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을 전해요
최근 편지로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이 눈에 띈다. <시라노>, <키다리 아저씨>, <팬레터>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가 그 주인공이다. 뮤지컬을 넘어 현실에서도 편지로 이어진 애틋한 인연을 알아본다.
위로와 격려의 이야기
릴케와 카푸스, 릴케와 리자 하이제의 편지
우리에게 유명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릴케를 대선배로 흠모하던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가 릴케와 주고받은 편지를 20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출판한 책이다. 릴케는 ‘자기 본성의 풍부한 수확’을 편지에 담았다고 고백하며, 생전에 1만 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카푸스는 이 책을 통해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선배로서 조언하는 릴케의 편지를 소개했다. 카푸스에게 첫 답장을 쓰던 당시 릴케는 그 자신도 인생과 문학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즉, 편지 속에는 새로운 인생관과 문학론을 찾아가는 릴케의 깊이 있는 고백이 담겨 있는 셈이다. 카푸스에게 보냈던 그의 편지에는 고생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난다. 특히 생계에 위협을 느낀 릴케가 아내와 별거한 채 돌이 지난 딸을 장모에게 맡기고 원고료를 위해 『로댕 평전』을 집필하던 자신의 상황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며 카푸스에게 진솔한 조언을 건넸다. 그래서인지 릴케가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과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담겼다. 또 그는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의 한계점을 지적했다. 외부의 평가를 통해 시의 성공 여부를 판단했던 카푸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반성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릴케는 카푸스 말고도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리자 하이제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릴케에게 편지를 보낼 무렵 리자 하이제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두 살짜리 아들과 생계를 걱정하던 스물여섯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엄했던 아버지와 의견 충돌로 가출한다. 미술학도였던 리자의 전남편은 일거리를 찾아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기에, 이들은 결국 3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리자 하이제는 어린 아들의 양육을 혼자 맡게 되었고, 이런 고달팠던 상황에서 릴케의 「형상시집」을 접하고 위안을 받았다. 그녀는 릴케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고, 릴케는 길고 다정한 답장을 보냈다. 1919년 7월에 시작된 릴케와 리자 하이제 사이의 편지 교환은 1924년 5월 7일까지 계속됐다.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궁핍과 혼란의 시기였다. 릴케는 생계의 위험에 처해 있는 그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편지를 통해 삶의 의욕을 잃지 않도록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랑의 흔적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
아벨라르는 중세 굴지의 철학자로, 22세 때 스승을 논쟁으로 이겨 새 학파를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췄다. 그는 39세 때 요조숙녀로 이름이 높았던 17세 소녀 엘로이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후견인인 작은 아버지 퓔베르에게 접근해, 가정교사로 취직한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적 명성과 교육자라는 지위를 통해 엘로이즈를 소유한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의 관계는 퓔베리에게 들켜버리고 만다. 퓔베르는 엘로이즈와 정식으로 결혼하라고 했지만, 아벨라르는 이 결혼을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아벨라르의 고향에서 아이를 낳고 파리로 돌아왔다. 엘로이즈는 집안에서 학대를 받았고, 결국 퓔베르는 막무가내로 두 사람의 결혼을 공표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지키기 위해 수녀원에 도피시켰고, 퓔베르는 그녀가 수녀가 된 것으로 착각하고 아벨라르를 향한 복수를 시도했다. 아벨라르의 하인을 매수해 그의 성기를 자르게 만든 것. 거세당한 아벨라르는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 수도원에 몸을 숨겼다. 이 사건 때문에 엘로이즈는 수녀원에 살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수녀원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아벨라르와 함께 살았던 3년이 세상 밖에서 산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후 아벨라르는 그의 나이 53세 때, 미지의 친구에게 연애 사건의 전말을 담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편지를 본 엘로이즈는 옛 연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이 나눈 편지는 고작 12통이었다. 뜨거운 애정을 구애한 내용이 아니라 수도원 생활과 신학, 설교집, 신앙에 대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철학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지를 방랑하던 아벨라르는 쓸쓸하게 홀로 죽음을 맞았다. 엘로이즈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그의 시체를 찾아 땅에 묻었고, 그녀가 눈을 감은 후엔 그의 옆에 묻혔다.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 이야기는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세상에 공개된 이후 더 유명해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그림뿐 아니라 시,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로 사랑받고 있다.
결국 만나지 못한 인연
헬렌 한프와 프랭크 도엘의 편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바다 건너 영국의 채링크로스의 헌책방 직원에게 보낸 편지는 소소한 감동을 전한다. 희귀 고서적을 좋아한 작가 헬렌 한프는 우연히 고서적을 전문으로 다루는 런던의 마크스 서점을 알게 됐고, 평소 자신이 구하고 싶었던 희귀본 책 목록을 보냈다. 당시엔 중고서적을 구매하기 위해 서점으로 주문서를 넣으면 서점 직원이 원하는 책을 찾아 보내줬다. 첫 거래에서 자신의 희망목록 중 대부분을 구한 헬렌 한프는 그때부터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프랭크 도엘은 까다로운 헬렌 한프의 요구에 언제나 친절하게 응답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후에는 선물을 주고받는 친구가 된다. 사실 편지의 내용은 거창한 게 아니라 헌책을 거래한 내용이지만, 오랜 시간 차근차근 쌓인 우정은 매력적이게 다가온다.
이후 처음 그녀와 편지를 나누었던 담당자 프랭크 도엘뿐 아니라 다른 서점의 동료, 이웃, 그리고 가족까지 모두 친구로 발전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을 넘어, 영국이 전쟁 직후 생필품 배급 제한으로 어려움을 겪자 헬렌 한프는 서점 식구들을 위해 햄이나 계란 같은 생필품을 보내주기도 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랭크 도엘의 식구들은 그녀에게 손수 만든 식탁보를 선물했다. 이들의 우정은 편지를 주고받은 당사자인 프랭크 도엘이 사망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편지로 쌓은 인연으로 런던을 방문해 달라는 서점 직원의 제안에, 가난한 뉴욕의 작가는 끝내 응하지 못했고 눈을 감았다. 이 편지들은 「채링크로스 84번지」라는 책으로 출판되었고, 탕웨이 주연의 <북 오브 러브>로도 영화화됐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