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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OPLE] <파가니니> 박규원​, 다시 찾은 꿈 [No.186]

글 |배경희 사진 |이배희 2019-03-26 9,303

<파가니니> 박규원, 다시 찾은 꿈

 

<트레이스 유> 출연과 시상식 후보에 오르기.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두 가지는 박규원에게 이룰 수 없는 꿈같은 희망 고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지난 반년 사이 두 가지를 모두 현실로 이뤄냈다는 사실을 안다. 불안을 동력으로 나아가는 사람, 박규원의 이야기.


 

무대라는 꿈을 발견하기까지 

서울 공연에 앞서 대전에서 먼저 개막했을 때 좋은 반응을 얻었죠.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어요? 저희 공연의 가장 큰 무기는 파가니니 역을 맡은 콘 형의 바이올린 연주 장면이에요. 공연 맨 마지막에 ‘악마의 콘서트’가 시작되는데, 대전에서 리허설할 때 그 장면에서 정말 저희 모든 배우들이 울었어요. 특히 ‘라 캄파넬라’ 부분에서요. 형의 연주 장면을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바이올린니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에서 배우가 실제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는 게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무대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는 캐릭터를 꼭 해보고 싶어요. 그런 날이 오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이 작품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제작사 HJ컬쳐 이사님이 제가 출연한 <최후진술>을 보셨대요.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두 작품을 병행해야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다른 배우가 안 나타나면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다시 연락을 주셨어요. 아직 대본이 나오기 전이라 작품 정보가 부족했지만, HJ컬쳐가 제작하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던 터라 출연하게 됐죠. 예술가의 이야기를 많이 다뤄서 평소 궁금했던 곳이거든요. 
 

아킬레라는 역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뭐예요? 우선은 파가니니에 대해 찾아봤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자료가 많지 않더라고요. 당연히 파가니니의 아들 아킬레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없었고요. 그래서 작품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아킬레를 표현하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킬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아들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희 아빠를 떠올리면서 방향을 찾아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생각도 했어요. 극 중 제 아버지인 콘 형한테 애정을 갖자. 여담이지만, 연습 초반에 제가 <트레이스 유>를 공연하느라 머리가 노란색이었는데, 콘 형도 노란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둘이 얼굴형도 비슷하고 묘하게 닮아 보였던 것 같아요. 
 

악마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파가니니의 이야기에 특히 공감한 부분이 있나요. 파가니니가 악마라 불린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능력 때문이에요. 파가니니는 단지 음악가로서 음악을 너무도 사랑할 뿐인데, 주위 사람들은 그가 그냥 음악을 사랑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죠. 저도 음대를 나와 음악을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파가니니한테 더욱 연민이 가더라고요. 누군가 너무 월등하게 뛰어나면 시기나 질투를 하는 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예전에 서울예술단에서 배우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같이 출발했던 형들이 어느 순간 빠르게 한두 계단씩 올라가서 점점 멀어진 적이 있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니 제가 질투 아닌 질투를 했던 것 같아요. 같이 있으면 비교가 되니까 괜히 형들을 멀리했던 거죠. 질투는 우리한테 너무 익숙한 감정이다 보니 매번 공연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아까 잠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박규원은 어떤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는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빠의 설교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요. 아빠가 사람들한테 술이나 담배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들인 제가 그런 행동들을 할 순 없잖아요. 다 크고 보니까 굉장히 착한 아들이었더라고요. (웃음) 사실 처음에 예고에 가고 싶어 했을 때 어머니는 조금 고민을 하셨어요. 학비가 만만치 않은데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을까 걱정하셨던 거죠. 그런데 아빠가 만약 제가 시험에 붙으면 어떻게든 할 테니까 일단 시도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 결과, 예고에 들어가 지금 이렇게 뮤지컬을 하게 됐고요. 아빠는 지금껏 항상 저를 위해 사셨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빠를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나죠.
 

예고에 가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은 어떻게 갖게 됐나요?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가수의 꿈이 있었어요. 아빠를 닮아 노래를 좀 잘했거든요. 친척 누나도 성악과 출신인데, 어릴 때 누나 따라 MBC 창작동요제에 나가기도 하고 누나 영향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전 누나처럼 상은 못 받았지만요. (웃음) 왜, 쇼핑몰이 문을 열면 오픈 행사 같은 걸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행사 때 앞에 나와서 노래하라고 하면 손 들어서 나가고 그랬어요. 노래를 부르고 나면 사람들이 저를 다르게 본다고 해야 하나. 제 자신이 조금 특별해져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마 그래서 노래하는 게 더 좋았나 봐요. 중학교 때 저희 동네에 처음 예고가 생겼는데, 그때 저기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뮤지컬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예요? 졸업 후 유학을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주위에서 뮤지컬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즈음 TV에서 조승우 형님이 출연한 <지킬 앤 하이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게 됐는데, 노래를 너무 잘하시는 거예요. 연예인인 줄만 알았던 조승우 형님조차 노래를 이렇게 잘하다니, 뮤지컬이란 장르는 뭘까 궁금해지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이런 장르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제대로 본 적은 없었거든요. 그리고 성악과 출신으로 으레 노래는 성악가들이 훨씬 잘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근데 좀 찾아보니까, 와, 이건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그리고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저는 성악과인데도 오페라가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이태리어를 모르니까 쉽게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힘들었거든요. 근데 뮤지컬은 이해가 쏙쏙 되니까 너무 재밌더라고요. 내가 꿈꿔 왔던 오페라 가수가 뮤지컬이란 장르에 있었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부랴부랴 오디션 정보를 찾아봤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단체는 뭐가 있을까 해서 서울예술단 오디션을 보게 된 거예요. 예술단에는 한 1년 정도 있었어요. 
 

