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 영감을 준 것들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가 빌헬름 뮐러의 연시 24편에 곡을 붙인 연가곡입니다. 채한울 작곡가가 연가곡 형식의 공연을 제안하며 이 곡을 들려주었는데, 이렇게 애절하고 아름다울 수가요. 우리 공연이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하나의 이야기지만 명확한 줄거리는 없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가 나그네가 되어 현실과 허구 사이를 방황하는 어둡고 답답하고 쓸쓸한 내용입니다. 그중에서 저는 ‘냇가에서(Auf dem Flusse)’를 제일 좋아합니다. 가사가 너무나 아름다워요.
나를 덮은 얼음을 모난 돌로 쪼아
그리운 그 이름과 그날 그때를
나는 묻으리
처음 만나던 날을, 이별하던 날을
지금은 부서진 그날의 가락지를
안도현 『백석 평전』, 김영한 『내 사랑 백석』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석과 자야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일단은 이 두 책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백석 평전』은 백석을 흠모하는 안도현 시인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정보를 모아 객관적으로 재구성한 백석의 생애입니다. 『내 사랑 백석』은 자야 김영한 선생이 생전에 백석을 그리워하며 쓴 수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책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습니다. 실제 나타샤의 모델이 누구인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누구에게 준 시인지에 대해서도요. 저는 기억에 의존한 사실이 얼마나 불리한지 느꼈죠. 그래서 결정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공연은 자야의 기억이다. 실제 백석이 어떠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녀가 살아생전 그렇게 믿고 싶었던 단 하나, 나타샤가 자신이라는 믿음. 그 방향 하나만 향해서 가자!’라고요.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뮤지컬 넘버를 만들기 위해 시어를 골라내는 일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시 하나를 통으로 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죠. 시인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드라마에 맞추어 시를 배열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여러 시 가운데서도 처음부터 가장 마음이 끌렸던 시가 바로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입니다. 마을에 귀신이 너무 많아 떠날 수 없는 심경을 이야기하는 시죠. 마치 백석의 기억이 너무 많아 떠날 수 없는 자야의 심경과 맞닿아 있는 듯해, 마지막까지 어디다 넣으면 좋을까 고민하며 붙들고 있었습니다. 위트 넘치는 리듬감에 더해 묘한 서글픔까지 느껴지는 시입니다.
배삼식 『먼 데서 오는 여자』
딸을 먼저 보내고 정신을 놓아버린 아내와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희곡입니다. 감정이 확 고조되거나 떨어지는 극적인 부분 없이도, 노부부가 보여주는 일상의 무게가 진중하고 묵직한 감동을 주죠. 배삼식 작가님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개발 단계에서 멘토로 도움을 주기도 하셨는데요, 어떻게 극을 풀어 나갈지 고민될 때 선생님의 이 작품이 참고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희곡에는 기억의 파편이 지나가는 지점과 생의 무게감이 너무나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어 감히 따라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럽지만요. 그래도 이렇게 지면을 빌려 고백하며 배삼식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