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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경성 [NO.170]

글 |박보라 2017-12-06 5,447

 

 

INTERVIEW   박해림 작가·채한울 작곡가

 

경성 시대,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박해림 사실 특별히 경성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 소재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 경성 시대에는 시인과 기생이 어울렸던 문화가 있었다. 그 속의 많은 인연들 중에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가 끌렸다. 그런데 백석의 시로 단순히 일대기를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백석을 사랑한 한 여자에 주목했다. 그래서 백석의 시를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해석이 아닌 여자의 인생에 맞춰 풀어냈다. 여자가 진짜 원하는 건, ‘시 안에서 살고 있는 어떤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 그 사랑을 지켰을 거라는 문제에서 시작했다.

 

작품의 창작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것들이 있는가.
채한울 경성 시대를 다룬다는 것이 한편으론 우려되기도 했다. 시대성이라는 것이 자칫하면 작품의 분위기를 너무 튀게 하거나 늘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석과 자야가 경성 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에 포커스를 두기보다는 두 인물 자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낭만 시대의 작곡가들이 시에 곡을 붙여 가곡을 만들었는데, 이들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시인의 사랑을 노래한 슈만의 연가곡집처럼, 백석의 시로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을 하나의 연가곡이라고 생각하고 시를 중심으로 살을 붙여 나갔다. 가곡 형식을 중심으로 송사이클을 만든 거다.

 

경성 시대의 캐릭터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박해림 대부분의 캐릭터가 자유를 지향하고 남자도, 여자도 모두 자유로운 연애를 꿈꿔 온 것이 상당히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경성 시대가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박해림 경성 시대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서양에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동서양의 사상이 뒤섞이는 시대였다. 그런 혼재된 시기란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채한울 맞다. 다양한 양식이 혼재될 수 있는 시기였다. 또 그때서야 자유라는 개념을 인정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 자체가 상당히 재미있는 소재다. 오래된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갑자기 범람하고 충돌하면서 사건이 생기고 변화가 생긴다는 거다.

 

 


KEYWORLD   경성                                      
                               
‘흰밥과 가재미와 우린’ 조선의 경제 정책
<나와 나탸사와 흰 당나귀>에서는 백석이 갑자기 청진동에 있던 자야의 집에 쳐들어가 “배가 고픈데 남은 밥 좀 있냐”고 묻는다. 자야는 그런 그에게 “쌀독에 쌀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밥상을 차려준다. 백석과 자야가 경성에서 함께 동거하던 1930년대 후반은 조선이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기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은 일본은 자국 내의 물가와 식량 공급을 위해 조선의 쌀 수탈량을 늘렸다. 조선총독부가 ‘만주산미증식10개년’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만주 침략 이후로 가정의 민간물자 수탈, 배급제 실시를 비롯해 황국신민화 정책도 시작됐다.

 

‘어느 사이에’ 38선
백석과 자야의 동거를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는 충북 진천으로 그를 불러 억지로 결혼을 시켰는데, 그는 곧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만다. 그는 이후 1939년 돈을 빌리기 위해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백석과 자야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한반도는 38선 이북으로는 소련, 이남으로는 미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뒤늦게 백석은 자야가 있는 경성으로 내려가려 하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경성으로 가는 열차는 운행되지 않았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경성으로 가는 열차를 타지 못한 백석의 모습과 만주에 남겨진 백석을 위해 자야가 두툼한 두루마기를 친구 편에 보냈지만, 다시 되돌아온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란1’,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기생
자야 김영한은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 그녀는 창가곡, 궁중무를 배우고 잡지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고 알려졌다. 관기 제도는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폐지와 함께 사라졌지만, 기생들은 기생조합으로 불리는 권번을 통해 활동했다.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라디오의 음악 방송에 출연하거나 축음기 음반을 취입했다. 또 초창기 영화에서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기생들을 불러들여 라이브 공연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신문 광고에 등장하는 광고 및 표지 사진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전국 각지에 권번이 세워져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평양의 권번이 유명했다. 이후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권번도 강압적으로 폐지되어, 전통 예악을 하는 기생은 곧 사라지게 됐다.

 

 

경성의 아이돌, 백석
백석은 경성 시대에 훈훈한 외모를 지닌 시인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백석의 친구였던 시인 김기림은 그가 머리를 날리며 광화문에 나타나면 광화문 사거리가 온통 환해졌다고 회상했다. 백석은 이런 외모 덕택인지 로맨스도 풍부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란이라고 불린 박경린과 자야 김영한과의 에피소드다. <나와 타나샤와 흰 당나귀>가 자야와의 사랑을 소재로 창작됐다면, 란과의 사랑은 백석의 시 「통영」과 「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백석과 란은 친구의 혼인 축하 자리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시 「통영」에서는 박경린이 천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백석은 이후 두 번 통영을 방문했고, 그녀를 란이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백석과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과 결혼을 하는데, 하필 신현중은 백석이 통영에 갈 때마다 동행했던 친구였다. 결혼 이후 신현중은 백석을 가회동 집으로 처음 초대했는데, 백석은 마치 부끄러워서 숨는 것같이 방문 앞에서 얼굴이 빨개져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날 박경린은 집을 빠져나와 외삼촌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첫눈 같은 사랑을 간직한 여인, 자야
서울 출신이었던 김영한은 16세가 되던 해에 조선 권번에 들어간다. 기명은 진향이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의 말에 속아 집안이 무너지면서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됐다. 자야가 백석을 만나게 된 계기는 자신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 준 신윤국이 함흥 감옥에 투옥됐기 때문이었다. 신윤국의 면회가 거절된 탓에 함흥 권번에 있던 자야는 영생고보 교사들의 회식에 참여했다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의 자야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면서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3년 만에 끝나고 마는데,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반대한 백석의 부모가 충북 진천에서 억지로 결혼을 하게 만든 것.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행을 권유하지만 자야는 경성에 남는다. 자야는 1951년 성북구에 땅을 구입해, 대원각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1970년대까지 삼청각, 선운각과 함께 한국의 3대 요정으로 크게 만들었다. 자야는 여전히 북으로 간 백석을 잊지 못했고,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자야는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할 뜻을 밝혔고, 7천여 평의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대원각은 길상사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법정 스님은 자야에게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법명을 건네준다. 길상사는 백석의 동경 유학시절 주소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99년 자야는 세상을 떠나며 화장을 한 뒤 길상사에 첫눈이 내리면 자신이 머물던 길상헌 뒤 계곡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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