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얘기겠지만, 뮤지컬 영화감독은 그 자신이 뮤지컬 영화의 열렬한 팬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주인공이 보고 있는 TV 속 화면으로 슬쩍 드러내거나,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오마주의 형태로 살짝 숨겨 놓곤 한다. 뮤지컬 영화, 혹은 뮤지컬적 요소가 활용된 영화 속에서 다른 뮤지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페임> 속 <록키 호러 픽쳐 쇼>
명문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의 열정과 고뇌를 그린 뮤지컬 영화 <페임>(1980). 이 작품에는 예술 학교 학생 도리스와 랄프가 <록키 호러 픽쳐 쇼>(1975) 심야 상영 극장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록키 호러 픽쳐 쇼>는 순진한 커플이 외딴 성에서 외계인 과학자를 만나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개봉 당시에는 혹평을 받고 흥행에 참패했다. 하지만 심야 상영을 통해 열성팬과 독특한 관람 문화를 낳으며 전대미문의 컬트 영화로 우뚝 섰다.
<페임>은 당대의 이 기이한 컬트 현상을 꽤 자세히 묘사한다. 관객들은 가만히 앉아 영화를 보는 대신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내고 대사 사이사이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외친다. 비가 오는 장면에서는 화면 속 주인공처럼 신문지를 뒤집어쓰고 물총을 쏜다. 스크린 앞에서는 영화 캐릭터와 똑같이 꾸민 ‘섀도 캐스트(Shadow cast)’가 음악에 맞춰 립싱크와 춤을 선보인다. <페임>은 <록키 호러 픽쳐 쇼>의 관객 참여 양상을 기록한 최초의 픽션 영화로, 이 작품이 히트를 치면서 <록키 호러 픽쳐 쇼> 또한 인기의 절정을 맞았다. <페임> 이후 더욱 단단해진 팬층은 체계화된 관객 참여 대본을 완성시켰다.
<헤드윅> 속 <렌트>
트랜스젠더 록가수 헤드윅의 코러스이자 남편인 이츠학은 한때 크로아티아에서 잘나가는 드래그 퀸이었다. 미국으로 오기 위해 헤드윅과 결혼하면서 여장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지만, 마음속은 다신 드래그 퀸이 되고픈 열망으로 가득하다. 뮤지컬 <헤드윅>에는 나오지 않지만 뮤지컬 영화 <헤드윅>(2000)에는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츠학이 뮤지컬 <렌트>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가 따낸 역할은 천사 같은 마음씨와 뛰어난 드럼 실력을 갖춘 푸에르토리코계 드래그 퀸 엔젤. DVD에는 그가 엔젤 역 오디션을 준비하는 모습이 담긴 삭제 장면도 실려 있다. 사랑스러운 드래그 퀸 엔젤을 모르는 이가 있다면 뮤지컬 영화 <렌트>(2005)에서 그의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넘버 ‘Today 4 U’를 감상해 보길. 한 가지 일화를 덧붙이자면, <헤드윅>의 오리지널 헤드윅이자 작가 존 캐머런 미첼은 <헤드윅>에 출연하기 위해 엔젤 역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라라랜드> 속 <밴드 웨건>
<라라랜드>(2016)는 그 자체로 고전 뮤지컬 영화에 대한 헌사라고 할 만큼 수많은 영화의 내용과 연출을 차용하고 있다. <톱 햇>(1935), <스윙 타임>(1936), <쉘 위 댄스>(1937), <싱잉 인 더 레인>(1952),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 <쉘부르의 우산>(1964), <스위트 채러티>(1969) 등 이 작품이 오마주한 고전 뮤지컬 영화는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세바스찬과 미아가 추는 로맨틱한 춤은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댄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그의 파트너들을 떠올리게 한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탭 댄스를 추는 ‘A Lovely Night’ 장면은 <밴드 웨건>(1953)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시드 챠리시가 공원에서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춤사위는 물론 보랏빛으로 물든 저녁 하늘, 벤치, 가로등의 배치까지 매우 흡사하다. 또 세바스찬과 미아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왈츠를 추는 ‘Epilogue’ 장면의 배경은 <브로드웨이 멜로디 오브 1940>(1940)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엘레노어 파웰이 춤추는 장면을 빼다 박았다.
