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이들에게 2년이란 시간은 참 오묘하다. 처음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한없이 길게 느껴지다가도, 끝에 다다랐을 땐 빠른 시간의 흐름에 새삼 놀라게 된다. 소집해제 후 무대로 돌아온 신성록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연극 <클로저>로 다시 무대 위에 서게 된 신성록은 첫눈에 느낄 만큼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난 2년은 그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던 순간이자 보다 사실적인 연기를 향한 깊은 열망을 심어준 특별한 시간인 듯 느껴졌다.
자신을 돌아본 시간
지난 2년간의 공백은 참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어요.
2년 동안 쉬다보니 한 발짝 물러서서 저를 돌아 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20대에 배우로 데뷔하고 나서 쉰 적이 거의 없었어요. 계속 일이 연속적으로 생겨 다작을 했죠. 그땐 나름대로 진지하고 열정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참 무작정 도전을 했다 싶었어요. 그간 제 자신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기가 부족했더라고요.
예전엔 정말 쉼 없이 달려던 것 같아요. 그런 상태에서 모든 걸 멈추게 됐으니 그에 따른 휴유증도 있었을 듯해요.
정말 무대에 서고 싶었죠. 처음엔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무당도 작두를 안 타면 그렇다는데,(웃음) 배우도 마찬가진가 봐요. 그러다 차차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이 기간이 막연히 긴 시간이 아니라 내가 차곡차곡 준비를 해나가야 하는 시간이구나!
그 사이 생활 패턴도 완전히 달라지게 됐을 텐데, 가장 그리웠던 일상은 무엇이었나요?
요즘 밤에 폭식을 하면 다음날 벌 받는 기분으로 집에서 연습실까지 걸어가요. 그동안 낮에는 항상 지정된 곳에 있었고, 저를 드러낼 때 주위의 시선 자체가 편하지 않았거든요. 이제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깐 왠지 햇살도 아름답게 느껴지고,(웃음) 한낮에 여유롭게 사람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순간들이 새롭더라고요.
이제 다시 열정적으로 달리는 건가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많았던 만큼 일에 대한 가치관도 변했을 것 같은데.
예전엔 치기 어린 맘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할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더 진지한 선택을 하려고요. 응석받이처럼 여러 가지에 도전해보는 시기는 지난 것 같아요. 앞으론 제가 잘 해낼 수 있고, 제가 지닌 예술성을 돋보이게 하는 작품을 선택하고 싶어요.
반갑게도 복귀작으로 선택한 것이 연극 무대에요. 연극은 첫 도전이라 예상외란 생각이 들지만, 어떻게 보면 정해진 수순 같기도 해요. 복귀작으로 연극을 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특별히 매체를 한정짓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제 복귀 시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작품 중에서 저를 가장 뜨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죠. <클로저>는 시기도 적절했고, 제가 배우로서 쏟아낼 수 있는 부분들이 컸어요. 워낙 재밌게 봤던 영화고, DVD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캐스팅 발표를 듣고 신성록의 <클로저>가 가장 기대되던데,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기억해요?
극장에서 영화로 봤는데, 이해가 잘 안됐어요. 그런데도 흥미롭더라고요. 맞아, 현실은 저렇지! 소름이 돋았어요. 포장하지 않은 진솔한 이야기가 피부로 와 닿아서 정이 많이 갔고요. 음악과 어우러져 전해오는 배우들의 느낌들도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구나 새삼 깨달았죠.
추민주 연출과의 첫 작업이기도 한데, 호흡은 어때요?
정말 좋아요. 무엇보다 사람 감정을 잘 분석하시는 것 같아요. 감정에 대한 섬세한 분석이 연출님의 예술성이라 생각해요. 사실 연출의 분석이 배우들에게 설득이 안 되면 참 힘들거든요. 근데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계세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한 번도 다른 생각이 든 적이 없었어요. 앞으로 또 같이 작업해 보고 싶어요.
사실 <클로저>는 보면 볼수록 새롭고 더 공감 가는 작품이잖아요. 실제로 연기를 해보면 또 느낌이 색다를 것 같아요.
연극은 영화보다 이야기가 훨씬 복잡하게 엉켜있어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가 크고, 언어유희도 굉장히 많죠. 직접 연기를 해보면서 연극의 재미도 깨닫고 있어요. 뮤지컬이 음악과 씨름하는 것이라면, 연극은 언어와 씨름하는 거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즐거워요. 매일 매일 뉘앙스나 느낌을 색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도 좋고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뭐였나요? “사랑하는 동안은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앨리스의 말도 눈에 띄던데.
좋은 대사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렵네요.(웃음) 음…작품의 마지막 즈음 앨리스가 이런 말을 해요. “보여 줘. 사랑이 어딨는데? 난 어딨는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그때 좀 공허한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살을 부비며 지냈는데, 한순간 선택으로 남남이 된다는 게 참 공허하더라고요.