예술단을 나와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할 수 있게 한 작품은 뭐였다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든 자기가 했던 작품 중에 애정이 없는 작품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은 <타락천사>였죠. 제 인생의 첫 대학로 2인극이었으니까요. 그때 오디션을 보고 된 사람은 저 혼자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운기 연출님이 저한테 흥미를 가지셨대요. 아직은 모든 게 어설픈데 잘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하셨단 거예요. 너무 감사했어요. 일면식도 없는 저한테 그런 큰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타락천사>로 전환점을 맞았다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작품은 <최후진술>이에요. 이 작품이 잘돼서 저한테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생겼거든요.

 


 

자신을 받아들이기

<최후진술>은 준비할 때만 해도 이렇게 잘될 거란 생각을 못했을 것 같아요. 전혀 못 했어요. 인터뷰하러 오기 전 오전에 <최후진술> 연습을 갔다 왔는데, 문득 너무 신기한 거예요. 제가 중학교 때 열심히 노래를 들었던 고유진 형님이 이 작품에 출연하다니. 초연을 준비할 때만 해도 이렇게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이 될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했어요. 왜냐면 초연 첫날, 객석에 관객이 2번째 줄까지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공연을 할수록 관객이 한 줄씩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 객석이 꽉 차더라고요. 왜 그렇게 잘됐을까 생각해 보면,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한곳을 바라봤던 것 같아요. 이 공연을 잘하자는 게 그때 저희의 유일한 목표였죠.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작품이라 더 특별해요.
 

그게 어떤 즐거움이었는데요? 제가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보니 뮤지컬을 시작하고 나서 꼭 느껴보고 싶은 감정이 하나 있었어요. 무대에서 진정으로 제가 맡은 캐릭터가 되어보는 거요. 예를 들어, <최후진술>에서 갈릴레이를 연기할 때 진짜 갈릴레이가 되어 그의 말을 하는 거죠. 주변 형들은 다 그렇게 한다는데, 저는 늘 ‘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대사하기 바빴거든요. 도대체 무대에서 그 인물로 산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너무 궁금했어요. 난 언제쯤 그걸 느껴볼 수 있을까 그 순간만 기다리는데, 한 작품, 두 작품, 세 작품, 작품수가 늘어가도 모르겠는 거예요. 근데 그 느낌을 처음 알려준 작품이 <최후진술>이에요. 그때 공연을 마치고 나서 내 자신한테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혼자 한 번 생각해 봤어요. 솔직히 <최후진술>를 하기 전과 후 저라는 사람에 큰 차이는 없었거든요. 정답은 소위 말하는 ‘내려놓음’에 있었더라고요. 예전에는 기회에 대한 생각이 너무 간절한 만큼 공연을 하면서도 쓸데없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조금만 실수해도 다음에 캐스팅이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컸던 거예요. 그런데 <최후진술>을 할 때는 이 작품을 끝으로 다른 살길을 찾아볼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공연 자체를 즐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공연 기간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아, 이게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이후에 <최후진술>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 후보에 올랐으니 정말 기뻤겠네요.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오래 고생한 보람이 있단 생각이 들던가요. 저는 늘 제게 성악과 출신의 나이가 적지 않은 부족한 배우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주책없이 눈물이 나요. 사실 어떤 시상식의 어떤 부문이든 후보에 올라보는 게 제 꿈 중 하나였거든요. 매일 밤 하느님께 ‘제게 이 정도는 허락해 주실 거죠?’ 하고 기도했는데, 시상식 후보는커녕 앞으로 배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이 안 풀렸어요. 그런데 예그린뮤지컬어워드 후보가 발표된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카톡’이 몇십 개가 와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지 하고 봤더니 제가 신인상 후보에 올랐대요. 너무 놀라서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어요. 그러다 욕심이 생겼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요. 배우는 서른에도 될 수 있고, 마흔에도 될 수 있고, 쉰에도 될 수 있지만, 사실상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적잖아요. 언젠가 나의 시기가 올 거라는 희망 고문이 배우들을 가장 괴롭게 하거든요. 근데 제가 서른다섯에 신인상 후보에 올랐으니, 어디선가 언제 올지 모르는 나의 전성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에게 작은 힘이 되고 싶단 욕심이 생긴 거죠. 누군가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게 됐다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감성 배우라는 멘트를 빼놓지 않는다죠? 만약 박규원에게 사인을 해준다면 어떤 말을 써주고 싶어요? 글쎄요, 사랑해? 그리고 믿어. 사실 저는 제 자신을 잘 못 믿었어요. 매번 지나고 보면 그때 그 공연을 했던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는데, 정작 그 순간에는 스스로를 압박하느라 행복을 느낄 새가 없었어요. 오늘 공연을 못하면 다음 무대에 설 기회가 없을 거란 불안함 때문에요. 언제 한번 (정)동화 형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규원아, 옛날의 박규원은 불안해했겠지만 지금의 박규원은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지금 하는 공연에 최선을 다하면 계속 작품이 들어올 거야.” 대학로 최고 인기 배우 동화 형이 하는 말이니까 그렇구나 싶다가도 근데 나는 정동화가 아닌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예전에는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제 자신이 안타까웠는데, 지금은 한편으론 이런 제 모습이 재밌기도 해요. 내가 앞으로 더 잘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똑같이 불안하겠구나 싶은 거죠. 그러니까 차라리 마음 편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게 됐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연습하는데도 그 모양이냐고 할까봐 어디 가서 말 못했지만, 저 나름대로는 발음 교정도 하고 연기도 배우고 되게 노력하거든요. (웃음) 이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차차 언젠간 인정받는 날이 오겠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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