정상윤 vs 강정우
극 속에서 김수혁은 군인보다는 단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평범한 남한 청년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어리바리한 일병(회상 시점)에서 느물거리는 상병(현재 시점)까지의 시간을 통과한다. 정상윤과 강정우는 군기 빠진 상병이라는 점은 같지만 표현 방식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능글맞고 깐족대는 정상윤의 김수혁은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의 모습이고, 강정우는 허풍이 심한 일병의 느낌이다. 특히 시종일관 촐싹대고 방정을 떠는 정상윤은 북한의 ‘전사’와 대비되는 평범한 남한 청년을 잘 묘사한다. 오경필과 정우진 일당을 만나게 되는 지뢰 신에서의 그는 전혀 군인답지 않은 겁쟁이의 극치를 보여주며 웃음을 자아낸다.
상대적으로 강정우의 김수혁은 투박하다. 김수혁이 원래 지니고 있어야 할 허세나 코믹한 허당 기질이 강정우에게는 종종 실종되거나 의도한 만큼 발휘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오히려 진짜 군인 같다. 정상윤이 큰 키와 다소 비대한 몸집, 일반인 헤어스타일 때문에 예비군이나 카투사의 이미지에 가깝다면, 가무잡잡하고 마른 체격의 강정우는 실제 복무 중인 군인처럼 보인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북한군 동현 때부터 그는 비주얼적으로는 군인의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에서 김수혁은 베르사미의 말처럼 자신의 머릿속에 장착된 ‘반공 이데올로기’의 폭탄을 기어이 작동시킨다. 오발탄 소리가 그 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김수혁은 거기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한다. 형제애의 휴머니즘 드라마가 피아의 대치를 담은 비극으로 전환되는 것은 이 순간이다. 전반부에 겁 많은 청년의 모습이 강했던 정상윤은 이 지점에서 충격의 여파를 못 이긴 듯 반 실성 상태에 이른다. 같은 장면에서 강정우는 울음을 터트리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오경필 최명경 vs 이석준
오경필은 영화에서는 노회한 중사였다. 뮤지컬에서는 전사(사병) 계급인 상등병으로 내려왔지만 늙수그레하고 노련한 이미지는 그대로다. 역시 워크숍 공연 때부터 같은 역으로 참여한 최명경은 스크린 속 송강호의 이미지와 자주 겹쳐 보인다. 그는 살벌한 전사의 이미지보다 사람 좋은 아저씨의 느낌이 강하다. 눈빛에서도 적들을 척살하던 전투 기계가 아니라 적당히 인생을 달관한 직업군인 같다. 전반적으로 인간미가 넘치는 오경필이다.
이석준은 잘 웃지 않고 자주 찡그린다. 상남자 오경필이다. 극 중 설정처럼 수많은 전장을 누비던 강한 전사의 이미지가 있다. 비록 지금은 한직에 있지만 당장이라도 전투에 투입되면 곧바로 적응할 것 같은 긴장감이 배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철부지 막내 같은 남측 군인을 동생으로 대하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 모두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최명경이 그리는 오경필의 특징은 자연스러움이다. 우선 김수혁과 대비되는 북한말의 구사가 굉장히 자연스럽다. 지뢰 신에서 김수혁을 구해준 뒤 겁에 질린 그의 말투를 흉내낼 때 최명경의 대사 소화는 정말 ‘찰지다’. 노래 역시 기술적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지만 대사를 하듯 힘을 빼고 부르는 방식이 오경필의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석준의 오경필은 외모 못지않게 연기 면에서도 강력한 방점을 찍어주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 총격 신에서 총에 맞은 어깨를 표현하기 위해 오른팔을 안 쓰면서 김수혁을 보내는 장면은 노련함이 빛나는 대목이다. 또 극 결말부에 베르사미가 자신의 한국 이름을 밝히며 악수를 청할 때, 그 찰나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연기는 이 작품 전체의 방점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7호 2014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피처 | [CAST VS CAST] 진실을 둘러싼 세 가지 시점, <공동경비구역 JSA> 지그 베르사미·김수혁·오경필 [No.127]
글 |송준호 사진제공 |창작컴퍼니다 2014-04-28 4,484sponsored advert
인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