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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BEYOND THE THEATER] 다양한 장르 속 거미여인 [NO.171]

글 |박병성 사진제공 |악어컴퍼니 2018-01-03 3,883

다양한 장르 속 거미여인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매우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1960년대 말부터 실험적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 푸익은 페론 정권을 비판하고 노골적인 자위행위를 담은 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건』이 판매 금지되자, 이탈리아에 머물다 귀국을 포기하고 멕시코로 망명한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 스페인에서 출판되지만 고국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치범과 동성애자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된다. 동성애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의 사랑과 우정을 담은 이 소설은 해외에서 큰 사랑을 받으며 다양한 장르로 새롭게 태어났다. 1983년 런던에서 희곡으로 각색되어 1985년 9월 부쉬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헥토르 바벤코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후보에 올랐으며, 몰리나 역을 맡은 윌리엄 허트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92년 존 칸더와 프레드 엡 콤비의 뮤지컬로 만들어져 작품상, 작곡상, 극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의상상 일곱 부문에서 수상했다. 소설이 두 사람의 대화 형식이라는 점이 극 장르로의 확산을 가속화시켰다.



영화를 통한 관계 암시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동성애자인 몰리나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잡혀온 37세의 쇼윈도 장식가이고, 발렌틴은 감정적인 요소를 극도로 거부하는 26세의 정치범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빌라 데보트 감옥에서 한 감방을 쓰는 동성애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은 너무나도 다른 성향을 지녔지만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스토리는 예상 가능한 구도이지만 풀어내는 방식이 색다르다. 소설은 마치 지문이 없는 시나리오처럼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대사가 발렌틴과 몰리나가 주고받는 대사이며, 그중 상당 부분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몰리나는 여섯 편의 영화를 들려준다. 이들 영화는 실제 영화를 변형하거나 푸익이 임의로 만들어낸 영화들이다. 제일 먼저 들려주는 <흑표범여인>은 터너 감독의 영화 <캣 피플(Cat People)>을 변형한 것이고, 존 크롬웰 감독의 <매혹의 오두막>과 제임스 웨일 감독의 <좀비와 함께>가 몰리나의 기억을 통해 재편집된다. 프랑스 여가수와 독일 장교의 사랑 이야기나, 자동차 경주를 하는 청년과 여배우의 이야기는 푸익이 상상력을 발휘한 영화이다. 몰리나가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기자와 여배우의 헌신과 사랑에 관한 영화는 멕시코의 멜로드라마 여러 편을 섞어놓은 것이다. 소설은 전체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7장까지는 특별한 사건 없이 영화 이야기로 채워진다. 몰리나가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사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둘의 캐릭터와 관계를 유추하게 된다. 각각의 영화에는 몰리나와 발렌틴이 감정 이입하는 인물이 있어, 영화 이야기를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의 생각과 감정을 유추할 수 있다.



영화와 연극에서 몰리나의 이야기

                     

바벤코 감독의 영화 역시 기본적인 구성이나 형식은 소설과 같다. 단지 소설에서는 여섯 편의 영화를 들려주지만, 영화에서는 두 편을 소개하는데 소개 순서와 내용이 조금 다르다. 영화는 감옥 안에서 몰리나가 영화를 들려주는 목소리로 시작한다. 몰리나가 들려주는 첫 영화는 <흑표범여인>이 아니라, 프랑스 여가수와 독일 장교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두 번째로 들려주었던 이 영화를 중요하게 가져온 이유는 분명하다. 이 영화는 스파이 활동에 휘말린 여가수 레니가 독일 장교를 사랑하다 겪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레니는 나치 장교를 사랑하지만 조국을 위해 그를 속이고 정보를 빼내야 한다. 이는 작품 속 몰리나와 발렌틴의 인물 관계와 흡사하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구도가 그렇고, 몰리나 역시 조기 석방을 약속받고 발렌틴으로부터 정보를 빼내라는 지령을 받은 상황이다.


바벤코의 영화에서 몰리나가 들려주는 또 하나의 영화가 <거미여인>이다. 소설에서 몰리나는 <거미여인>에 대한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하는 ‘흑표범여인’의 이야기에 빗대 몰리나를 키스의 두려움을 주는 흑표범여인이 아니라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미여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몰리나가 죽고 난 후 모진 고문을 받은 발렌틴은 몰리나가 변한 거미여인을 상상한다. 바벤코의 영화에서는 발렌틴의 환상 장면을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의 장면으로 소개한 것이다. 발렌틴은 아무런 의식 없이 나치의 선전 영화를 로맨틱하게 받아들이는 몰리나를 무시한다. 그러다 몰리나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병이 난 발렌틴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면서 마음을 연다. 환상 속의 거미여인이 표류된 청년을 보살피는 대목은 병든 발렌틴을 보살폈던 몰리나를 떠올리게 한다. 이때 거미여인은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린다. 빠른 출옥을 약속받고 거래했던 몰리나가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는 혼란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연극도 원작에서 6편의 영화 중 <흑표범여인> 한 편만 들려준다. 2인극으로 펼쳐지는 연극에서 영화 이야기는 몰리나의 입을 통해 전달되다 보니 원작 소설처럼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가는 측면이 있다. 대신 묘사가 많은 영화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는 대신 임팩트 있게 압축하고,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사이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에 집중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판타지의 극대화

                     

2인극인 연극은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몰리나의 이야기를 상상력에 기대어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에서는 몰리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직접 표현한다. 바벤코 영화에서는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를 직접 보여준다. 재현된 영화는 과장된 연기와 화려한 영상으로 판타지의 느낌을 강조한다. 특히 몰리나의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거미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독자의 상상력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이미지로 시각화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1992년 초연한 뮤지컬에서는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여인을 오로라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오로라 역의 배우는 거미여인으로도 등장하는데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초연에서는 전설의 배우 치타 리베라가 출연해 압도적인 춤과 노래로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영화와 뮤지컬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환상의 이야기를 직접 영상과 무대에서 보여주면서 감옥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판타지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소설과 연극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연기와 문학적 상상력으로 보여줬다면, 영화와 뮤지컬은 현실과 판타지의 대비를 통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1호 2017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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