댄이 겉으론 멋있긴 한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를 보고 찌질하다고 하죠. 남자가 보기에 댄은 어떤가요?
찌질하죠. 겁도 많고.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도 들어요.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멋있는 남자들이 과연 현실에서도 존재할까? 포장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게 더 치명적이기 마련인데, 댄도 그런 경우 같아요. 무언가 치유받고 싶어서 자신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계속 찾아다니는 그런 아이인 거죠. 어떻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안나와 앨리스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인데도, 댄은 그들 모두에게 끌림을 느껴요. 어떤 이유 때문이죠?
지극히 제 분석에 따르면 댄은 작가주의적인 영감을 따라가는 사람이에요.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뮤즈를 찾아서 떠나는 거죠. 따분한 부고 기사를 쓰면서 살아가는 댄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동안 특별한 뮤즈가 없었어요. 그러다 앨리스를 만난 거죠.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사이클이 다르잖아요. 그 매력에 빠져 그녀의 이야기를 책으로 완성한 거죠. 결국 책은 망하지만요. 처음엔 자극적인 것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 자극도 매일 느끼면 특별하지 않잖아요. 그런 와중에 안나라는 여자의 강한 에너지가 그를 끌어당긴 것 같아요. 댄은 안나를 통해 나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성숙한 여자의 매력을 느낀 거죠.
작품의 인물들처럼 사랑은 종종 욕망이나 집착 같은 감정으로 변질되는 것 같아요. 사랑의 변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인연이라면 그 사랑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겠죠.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른 진짜 사랑을 찾아 떠나 갈 수도 있어요. 그것이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보다 사실적인 연기로
끌림이라는 건 말로 설명하긴 힘든 감정이긴 하지만, 주로 어떤 것에 끌림을 느끼나요?
특별히 내가 무엇에 끌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너무 평범한 건 끌리지 않고. 음…잘 모르겠어요. (웃음)
그럼 질문은 바꿔서, 좋아하는 건 뭐예요? 운동을 즐긴다고 들었는데.
운동 좋아하죠. 헬스에 취미를 붙여서 하고 있고, 농구도 워낙 좋아하고, 골프도 가끔 치죠. 낚시도 좋아하고요. 운동에 관한 것들은 조금 조금씩 다 해왔어요.
그런 것들이 왜 좋았나요?
좀 남성적인 호르몬이 많아서 그런가? 자꾸 승부욕이 들고, 남자들 사이에서 뭔가 남성적인 에너지를 표출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런데서 오는 재미를 즐기는 게 아닐까요?
낚시는 승부욕과는 다른 지점에 있는 것 같은데, 뭔가 극단적으로 치우치기 보단 균형잡힌 걸 좋아하는 건가요?
나름 그러려고 노력하나? (웃음) 과격하게 운동을 하다 보면 마음속에 또 치유가 필요하더라고요.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물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으면 한없이 고요함이 느껴져요. 그런 시간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필요한 것 같아요.
복귀하기 전에 다른 배우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나요?
정한이 형과 동석이를 자주 만났죠. 제가 마음이 조급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한이 형이 그런 부분에 대해 좀 더 마음을 낮추고 넓게 바라보란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동석이는 반대로 제가 조언을 해줬어요.(웃음) 이런 저런 고민이 많더라고요.
궁금하네요. 신성록은 주로 어떤 고민을 하는지.
다른 배우들과 비슷해요. 지금 서른두 살이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와 있으니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죠. 가정적으론 부모님과 동생의 일들, 일적으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인간적으론 무대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은 예술을 펼칠 수 있을까…. 지난 2년이 포괄적으로 제 인생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배우로서 지닌 예술관은 뭐예요?
연기에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사실적인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주어진 역할 안에서 좀 더 사실적인 연기를 하고 싶어요. 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사실적인 연기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배우가 있나요?
누구라고 꼭 찍어 말할 순 없지만, 그런 선배들은 무척 많죠. 극단 학전에서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선배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줬고, 저도 그들의 무대를 보면서 ‘아, 저렇게 사실적으로 연기해야 되는 구나’를 느꼈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새 과장된 연기에 익숙해져 있더라고요. 무게감 있게 보이려고 목소리에 힘도 많이 눌렀고요. 2년 동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러움 속에서 사람의 감정을 휘두를 수 있는 더 큰 에너지가 나온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나도 이제 이런 식의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럼 추후엔 어떤 역할을 맡고 싶어요? 예전엔 <렌트>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여전히 유효한가요?
<렌트>는 언제가 되도 하고 싶은 작품이죠. 그런데 이젠 특정 캐릭터를 갖고 이야기하는 건 좀 의미가 없는 것 같고요. 대신 이런 건 있어요. 제가 밝은 것보다 외로운 것들에 더 끌리나 봐요. 지금 역할도 그렇잖아요. 그렇다고 시종일관 우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밝고 행복하다가도 갑자기 확 무너지는 역할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이런 역할들에 마음이 가네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