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 | [SPECIAL] 미투 운동, 무대 위 변화 [No.175]
글 |박보라 2018-05-04 4,327책임과 반성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는 미투 운동은 공연계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성추행 전적이 밝혀진 배우 이명행은 출연하고 있던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를 조기 하차했다. 이어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는 한국 연극계의 살아 있는 거장으로 불리었던 이윤택 연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고, 계속해서 피해자의 고백이 이어지자 연희단거리패는 그의 성추행 의혹을 사과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이후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윤택 연출은 밀양연극촌과 30스튜디오의 예술감독직을 하차했다. 또 다른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배우 조재현이 운영하는 공연 제작사 수현재컴퍼니는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와 연극 <에쿠우스>가 막을 내리면 폐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재현은 공연 제작사 수현재컴퍼니 이외에도 대학로에 자리한 수현재씨어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수현재컴퍼니에 대한 현 상황과 수현재씨어터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수현재 컴퍼니의 관계자는 조재현 대표와 관련된 모든 문의에 대해 “더 이상 기사화할 마음이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밝혔다.
스스로 성추행 혐의를 인정한 공연 제작사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는 예술의전당과 함께 만들 예정이었던 위안부 소재의 뮤지컬 <웬즈데이>의 제작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성추행을 한 제작자가 유린당한 여성의 인권을 주제로 한 공연을 제작하는 것은 신뢰와 설득력을 잃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 윤호진 대표가 성추행 혐의를 인정한 직후, 그가 제작한 <명성황후>의 3월 8일 공연은 취소됐다. 공연을 단체 관람하기로 한 서울 YWCA가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내세우며 구매를 취소한 것. 윤호진 대표 또한 에이콤과 관련된 모든 일선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한명구 배우가 출연 예정이던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에어콘 없는 방>은 1억 4천만 원의 제작비를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취소했다. 남산예술센터 측은 “언론 보도 직후 해당 배우가 모든 공연에서 하차할 뜻을 밝혔다. 극단과 스태프 모두가 함께 해결책을 찾았고, 결국엔 공연 중지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작품에서 해당 배우가 출연하는 분량이 90%가 넘어, 배우 교체는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을 내려 공연 취소라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또한 극단 백수광부도 공연을 무리하게 올리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정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지가 컸다는 전언이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오태석 연출의 극단 목화 연극 <모래시계>도 오태석 연출의 미투 폭로가 이어지자 취소를 결정했다.
이러한 극단 해체와 공연 취소라는 결과에 대해 정수연 공연 평론가는 “현재 사태를 일반화할 순 없지만, 연희단거리패는 집단 자체가 범죄의 온상이 된 경우다. 극단의 정체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작품의 가치가 거짓이 됐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해체를 하려면, 극단을 유지한 채 책임을 진 후 해체 수순을 밟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연희단거리패는 극단이 책임을 지는 태도를 취하는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형식”이라고 지적했다. 또 “지목된 가해자는 이미 신뢰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에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가해자로 인해 무작정 공연을 취소하거나 프로덕션을 해체하는 것은 함께 참여하는 배우나 스태프 등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고인물에서 깨끗한 물로
작품 속에서도 이미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반가운 것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몇몇 작품 속의 일부 장면이 수정됐거나 수정 작업에 돌입한다는 소식이다. <맨 오브 라만차>는 여주인공 알돈자가 남성 무리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알돈자의 절망을 표현하는 장면이지만 적나라한 표현과 행위 때문에 선정성이 높아, 작품이 13세 이상 관람 가능한 제한을 받은 주요 이유기도 하다. 정수연 공연 평론가는 “해당 내용은 작품 속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남성적인 폭력의 방식으로 잔인하게 그려졌다”면서 무대 위의 상상력이 삭제된 장면이라고 꼬집었다.
<맨 오브 라만차>의 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프로듀서는 개인 SNS를 통해 이번 시즌 해당 장면이 수정될 것임을 예고했다. 오디컴퍼니의 관계자는 “2015년 공연 이후 해당 장면에 대해 제작사가 많은 고민을 했고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아직 연습 단계에 있는 만큼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수정될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밝혔다. <맨 오브 라만차>와 함께 10년 이상 꾸준한 사랑을 받은 <삼총사>도 수정이 이뤄지는데, 극 중 마초 캐릭터 포르토스의 대사와 행동에서 변화를 줬다. 여성을 좋아하는 거친 남성에서 우정을 중시하는 의리의 사나이로 캐릭터가 바뀌었다.
앞서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마타하리>와 <레드북>은 여성 주인공을 수정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시범 공연 이후 올해 본 공연으로 돌아온 <레드북>은 여성을 나타내는 표현을 수정했다. ‘미인, 요조숙녀’ 같은 여성의 관념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 대신 ‘사랑꾼, 예술가’ 같은 주체적인 표현을 사용했으며, 여성을 비하하는 문장을 삭제했다. 또 여주인공 안나가 정당한 임금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모습 등 현재 여성이 처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장면을 삽입해 공감을 이끌어냈다. <마타하리>도 초연 당시 지적된 부분이 재연에서 많은 변화를 거쳐 호평을 받았다. 초연 당시 엠씨가 등장해 마타하리의 춤을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필사적이고도 음란한 춤’이라고 정의했지만, 재연에서는 마타 하리가 재판을 받으며 본인의 춤이 지닌 의미를 직접 설명하는 장면으로 변했다. 해당 장면을 통해 마타 하리의 춤을 음란한 춤이 아닌 신성한 의식으로 그 의미를 확장했다. 또 그녀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창녀’라는 직접적인 단어와 강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었으나, 재연에서는 이런 부분이 삭제됐다.
작품뿐 아니라 베드신이나 노출 장면에 대한 연습 과정도 변하고 있다. 과거 연출이나 상대 남성 배우의 지시, 요구에 따라 여성 배우가 연습하고 연기하던 것에서, 상호가 대본 리딩과 연습 과정에서 충분히 대본을 숙지한 이후 런스루 단계에서야 노출과 베드신에 대한 최종적인 컨펌과 구성을 진행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스킨십의 경우도 연출, 배우가 충분한 대화를 나눈 후에 이뤄진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상호 존중하는 과정은 배우들이 작품에 더 몰입하도록 돕고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한편 일부 공연 관계자들은 미투 운동을 성폭력 가해자가 세상에 밝혀지게 된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공연에 참여하는 다른 스태프와 배우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 우려를 밝혔다. 극단 해체, 제작사 폐업, 공연 취소로 스태프와 배우가 일자리를 잃거나, 공연에 참여하면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 취재를 위해 연락한 한 관계자는 “위로받아야 할 분들은 위로받아야 할 것이고, 반성해야 할 분들은 반성해야 할 거다. 그러나 이런 영향으로 시장이 위축되는 상황이 우려스럽다”고 말하며 “왜 다시 이렇게 (미투 운동에 대해 취재)하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다소 주춤해진 성폭력 상황을 반기는 듯한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미투 운동이 불러온 효과에 대해 관객들은 응원의 목소리를 냈다. 한 관객은 “잘못된 것들이 이제야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미투 운동으로 인해 시장이 위축된다는 우려는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썩은 시장을 계속해서 끌고 갈 수는 없다.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고 밝혔다. 또 ‘고인물’을 해체하고 바른 상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단계라는 긍정적인 시선이 있다. 이번 미투 운동을 토대로 여성 배우들이 겁을 먹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제대로 마련될 수 있을 거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5호 2018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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