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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cene Scope] <맨 오브 라만차> 무대 디자인 [No.105]

사진제공 |서숙진 (무대디자이너) 정리 | 배경희 2012-07-03 5,241

아날로그 감성의 원 세트

 

<맨 오브 라만차>는 2005년 초연 당시 규모가 큰 국립극장을 지하 동굴의 닫힌 공간으로 훌륭하게 변신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던 공연이다. 무대디자이너 서숙진을 만나 2010년 공연 이후 2년 만에 재공연을 앞두고 있는 <맨 오브 라만차> 무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떤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연출가가 말하는 몇 개의 단어만으로 그림이 퍼뜩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물론 반대로 죽어라 고민해도 이미지가 안 잡히는 작품도 있기 마련이지만). <맨 오브 라만차>는 연출 데이비드 스완과의 첫 미팅에서 디자인이 떠올랐고,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미지가 명확해서 작업이 쉬웠던 경우다. 우리가 초점을 맞춘 작품의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지하 동굴, 다양한 레벨(높낮이), 스페인 정서.’


<맨 오브 라만차>(주인공 세르반테스가 신성모독 죄로 지하 감옥에 갇히면서 죄수들과 함께 극중극 <돈키호테>를 공연하는 이야기다)의 주 무대는 지하 감옥. 따라서 초연 무대 디자인의 관건은 광활한 국립극장에서 어떻게 꽉 막힌 듯한 지하 감옥의 느낌을 살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어떤 아이디어로 극장의 핸디캡을 극복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었던 건 별다른 고민 없이 동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지하 동굴의 모티프가 됐던 건 그랜드캐년과 요르단 동굴. 무대에서 실제 바위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스티로폼에 조각을 해서 동굴처럼 보이게 한 것인데, 이 절벽을 만드는 일이 가장 힘들었던 작업 중 하나다. 화강암 조각에 익숙한 제작소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둥글게 조각을 하다 보니 지층이 겹겹이 쌓인 듯한 느낌을 내기 위해 직접 조각을 해야 했던 것. 열선이 안 들어갈 정도로 단단한 방염 스티로폼을 조각하느라 며칠 동안 땡볕에서 고생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또한 배우들이 극중극을 하는 형식이어서 감옥 어딘가에 숨어 있다 툭 튀어나온다든가, 갑자기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든가 할 수 있게 벽 곳곳에 구멍을 뚫어 놓아야 하는 계산이 필요했다. 앞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벽이지만 뒷벽에는 다양한 통로와 계단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

 

 

 


<맨 오브 라만차> 오리지널 공연의 무대 세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스페인’ 하면 떠올리는 정열적인 느낌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굉장히 모던하고 차가운 디자인이다. 미국적인 느낌도 아닌 독일적인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공연 실황을 보면서 잘 만들어진 공연이지만 이 부분은 좀 아쉽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데이비드도 나와 같은 의견이어서 우리는 날카롭고 세련된 분위기가 아니라 스페인 정서에 가까운 거칠고 어두운 아날로그적인 분위기로 컨셉을 정했다. 이번 기회에 지면을 통해 밝히자면 관객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해바라기 신’에서 나의 애초 계획은 해바라기가 아닌 정열적인 느낌의 붉은색 꽃을 넣으려고 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꽃인 걸 알아차릴 만큼 큰 크기의 꽃을 찾지 못해서 해바라기를 사용하게 된 거였지만, 노란색이 태양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지 해바라기가 스페인 느낌에 어울린다는 반응이 많았다.


내가 <맨 오브 라만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는 무대가 아니라 배우들이 공사장에 남아 있는 잔재들을 가지고 세트를 만들어 극중극을 끌고 가는 연극적인 설정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카와 유모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에서 판넬에 커튼을 쳐서 기도 공간을 만들어주는데, 그걸 배우들이 만든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아기자기한 요소를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맨 오브 라만차>는 대극장 공연임에도 비주얼적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거나 변화를 줘야 한다는 고민 없이 과감하게 내가 평소에 지향하는 바대로 작업을 했던 작품이다. 극 중 작은 전환들이 있지만 심플한 원 세트 무대에 가까운 디자인인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세련되지 않고 아날로그적인 무대 디자인에 맞게 직접 조각을 하고, 일일이 구멍을 뚫어서 전구를 심어 밤하늘 배경막을 만들고, 수작업을 했던 그때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5호 2012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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