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理想)이 되어버린 이상(李箱)이 이상(異常)하다 그리오
<꾿빠이, 이상>
실패의 기준
서울예술단의 신작 <꾿빠이, 이상>의 공연 팸플릿이나 매체 인터뷰를 봤을 때 눈에 띈 단어는 실험보다 실패였다. 실패를 각오한 공연이라는 말이 공연 당사자에게서 그것도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공공연히 언급되다니. 그렇다면 이건 둘 중 하나다. 절대로 실패할 리 없다는 자신감의 반어법이거나 실패할 게 분명해도 가치를 포기할 순 없다는 결기의 표현이거나. 서울예술단이 방점을 찍은 지점은 물론 후자이다. 이번 작품에서 서울예술단의 선언은 놀랍다. ‘시장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실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공공 예술 단체의 마땅한 책임이다.’ 시장이 요구하는 새로움이 아니라 예술이 요구하는 새로움을 지지하겠다는 거다. 예술의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멋진 화답이다.
공공 예술 단체라면 당연히 이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사실 이건 쉬운 결단이 아니다. 실험은 이상적이지만 실패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실험은 예술가가 무엇을 하는가를 기준 삼는 데 비해 실패는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기준으로 본다. 그러니 실패를 각오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이며 실험을 시도한다는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집중하겠다는 말이다. 관객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성공의 코드, 예를 들어 흥행이라는 관객의 숫자든, 입소문이라는 관객의 평판이든, 회전문이라는 관객의 충성도든, 이 모든 것을 미룬 채 예술가에게만 주목하겠다는 것이다. 관객의 기대에 눈 맞추지 않고 오로지 자기에게 집중하는 예술가의 작품은 관객에게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가기 마련이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겠다고 자처한 서울예술단에 박수를 보낸다.
<꾿빠이, 이상>은 이런 선언이 틀에 박힌 표어가 아니라 실현의 의지가 담긴 말임을 보여주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매회 공연에서 입장할 수 있는 관객을 백 명으로 제한한 것을 보시라. 이렇게 하면 공연 기간 전체를 통틀어도 대극장에서 이삼 회 공연으로 동원한 관객 숫자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공연의 특성상 꼭 필요한 설정이라 하더라도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자면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기획이다. 그러나 이 기획을 밀어붙임으로써 이 공연은 경제적 이익보다 더 큰 가치를 얻었다. 바로 희소성이다. 관객이 쉽게 볼 수 없는 공연. 초반부터 이어진 매진 행렬과 엇갈리는 관객 의견은 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배가시켰다. 찬사이든 혹평이든 관객들은 각각 다른 관심으로 이 공연을 궁금해했던 거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앞선 실패의 결의들은 괜한 엄살이었나 싶다. 규모가 아닌 밀도의 측면에서 볼 때 이 공연은 관객을 향해 애초에 실패할 수도 없고 실제로 실패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실험이라기에는 부족한
기획이 이토록 과감했으니 이제 ‘실패에 걸맞은 실험’은 전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던져진 셈이다. 공연을 수식하는 단어들은 큼직큼직하다. 형식으로는 이머시브요 소재는 시인 이상이요 내용은 복잡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용물에 비해 과한 포장지이다. 이머시브라는 형식을 단지 관객 참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만, 관객 참여의 명분으로 선택한 연출의 전략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극장 로비에서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는 것이나, 나눠준 가면(정말 아무 의미 없는!)을 쓰고 배우의 안내에 따라 극장에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서서 공연을 보다가 둥그렇게 앉는 것까지. 이런 형식은 20년 전에도 드물지 않게 있었던 ‘고전적’인 설정일뿐더러, 관객이 곧장 자기 자리로 가 앉지 않고 약간의 움직임을 허락받는 데 관객 참여라는 명분을 붙이는 건 오히려 민망하다. 관객은 그저 배우의 안내에 따라 극장에 들어가고 가운데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 맞춰 둥그렇게 둘러앉을 뿐이다. 만약 여기서 관객이 ‘진짜’ 참여한다면? 퍼포먼스의 밀도가 높은 이 공연은 망가질 게 분명하다. 애초부터 이 공연은 관객에게 열린 작품이 아니다. 관객을 위한 여지(가면은 벗기보다 찢어야 했건만!)는 이 공연에 없다.
