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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더 걸즈> [No.163]

글 |조연경(런던 통신원) 사진제공 |Matt Crockett, Dewynters 2017-04-28 4,247

<더 걸즈>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




시상식 레드카펫에 한 무리의 중년 여성 배우들이 섰을 때 검정 드레스에 노란 해바라기를 달고 나타난 이들의 존재는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그동안 소재나 캐릭터로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중년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운 뮤지컬 <더 걸즈>는 평범한 중년 여성들의 40년 우정과 누드 달력 제작 프로젝트를 밝고 신 나게 그려낸다. 약 20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누드 달력의 주인공 ‘캘린더 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와 연극에 이어 마침내 뮤지컬로 재탄생한 이 작품이 지역 프로덕션의 성공을 발판삼아 런던 웨스트엔드에 입성했다.




캘린더 걸스의 귀환

<더 걸즈>는 영국인들에게 익숙할 ‘캘린더 걸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90년대 말, 잉글랜드 중부 요크셔 지방의 한 마을에서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이 직접 모델로 나서 누드 달력을 제작한 일이 화제가 되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존을 기리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니와 그의 친구 크리스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이 프로젝트는 평소 제빵과 가정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단체이던 여성회(Women’s Institute)의 이름을 걸고 나온 달력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을 받았다. 달력의 판매량은 엄청나서 존의 이름을 새긴 가죽 소파를 병원에 놓으려는 초기 목표를 달성했을 뿐 아니라 상당한 모금액을 백혈병 및 혈액암 연구 단체에 기탁해 연구 진전에 기여하기까지 했다.


새천년맞이 깜짝 달력 사건은 이내 영화화가 결정되어 2003년 나이젤 콜이 연출을 맡은 <캘린더 걸스>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됐다. 이 영화의 각본을 맡았던 요크셔 출신의 팀 퍼스는이후 이 작품을 연극으로 발전시켜 성공적으로 웨스트엔드 무대에 올렸고 전국 순회공연까지 성사시켰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팀 퍼스는 동향 출신의 작곡가 개리 발로우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뮤지컬로 만들었다. 지역 프로덕션으로 시작한 <더 걸즈>는 영국의 지역 감성을 잘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고 이후 런던 웨스트엔드로 옮겨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뮤지컬은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이 어떤 모습으로 한 해를 보내는지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듯이 그려낸다. 영국의 마을 대소사를 관장하는 전국적인 단체인 여성회(WI) 회원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매주 브로콜리나 뜨개질에 대한 강연을 듣는 정기 모임의 모습부터 크리스마스 거리 모금이나 연례 케이크 경연대회 같은 자선 행사가 지역 사회에서 하는 역할과 애니가 갑작스레 암 진단을 받은 남편을 보살피다가 결국 장례를 치르게 되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마을의 연례행사들이 차례로 진행되는 1막은 밝고 즐거운 장면과 쓸쓸한 장면들이 균형 있게 제시되면서 작은 시골 마을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애니와 남편이 함께 정원을 가꾸는 모습, 애니의 친구 크리스가 꽃집을 운영하고 함께 정기 모임에 가서 다른 이웃 여성들과 수다를 떠는 일상의 풍경이 전개됐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상심한 애니를 보며 속을 끓이던 친구 크리스는 꽃집으로 배달된 네덜란드의 튤립 소녀들 달력을 보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누드 달력을 만들어 존을 기리는 기금을 마련하자며 애니의 삶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누드 달력 프로젝트는 세상을 떠난 애니의 남편 존을 위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마을 여성회(WI)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이내 마을 전체를 뒤흔드는 이슈가 된다. 남편들을 비롯한 이웃들은 결국 누드를 못 찍어 이 프로젝트가 실패할 거라고 예상하고, 여성회 지부장도 이 달력이 절대 본부의 허락을 받아낼 리 없다고 코웃음 친다.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애니와 크리스의 40년 우정은 불가능할 것 같았던 누드 달력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처음 누드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크리스가 주저할 땐 애니가 설득해서 이끌어주고, 전국대회 연설장에서 애니가 달력 제작 허가를 요청하다가 말을 잇지 못할 땐 크리스가 달려와 손을 잡아준다. 동네 여성들에게 함께 달력을 찍자고 설득하고, 여성회 달력을 누드로 하겠다는 허가를 받고, 실제로 촬영하는 데까지 난관이 많지만 크리스와 애니는 서로 의지하며 결국 해낸다. 그 사이 애니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친구와 이웃들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고민하고, 크리스는 누드 달력을 찍겠다는 자신을 피하기 시작한 아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서로를 봐온 여성들은 우정과 연대로 위기를 극복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이 뮤지컬은 작은 시골 마을을 뒤흔든 누드 달력 프로젝트를 해바라기처럼 밝고 따뜻하게 그린다. 사춘기 아들은 결국 엄마의 결정을 이해하고, 반대의 입장에 섰던 지부장 대신 그의 딸이 참여 여성들의 용기에 감동받았다며 직접 찾아와 촬영을 돕는다. 이 작품은 어떤 외설적인 시선이나 포장 없이 오직 기금 마련을 위해 옷을 벗기로 결심한 중년과 노년 여성들의 용기를 존중하고, 난생 처음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여성들의 주체성과 해방감까지 따뜻하게 담아낸다.





