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거둔 결실
<지킬 앤 하이드>의 테디 베어, <드라큘라>의 보틀, <몬테크리스토>의 코인 포켓, <팬텀>의 업사이클 조명…. 최근 몇 년 사이 뮤지컬계에서 화제를 모은 MD를 만들어낸 사람은 바로 인터파크 공연프로듀싱파트에 근무하고 있는 최원철 과장이다. 대학로 극단을 통해 공연계에 입문한 그는 오디컴퍼니 기획 팀에서 ‘MD의 귀재’로 이름을 알린 후 지난해 인터파크로 스카우트된 인재. 뮤지컬 MD가 활성화되기 이전, 어떻게 MD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최원철 과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열정에서 시작된 일
국내 뮤지컬 MD 시장의 개척자로 불린다. 시장이 활성화되기 전, MD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시작은 단순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굿즈를 좋아한다. (웃음) 특히 피규어나 디자인 문구를 좋아해 어렸을 땐 모으기도 많이 모았다. 공연과 머천다이즈, 이 두 가지가 내 주된 관심사여서 대학로에서 처음 공연 일을 시작했을 때의 꿈이 공연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것과 내가 만든 공연의 캐릭터 상품을 만드는 거였다. 본격적으로 MD 기획을 하게 된 건, 2010년 오디컴퍼니 기획 팀에 들어가면서다. 당시만 해도 MD는 중요한 파트가 아니어서 마케팅 팀 막내가 담당했는데, 자발적으로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시 상황상 MD는 항상 후순위의 일이 되다 보니 오히려 더 오기가 생기더라. 거의 퇴근 후에 잔업으로 MD 업무를 처리하면서 회사 사람들한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MD 판매로 대극장 공연 한 회차 매출을 내겠다고 했다. (웃음)
개인적인 열정을 넘어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어떤 가능성을 본 건가.
시작부터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같은 서구 시장에서는 MD가 굉장히 활성화돼 있지 않나. 상품 종류가 굉장히 다양할 뿐 아니라, 크레이티브 굿즈나 아라카 그룹 같은 MD 에이전시가 따로 있을 정도니까. 물론 두 시장 다 관광객이 주 관객층이다 보니, 공연 MD도 하나의 여행 기념품처럼 구입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와 사정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공연을 보고 감동받았을 때 그 무형의 경험을 추억할 수 있게 유형의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은 어딜 가나 비슷할 것 같았다. 제품에 공연 로고가 크게 박힌 일차원적인 판촉물이 아닌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상품을 만든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처음 MD를 기획하기 시작했을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앞서 잠깐 얘기했듯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MD는 부가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상품 개발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머그잔 같은 기본적인 아이템을 만든다 해도 공연 로고를 넣어 디자인하는 정도였지, 별도의 비용을 들여 아트웍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MD 제작에 많은 돈을 쓸 여건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상품 기획부터 아이템 선정, 제작 업체 컨택까지 전 과정을 혼자 전담했다. 심지어 상품 포장이나 상품 홍보 촬영도 도맡아서 했다. 그래서 촬영 배경이 다 우리집이다. (웃음) 그래도 내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재미있었고, 기획 팀에서 일하다 보니 작품 전반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 그나마 수월하게 상품을 기획할 수 있었다.
당시엔 공연 MD 기획에 참고할 자료가 많이 없었을 텐데, 주로 어디서 아이디어나 정보를 얻었나.
처음엔 아무래도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공연 MD를 많이 찾아봤다. 극장 홈페이지에서 자체적으로 온라인 숍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공연 웹사이트 플레이빌(Playbill)도 사이트 내에서 MD를 판매하고 있어서 어떤 상품들이 제작되고 있는지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장과 확실히 성향이 다른 게, 우리나라에서는 의류가 별로 인기가 없는 반면 서양에서는 공연 MD의 70퍼센트가 의류다. 그리고 공연은 아니지만, 미국의 프로 스포츠 리그야말로 MD의 천국이다. 아기 옷이나 자동차 번호판 등 별의별 상품을 다 만든다. 그런 것도 많이 참고했다. 또 2000년대 초반부터 텐바이텐이나 1300K 같은 디자인 상품cf 쇼핑몰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지 않았나.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디자인 상품이 뭔지 눈여겨보고 공연 MD와 접목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멈추지 않는 고민
오디컴퍼니에서 MD에 힘을 쏟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턴가.
2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재연 때나 2012년 <닥터 지바고> 초연 때도 몇 가지 아이템을 만들긴 했지만, 그렇게 눈에 띌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MD 제작에 나섰던 게 <맨 오브 라만차> 2013년 공연부터다. 그때부터 작품과 좀 더 연계된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극 중 알돈자가 세르반테스에게 사랑의 징표로 헌 걸레를 주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손수건을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손수건의 기본 패턴은 물론이고 그 안에 들어간 그림도 전부 작품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트위터가 인기를 끌 때라 회사 계정을 통해 공연 기간에 꾸준히 MD 상품 정보를 시리즈로 노출했는데, 홍보 효과가 꽤 있었다.
