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이위종·이준
숨겨진 그들의 자취
오는 5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다룬 뮤지컬 <밀사 - 숨겨진 뜻>이 초연한다. 위태로운 대한제국의 운명을 걸고 일본의 감시 속에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밀사의 파견이 무대에서 재현된다. 서방의 냉대 속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이상설, 이위종, 이준의 활약은 어땠을까. 역사 속 이들의 자취를 살펴본다.
한국의 호소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공식적인 외교 교섭의 통로가 폐쇄되자 대한제국의 대외 교섭은 밀사들을 통한 비밀 외교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밀사들을 통해 유럽 주요 국가에 친서를 보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 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세계 열강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한반도에 개입을 호소했다. 세계 47개국이 모이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위기에 처한 고종에게 다시 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종은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용익에게 헤이그행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용익은 만국평화회의를 앞두고 1907년 갑자기 사망했다. 고종은 새로운 특사단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는데, 법률에 밝은 이준을 새로운 특사로 선택했다. 그러고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던 이상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에 파견했다. 1907년 4월 20일자로 되어 있는 고종의 위임장에는 “한국의 자주독립은 세계 각국이 인정하는 바이고, 한국은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으니 열국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도리다.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외교 대권을 강탈하여 열국과 우의를 단절시킨 행위는 공법 위반이다. (…) 특사단은 우리의 고난과 사정을 회의장에서 피력하여 외교 대권을 회복하고 열국과 우의를 회복하기 바란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07년 6월 4일 이상설과 이준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러시아에 도착했고, 여기서 주러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과 합류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특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로 1907년 러일협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러시아의 외상은 헤이그의 러시아 대표에게 전문을 보내 특사단에게 협조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특사단은 할 수 없이 6월 19일에서야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고, 베를린에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인 「공고사」를 인쇄했다. 결국 특사단은 만국평화회의가 시작된 지 열흘이나 지난 6월 25일에서야 헤이그에 도착했다. 특사단은 일본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주요국 위원에 대한 협조 요청도 거부됐다.
그러나 특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공고사」를 월리엄 스테드(William Stead)가 발행하는 『만국평화회의보』의 지면에 실어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했다. 「공고사」를 통해 열강이 보장하고 승인한 한국의 독립을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을 사용하여 침해한 점을 고발했다. 이러한 「공고사」의 내용은 <런던 타임스>, <뉴욕 헤럴드> 등에도 실렸다. 특히 이위종이 7월 8일 각국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 참석해 유창한 프랑스어로 발표한 「한국의 호소」도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7월 14일 갑작스러운 이준의 순국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국, 미국 등을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 주권 지지를 호소했다. 비록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이들을 통해 고종이 애초에 구상했던 대열강 외교 일부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독립운동의 빛이 된 특사, 이상설
이상설은 과거에 급제한 후 별입시가 되어 궁중에 드나들며 고종을 모셨던 명문가의 자제였다. 러일전쟁부터 을사조약 이후까지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제 황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1906년에는 고종의 오른팔 헐버트와 함께 해외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전후의 민족운동에 적극으로 참여해, 민족운동가 집단으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이상설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기도 했다. 고종은 이상설을 헤이그 특사로 선임했다. 이상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에 실패한 이후 약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며 미국의 정치인과 신문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동시에 각지의 교포들을 결속해 조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격려했다. 이후 그는 파리,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등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특히 러시아와 만주 국경 지방 사이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7년 서거할 때까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한 이상설은 비장한 유서를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러시아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는 유서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고 문고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시베리아에서 잠든 특사, 이위종
이위종은 어려서부터 미국과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로 유럽과 미국의 언어와 생활 방식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은 외교관으로서 반일적인 성향을 띄며 을미사변 이후 경복궁에 감금된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미국에서 소년 시절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 공사관에서 서기생 및 참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아버지 이범진의 외교 활동을 도왔는데, 유럽과 미국의 언어를 몰랐던 아버지를 대신해 문서 작성이나 서양인 면담을 맡아 각국의 실정, 인물 및 국제 정세를 자세하게 파악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이위종은 서울에서 출발한 특사들과 함께 헤이그에서 활동할 특사로 발탁됐다.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위종은 항일 투쟁의 현장인 러시아 연해주로 가, 의병 조직 동의회를 조직하고 일본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인 1914년 유년 시절 파리에서 마치지 못한 군사교육을 계속하고자 블라디미르 군사학교에 입학해 사관 교육을 받고 러시아군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그는 러시아혁명 당시 혁명군 장교로 복무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일본의 첩보 자료에서는 이위종이 소비에트 정부의 동양혁명 책임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모아 반일 활동을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위종의 최후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21년 이후 기록된 자료들에서 이위종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봤을 때, 1920년 시베리아 항일 전선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국에서 눈을 감은 특사, 이준
이준은 동경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여 법률에 남다른 소양을 지닌 인물이었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됐고,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에 가담하기도 했다. 또 상해에서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애초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하려 했던 이용익이 사망하자, 그의 자리를 대신해 이준과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됐는데, 이러한 경위에는 독립운동가 정순만의 존재가 크다고 알려져 있다. 정순만은 상동청년회의 임원이자 을사늑약 반대운동, 을사오적 암살 음모를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그는 1906년 이상설과 북간도로 망명해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했고, 1904년에는 적십자 의연금 사건으로 이준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정순만은 이후 이준과 이상설을 맺어줬다. 이상설과 이준이 고종의 특사로 임명됐지만, 이들이 어떻게 고종과 연결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헤이그 특사는 워낙 비밀리에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이준은 헤이그에서 지병이었던 뺨 종기가 도져 사망에 이른다. 현지 언론은 뺨의 종기를 제거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지만, 정확하지 않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일본에게 독살됐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자살설을, 황성신문은 ‘자살이라는 설도 있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했다. 이준이 세상을 떠난 헤이그의 드 용 호텔은 현재 그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84년 신상옥 감독이 이준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돌아오지 않은 밀사>를 제작하기도 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4호 2017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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