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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위키드>의 이정혜 [No.69]

글 |정세원 사진제공 |극단 시키(촬영 아라이 타케시 荒井 健) 2009-06-16 8,015

 

그녀, 하늘을 날다


초록 분장을 지운 이정혜는 수줍은 미소를 띠며 나타났다. 스물일곱 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작고 앳된 이 여인이, 조금 전까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중력을 넘어 하늘로 날아오르던 <위키드>의 초록 마녀였다는 사실을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撮影_ 荒井 健

 

이정혜와의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극단 시키의 <스프링 어웨이크닝> 오프닝 파티를 마치고 급하게 찾은 <위키드> 공연장은 한낮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숨 고를 겨를도 없이 자리에 앉아 금발 미녀 글린다와 초록 마녀 엘파바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두 여인의 사랑을 받는 청년 피에로를 연기하는 중국인 배우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시키 작품의 오프닝 무대에 섰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인 나로서는, 글린다와 엘파바를 연기하는 배우는 당연히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동그란 얼굴에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 시원시원하게 내지르는 가창력이 돋보이는 엘파바를 보면서 ‘일본에도 저렇게 노래하는 배우가 있구나’ 싶었다.

성숙하고 안정된 연기를 선보인 그녀가 알고 보니 한국인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막이 모두 끝난 후였다. 한국의 많은 여배우들이 욕심내는 배역 중 하나인 초록 마녀 엘파바 역을 스물일곱의 한국인 여배우가 연기하고 있었다니!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을 받은 듯했다. 기쁜 마음으로 무대 위에 선 이정혜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3년 전 <라이온 킹> 한국 공연에서 암사자 나라를 연기하던 풋풋한 새내기 배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안정된 연기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극단 시키에서 활동하는 많은 한국 배우들처럼, 이정혜도 2003년 서울예대의 극단 시키 연수단 오디션을 통해 일본을 찾았다. 연수기간 동안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시키의 체계적인 시스템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그녀에게 예정에 없던 단원 오디션 기회가 찾아왔다.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오디션을 볼까말까 고민했었어요.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어 오디션에 참가했는데 운 좋게도 합격한 거예요. 그때 제가 노래를 정말 못 했거든요. 게다가 제가 부른 노래가 배우들 사이에서 ‘시키 오디션에서 부르면 떨어지는 작품’으로 꼽히는 <레 미제라블>의 ‘I Dreamed a Dream’였어요.”

영롱한 보석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좋은 원석을 골라내느냐가 중요한 법. 50년 동안 극단을 이끌어오며 수많은 배우들을 발굴해낸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이정혜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정확히 짚어냈다.

 

2005년 졸업과 동시에 극단 시키에 입단한 이정혜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레슨과 일본어 수업을 받은 지 1년 만에 <라이온 킹> 앙상블로 데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역으로 무대에 올랐고 한국 공연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첫 공연 때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일본에서 계속 공연했던 작품이지만 한국어로 노래하니 느낌이 정말 다르더라고요.” 한국어로 공연하는 동안 이정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외국어로 공연을 하다보면 아무리 감정을 담아서 전달한다고 해도 언어에 신경을 쓰다가 놓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말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잘잘못을 알게 되니까 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었죠. 연기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어요.”

나라’로 무대에 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정혜는 눈에 띄게 성장해갔다. 노래 실력, 발성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담은 연기를 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갔다. 한국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가 주변의 염려를 보란 듯이 물리치고 <맘마미아>의 소피 역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맘마미아>의 소피는 이정혜에게 도전이었다. 한번도 연기해본 적 없는 발랄한 캐릭터인데다 일상생활에서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요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래뿐만 아니라 대사가 많은 역할이다 보니 일본어에 대한 감을 많이 찾을 수 있었어요. 소피를 연기하면서 느낀 건, 비록 제가 외국인이지만 무대에서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하면 관객들도 저를 한국인 배우 이정혜가 아니라 소피라는 캐릭터로 봐준다는 거예요. 처음으로 언어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리고 무대에 올랐고 덕분에 재밌게 공연할 수 있었어요.”

 

                                                                                                                                      撮影_荒井 健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일본어 대사 연기가 한층 무르익어갈 때쯤 이정혜에게는 꿈만 같은 <위키드>의 엘파바 오디션의 기회가 주어졌다. 2007년에 개막한 이후 <위키드>의 여주인공 글린다와 엘파바는 극단 내 최고의 일본 여배우들만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엘파바를 연기하면 극단 시키의 어떤 작품이든 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니 어느 누구도 한국인 배우가 엘파바로 <위키드> 무대에 서는 일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배우들에게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 앞에서 이정혜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엘파바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연습 한 달 반만에 기적처럼 그녀가 무대에 오르자 극단 시키의 한국 배우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극단 시키의 한국 배우들이 주로 뛰어난 가창력을 요구하는 작품들에 주/조연으로 참여해왔지만 이정혜는 가창력뿐만 아니라 연기력을 요구하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후배 배우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는 그녀이지만 “무대에 선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은 많이 힘든 것 같아요. 드라마를 끌고 가야 하는 인물이다 보니 기대치가 너무 높거든요.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아쉬워요”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무대에서 관객들과 기운을 공유하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는 그녀는 “무대에 설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제 것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제가 느끼는 것만큼 관객들도 느끼는 것 같고요. 어느 순간에서도 진실하게 제 모습 그대로, 저만의 엘파바를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제가 아닌 엘파바만을 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Defying Gravity’ 장면에서 하늘을 날 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자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웠어요. 노래하기에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거든요. 처음에는 노래하기에만 급급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제 길을 가겠다는 엘파바의 의지를 잘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제 감정도 몸과 함께 올라가요. 저를 올려다보는 관객들의 마음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날아보려고 해요” 하며 웃는다.

태어나 한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엘파바가 사랑과 우정을 느끼고 쌓아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이 아닌 공감을 주고 싶다는 이정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한국어로 엘파바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며 조심스레 마음을 내비쳐본다.

 

                                                                                                           撮影_荒井 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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