화제 면에서 보면 <드라큘라> 2014년 초연 MD가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것 같다. 당시 억 단위의 MD 매출액이 공개되면서 더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드라큘라> 초연 때 두 달 남짓한 공연 기간에 MD로 4억 원 매출을 올렸다. 그때도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적극 활용해 MD를 홍보했는데, 개막 며칠 전부터는 디데이를 카운트하면서 사전에 하나씩 품목을 공개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관객들이 이미 공연장에 오기 전에 어떤 상품들이 MD로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주연 배우였던 김준수가 워낙 티켓 파워가 세니까 어느 정도 좋은 판매율을 예상했지만, 공연 첫날 MD를 사려는 사람들의 대기줄이 극장 밖 거리까지 이어지는데 깜짝 놀랐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인 건가 싶어 무섭기도 하고. (웃음) 당시 화제성 때문에 여러 매체에서 뮤지컬 MD 관련 기사를 냈는데, 회사로 매출 문의가 많이 들어오다 보니 이례적으로 매출을 공개했던 거다. 물론 다른 모든 작품들의 MD가 단기간에 그만큼 높은 매출을 올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의 MD 시장을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MD를 기획할 때의 원칙은 뭔가.
보통 기본 아이템과 스페셜 아이템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상품 라인업을 짠다. 프로그램북, 머그잔, 볼펜 등이 기본 아이템이고, 작품의 특성을 살린 고가의 상품 또는 공연되는 계절에 따른 시즌 특화 상품 등이 스페셜 아이템에 속한다. 단, 최근 거의 모든 공연 MD에 라펠 핀이 포함되는 것처럼 대중적인 트렌드에 따라 기본 아이템 구성이 조금씩 달라지긴 한다. 개인적으로 상품을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뮤지컬 MD의 경우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상품에 담아야만 다른 일반 소비재와 차이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연 공연은 대본을 분석하면서 작품을 나타내는 핵심 키워드로 브레인스토밍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몬테크리스토>’라면 바다, 항해, 범선, 선원 등의 키워드에서 출발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지치기해 가는 거다. 그리고 국내에서 인기 있는 공연 장르 중 하나가 서양 시대극이지 않나. 서양 시대극은 보통 파리나 런던 같은 유명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리적인 특성을 살려 MD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공연에서 기대하는 판타지 중 하나가 일종의 여행이라면, 공연 MD를 관광 기념품처럼 간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떻게 하면 작품과 연관된 상품을 만들 수 있는지 많은 고민을 하기 때문에, 공연 시작 전과 공연 끝난 후의 매출에 차이가 클 때 보람을 느낀다.
상품을 기획할 때 공연 타깃층에 따른 고민은 없는지.
성별이나 연령대에 따라 구매 성향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진 않는다. 사실 공연 MD의 소비는 대부분 현장에서 바쁘게 이뤄지기 때문에 애초에 구매층 파악이 힘들기도 하다. 다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과 공연 마니아가 타깃인 작품에는 조금의 차이가 있다. 일반 대중이 많이 보는 작품은 누가 봐도 호불호가 나뉘지 않을 예쁜 상품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웃음) 그리고 이미 티켓 구매에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공연 한 편을 보는 데 추가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이 있다. 따라서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도 고려 사항 중 하나다. 소극장 작품, 특히 마니아 팬덤이 있는 작품은 좀 더 깊이 작품과 연관된 상품을 만들려고 고민한다. 공연을 한 번만 봐선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디테일한 부분이라도 작품에 애정을 지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포인트를 잘 살려내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MD가 있다면?
<닥터 지바고> 초연 때 만들고 싶었던 아이템 중 하나가 오르골이었다. <닥터 지바고>의 아련한 겨울 느낌과 오르골, 정말 잘 어울리지 않나. (웃음) 그런데 <캣츠>의 ‘Memory’처럼 누구나 다 알 만큼 유명한 노래는 오르골의 핵심 부품인 무브먼트(태엽을 감으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동력 장치)를 시중에서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새롭게 제작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무브먼트를 만들 수 있는 업체가 없더라. 스위스, 일본, 중국, 세 나라가 무브먼트 제작으로 유명한데, 스위스나 일본제로 만들자니 제작 단가가 너무 높아 만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꼭 시도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또 스노볼도 제작해 보고 싶은 아이템 중 하나다. 스노볼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MD로 좋겠다 싶어 이베이에서 스노볼 DIY 키트를 구입해서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웃음) 하지만 스노볼 안에 넣을 오브제를 만들 레진 가격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대량 생산하면 원가가 내려가겠지만, 국내 뮤지컬 시장은 규모가 제한적이다 보니 예상 판매량이 MOQ(최소 주문 수량)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앨빈의 책방을 꼭 스노볼로 만들어보고 싶은데, 최근에 나온 3D 프린터가 내게 한줄기 빛이 되어줬다. 예산 문제를 기술 발달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7호 2017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