서사도 마찬가지다. 김연수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작품의 이야기는 원작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 상관없음이 과연 타당한지는 한 번 물어봐야겠다. 원작은 이상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상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상은 사실을 구축할수록 진실이 모호해지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상은 하나의 비어 있는 공간이요 혼란스러운 부재인 것이다. 원작의 이상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이다. 그런데 공연은 이상으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한다. 그것도 세 명의 이상을 등장시켜서 말이다! 그(들)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나는 누구인가. 고전적이지 않나. 더욱 고전적인 건 그 대답을 찾는다는 점이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얼굴들, 그게 바로 나다, 라는 대답을 말이다. 명쾌한 윤리로 분명한 존재를 찾은 우리의 이상. 극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복잡하고 모호하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작가가 하는 말은 하나도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지만 이것이 언뜻 그런 느낌을 관객에게 주는 건 말하는 방식이 지루하고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점층되지도 않는 동어반복은 의도가 담긴 실험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인 영탄일 뿐이다.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썼던 관객은 끝내 지쳐버리고 만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뭔가를 찾으려 했으니. 작가의 현학은 자주 관객에게 속임수가 된다.
오히려 이 작품에 새로운 형식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근거는, 관객 참여나 서사가 아니라, 음악과 춤에 있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음악은 드라마를 설명하고 분위기를 주도한다. 언뜻 듣기엔 낯설기도 하지만 극의 흐름을 이끄는 기능으로 보자면 자연스러우면서도 구체적이다. 공연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끌어올린 데는 불협의 불안과 선율의 서정을 넘나드는 음악의 화술이 큰 몫을 담당했다. 춤도 마찬가지. 서울예술단의 가장 큰 장점인 춤이 극적 언어의 전반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나름의 멋을 획득한다. 춤은 현대무용의 문법에 충실하고 음악 또한 자기 언어에 성실한 것이 실험의 파격보다는 안정된 재현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새롭게 보였던 이유는 뭘까. 아마도 작가와 연출이라는 전통적 스태프의 많은 몫을 공간과 음악과 춤 등 무대 스태프의 퍼포먼스가 나눠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연이 선택한 최고의 ‘실험적’ 전략이 된 셈이다.
더 잘 실패하기 위해서는
정작 애매모호한 것은 <꾿빠이, 이상>의 위치이다. 작품 내적인 원리로 보자면 실험적인 작품이 아니고 작품 외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실패한 작품도 아니다. 실험과 실패를 각오했는데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된 근본적인 이유가 뭘까. 실험이란 기존의 생각이나 방식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시도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깨뜨려야 할 ‘기존의 무엇’이다. 그야말로 파격(破格)을 행해야 하는 거다. 실패는 이 과정에서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결과일 터. 역설은 이 결과에서 생겨난다. 가장 크게 실패한 곳에서 가장 놀라운 혁신이 싹틀 수 있다는 역설 말이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잘 실패할 것이다!’ 실패를 다짐하는 베케트의 선언은 예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를 가슴 뜨겁게 보여준다.
결국은 핵심은 방향성이다. 방향성이야말로 실패와 실험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이것이 분명할 때 실험은 과거를 향한 결별이 될 것이고 실패는 미래를 향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꾿빠이, 이상>에 이런 방향성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이것은 결국 서울예술단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공공 예술 단체보다도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단의 저력에 박수를 보내지만, 그리고 이런 작품을 시도한 것에 열렬한 지지를 표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예술감독이 바뀔 때마다 변화의 진폭이 크다는 것은 조직의 특성이자 한계이겠지만, 실정법 위에 헌법이 있는 것처럼, 서울예술단의 흔들리지 않는 방향성은 무엇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그 지속성 위에서 <꾿빠이, 이상>의 위치는 다시 부여될 터. 예술의 공공성을 향한 서울예술단의 다짐, 곧 실험의 의지와 실패의 용기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길 바란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0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