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나 ‘최연소’로 뒤덮인 화려한 프로필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끈다. 게다가 그런 경력의 소유자가 인형 같은 외모의 엘리트 발레리나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스타 발레리나 강예나는 도도함과 우아함, 까다로움으로 상징되는 발레리나의 기의(Signified)였다. 영국 로열발레스쿨,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를 두루 거친 실력은 ‘엄친딸’이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그 조건을 충족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이 보기엔 그의 질주가 불안했던 것일까. 정상까지 다가갔던 발레 인생은 뜻밖의 무릎 부상으로 제동이 걸렸다. 은퇴의 기로에 섰던 그는 5년간의 치료와 재활 끝에 기어이 재기에 성공했고, 이듬해 한국으로 복귀해 10년 동안 자신의 발레를 펼쳐보였다. 이제 순진한 소녀부터 완숙한 여성의 삶을 아우르는 <오네긴>의 타티아나가 분신처럼 그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끝까지 ‘최고령’ 발레리나의 기록을 세운 그는 이제 곧추세웠던 발끝을 풀고 편안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삶을, 그는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다.
은퇴, 담담하다
은퇴, 축하해줘야 하나요, 위로해줘야 하나요?
축하죠, 축하(웃음). 위로받을 일이 아니에요. 축하받을 일이죠.
발레단 무용수의 은퇴는 단순히 퇴단일 때도 있고, 이직일 때도 있죠. 무대에서의 완전한 은퇴인가요?
지금 심경은 그래요. 다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어떤 계기로 제가 놓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생길 수도 있어요. ‘Never say never’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련은 없어요? 만족해요?
네, 미련 없어요. 딱 하나, <카멜리아 레이디>를 못해본 게 아쉽긴 한데, 그 정도 미련은 하나 정도 있어도 좋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생각했던 발레리나의 이상형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예술가가 아니겠죠. 다만 이 이상 더 잘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신이 저에게 수고했다고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마지막 무대에 대한 소감을 많이들 물어볼 것 같아요. 전 반대로 프로 무용수로서 첫 무대의 감상을 듣고 싶네요.
처음보다는, 지금 기억에 남는 건 <백조의 호수>를 처음 했었을 때에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 배역을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This is it!’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마지막 공연을 앞둔 지금도 똑같이 ‘This is it!’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똑같은 말이지만 상반된 의미죠.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제 끝이다’.
<오네긴>, 이제 정말 마지막 작품이네요. 이번 무대 등장은 떨리지 않을까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지난 3월에 마지막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었는데 그 전날 ‘멘붕’이 왔었어요. 마지막 무대 리허설 끝나고 집에 가는데 팔다리가 덜덜 떨려서 운전을 못할 정도였거든요. 다행히 본 공연 때는 굉장히 잘했지만, 이번에도 두고 봐야죠.
지금 머릿속엔 마지막 공연과 그 후의 계획이 공존하겠네요.
일단 지금은, 그냥 조용히 살아보고 싶어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 (뜸을 들이며) 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인 듯해요.
롤러코스터 같았던 발레 인생
‘최초’라는 타이틀이 유독 많이 붙었던 무용수죠. 하지만 ‘최초’라는 화려함 뒤에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고통도 컸을 것 같아요.
그 고통의 시간, 수많은 고난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믿어지지 않아요. 그 고통을 미리 알았다면 안 했을 것 같아요. 해낼 수 있을까, 스스로도 의심이 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극복한 게 스스로 대견해요. 참 힘들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26년의 시간 동안 가장 큰 고비라면 역시 ABT 시절의 부상이겠죠?
그렇죠. 물론 제 인생에서 큰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그곳에서 발레에 대한 철학이 바뀌었다는 것도 제게는 큰 의미에요. 워낙 출중하고 재능 있는 무용수들 사이에서 땀 흘리고 피부 맞대면서 하다 보니까 발레라는 게 어떤 예술인지 확실하게 알게 됐거든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깨달은 거죠. 제가 어떤 무용수인지도 알게 됐구요. 만약 한국에서 ‘최연소 수석무용수’로만 만족하고 있었다면 절대 몰랐을 부분이에요.
그래도 부상은 원수 같았겠죠.
치명타였어요. 제가 가야 되는 궤도가 있었다면, 완전히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버린 느낌. 하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최초나 최연소라는 타이틀도 제 의지로 된 게 아니라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에요. 선택받는 거죠. 다 자기 운명이 있는 거 같아요.
한국에 돌아와서 수많은 작품을 했죠. 청순형보다는 당돌한 캐릭터가 잘 어울렸어요.
맞아요. 지금이니까 고백하는데 제일 안 좋아하는 게 지젤이었어요. 저는 신파가 너무 싫어요. 그래서 <백조의 호수>도 사실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신파 연기를 못 견뎌 하는 스타일이에요. 특히 <지젤>의 Mad Scene(지젤이 알브레히트에게 배신감을 느껴 미쳐버리는 장면)이 있는데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신파였어요.
자신의 색깔이 제일 잘 묻어났던 작품을 꼽는다면?