<셰이프 오브 워터> 속 <팔로우 더 플릿>
〈셰이프 오브 워터〉(2017) 역시 고전 뮤지컬 영화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작품이다. 엘라이자라는 주인공 이름부터 <마이 페어 레이디>(1964)를 연상시킨다. 언어장애를 지닌 청소부 엘라이자는 <마이 페어 레이디>의 투박한 말씨를 지닌 빈민층 엘라이자와 겹쳐진다. 엘라이자와 친구 자일스가 틀어놓는 TV에는 <리틀 코로널>(1935), <코니 아일랜드>(1943), <헬로, 프리스코, 헬로>(1943), <댓 나잇 인 리오>(1941)의 한 장면이 줄줄이 스쳐 지나간다. 후반부에는 엘라이자가 상상 속에서 사랑하는 괴생명체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흑백 뮤지컬 시퀀스가 펼쳐진다. 이 환상적인 장면은 <팔로우 더 플릿>(1936)의 ‘Let's Face The Music And Dance’를 오마주한 것이며, 이때 엘라이자가 부르는 노래는 <헬로, 프리스코, 헬로>의 ‘You'll Never Know’다. <팔로우 더 플릿>의 주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는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황금기를 빛낸 최고의 댄스 콤비. 원테이크로 찍은 댄스 장면에서 두 배우가 보여주는 완벽한 호흡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하다.
<월-E> 속 <헬로, 돌리!>
애니메이션 <월-E>(2008)의 주인공은 폐허가 된 지구에 홀로 남은 청소 로봇 월-E. 그의 유일한 낙은 뮤지컬 영화 <헬로, 돌리!>(1969)를 수시로 돌려보는 것이다. <헬로, 돌리!>의 넘버는 영화 삽입곡으로도 사용된다. 오프닝과 월-E가 모자를 들고 춤추는 장면에서는 ‘Put on Your Sunday Clothes’가, 월-E와 EVE가 손을 맞잡는 엔딩에서는 ‘It Only Takes a Moment’가 흘러나온다. 로봇이 주인공인 SF 애니메이션에 생뚱맞게 웬 고전 뮤지컬이냐고? <헬로, 돌리!>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헬로, 돌리!>는 순진한 시골 총각이 뉴욕으로 건너가 세련된 도시 처녀와 결혼하는 이야기다. 즉, <헬로, 돌리!> 속 시골 총각은 구식 로봇 월-E에, 도시 처녀는 월-E가 첫눈에 반해 쫓아다니는 신식 로봇 EVE에 대응하는 셈. 감독은 말 못하는 두 로봇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영화 <헬로, 돌리!>의 ‘It Only Takes a Moment’ 장면에서 손을 꼭 맞잡는 남녀를 보고 무릎을 쳤다고.
<미니언즈> 속 <헤어>
애니메이션 <미니언즈>(2015)에는 짧지만 강렬한 뮤지컬 시퀀스가 존재한다.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갔다가 경비병들에게 딱 걸린 미니언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노래로 최면을 거는 장면이다. 배우 심형탁이 방송에서 불러 일명 ‘뚜찌빠찌뽀찌송’으로 알려진 이 노래가 알고 보면 뮤지컬 넘버라는 사실! 원곡은 1960년대 뉴욕 히피 청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헤어>의 ‘Hair’로, 히피들이 자신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찬양하는 코믹한 내용이다. <미니언즈>는 이 곡의 멜로디만 가져오고 가사는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으나 어쨌든 귀여운) 미니언어로 바꿨다. 원곡을 알면 최면에 빠져 신나게 춤추던 경비병들이 마지막에 난데없이 모자를 벗고 긴 머리를 휘날리는 장면이 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뮤지컬에서도 부르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지는 넘버이니 궁금하다면 뮤지컬 영화 <헤어>(1979)를 참고하시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6호 2018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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