이제 할 <오네긴>이 그렇구요. <돈 키호테>도 그랬어요. <돈 키호테>의 키트리는 저의 웃긴 면모를 많이 보여줄 수 있었다면, 타티아나는 어렸을 적 저의 순수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까지 다 보여줄 수 있는 대서사시 같은 작품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웃긴 면모’라, 유머 감각이 좀 있나봐요.
그렇게 안 보여도 웃음이 많은 편이에요. 슬픈 상황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사람이에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성격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슬픈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다 보면 우울증이나 조울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데.
억지로 웃으면 진짜 웃음이 안 나와요. 너무 슬플 때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참’ 하고 웃다 보면 인생은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예술을 제대로 하다 보면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 되는 게 있어요.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전혀 없을 수 없듯이. 희극 발레를 해도 우울한 기분을 안고 가고, 비극 발레를 해도 내면에는 경쾌한 마음을 같이 가지고 가야 해요. 한 정서로만 할 수는 없어요.
채플린의 연기처럼,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과 비슷하군요.
맞아요. <심청>의 아버지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저는 울지 않아요. 오히려 미소를 짓죠. 대놓고 슬퍼하는 것보다 그렇게 양가적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니까요.
그런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표현이야말로 연륜이 쌓인 무용수의 장점이죠.
저는 그런 걸 영화나 책에서 많이 배웠어요. 그 당시엔 사람의 심리를 알고 싶어서 본 건데 발레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네요.
사람이 고팠던 것 같기도 하고.
어렸을 때 줄곧 혼자 지내와서 그렇지 않나 싶어요. 친해질 틈 없이 이별만 하다 보니까 공허함을 어떻게 메꿔야 할지 몰라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거죠.
아까 말씀이 이제 납득이 가네요.
그런데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어째 성찰보다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네(웃음).
인생 2막, ‘여자 강예나’의 시작
올해 초부터 무용복 쇼핑몰(‘예나라인’)을 런칭하면서 사업가로 변신했죠.
작년 3월부터 시작해서 1년 가까이 준비했어요. 상표 등록하고 디자인, 옷감 구매, 제작, 포장, 판매까지 다 알아봤죠. 해외 발레단 지인들도 좋아해서 배송도 직접 하고 있어요.
사업은 좀 의외인 듯 보이기도 해요.
저도 홈쇼핑 안 하고 인터넷 쇼핑몰도 이용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웃음). 예전에 제가 의상 코디를 잘했던 게 떠올랐고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용수가 공연복보다 몇 배나 많이 입는 게 무용(연습)복인데 그건 저희에게 ‘두 번째 피부’거든요.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해야 하는 무용수에게 때때옷처럼 예쁜 무용복의 산뜻한 느낌은 기분전환이 돼요.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로 대우받다가 일반인이 돼서 세세한 일까지 직접 해보니까 어때요.
소소한 행복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제가 재봉질을 배우는 곳이 있는데 주부들 사이에선 정말 사소한 일상의 대화가 오가더라구요. ‘어제 김치를 담았는데 새우젓이 아니라 다른 젓갈을 넣었더니 독특한 맛이 나면서 남편이 좋아하더라’, 이런 얘길 30분을 하는 거예요(웃음). 발레보다 더 큰 세상이 있고, 반찬 하나로도 이렇게 사람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 세계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생활이 바뀌면 역시 몸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겠죠.
11살 때 발레를 시작해서 그 뒤로는 일반인의 몸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 느낌을 몰라요. 아무리 운동을 한다고 해도 몸은 변할 테고, 거기서 오는 우울함은 분명 있겠죠.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워낙 규칙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루틴을 크게 벗어나지 않게 살 거 같아요. 들쑥날쑥한 생활보다 시간대별로 계획을 짜서 실천할 생각이에요. 계속 정신적, 신체적으로 도전을 하면서 자극을 줘야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요. 수영, 승마….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않네요. 일반인이 좋은 게 느슨한 생활 때문인데.
처음부터 확 풀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씩 변해가려구요. 사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있는 걸 제일 좋아해요(웃음). 누워서 책을 보거나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데, 발레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습관을 버려야 했어요. 발레는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제 스스로를 닦달하는 것에서 출발하거든요. 그걸 한꺼번에 다 받아들이면 죽을지도 몰라요(웃음).
이제부터 ‘여자 강예나’로서의 측면이 더 커지겠죠. 기대되나요?
그럼요. 느슨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제 자신도 기대가 되고, 연애를 하더라도 집에 빨리 가야 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안 해도 되는 상황도 좋을 것 같고. 다른 집중할 것도 생기겠죠, 그 집중을 한다는 게, 아무 것도 안 하는 ‘정적’ 상태일 수도 있어요.
이거 왠지 절이라도 들어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웃음).
돌이켜보면, 발레는 무엇이었나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산 남편 같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26년을 살았는데, 이제는 합의이혼하는 느낌?(웃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헤어질 수도 없고, 미워도 살다보면 좋아지기도 했어요. ‘그동안 수고했다’, ‘너 갈 길 잘가라’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죠. 그렇게 함께했던, 제 첫 번째 남편이죠.
아무쪼록 ‘두 번째 남편’과는 더 행복한 삶이 되기를.
하하, 감사합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8호 2013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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