중년 여성들의 목소리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이 나오는 뮤지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여성들이 앙상블을 이뤄 함께 노래하는 뮤지컬이 드문 것은 사실이다. <더 걸즈>는 한두 명의 주인공이 주도하는 것도 아니고 열 명 이상의 여성들과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노래하며 함께 장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런 모습만으로도 <더 걸즈>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이 작품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심플하고 밝다. 연극과 뮤지컬의 장점을 적절하게 섞어서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음악이 받쳐주면서 분위기를 살려줬다. 1막을 여는 첫 곡 ‘요크셔(Yorkshire)’는 평온한 마을의 풍경을 달력에 대입해서 1월, 2월, 7월 등의 일상을 노래하고, 2막을 여는 곡 ‘데어(Dare)’는 마을 여성회 여성들이 누드 달력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속옷을 벗어 던지는 넘버인데 두 곡이 서로 다른 상황을 노래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밝은 멜로디에 여러 배우들이 화음을 쌓아가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데어(Dare)’는 전국대회 장면에서 리프라이즈 되면서 희망의 기운을 전한다. 이런 넘버들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주면서 마을 이웃들을 조화롭게 끌어안고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해준다.


1막이 시작될 때 소소하고 평범하면서도 차분하던 마을 풍경은 달력을 다 찍고 마련한 기금으로 기념 공간을 조성하는 2막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더 밝고 경쾌하게 변한다. 그동안 다양한 작품에서 주조연 가리지 않고 극을 탄탄히 잡아주던 노련한 배우들이 모인 만큼 성량이나 연기 면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배우들이 조화롭게 쌓아가는 앙상블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요크셔 사투리로 풀어내는 위트 있는 대사가 작품을 꽉 채우고 있어서 쉼 없이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더 걸즈>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실수해도 괜찮다는 믿음


상업 장르지만 다양한 소수인종과 문화를 대변해 온 뮤지컬이 이번엔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조명 받았던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끌어안았다. 이 여성들을 한 가지 이미지에 국한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성을 살린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그만큼 이야기가 다채로워졌다. 자신의 얘기처럼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극장을 찾은 중년 관객들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이 작품은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들에 국한된 주제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더 걸즈>는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한 무리의 백인 중년 여성들이 누드 달력을 찍은 얘기에 불과할지 몰라도 결국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고 있다. 이 뮤지컬의 작가와 작곡가는 언젠가 함께 뮤지컬을 만들자고 약속했고 마치 운명처럼 그 뮤지컬이 결국 <더 걸즈>가 됐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서인지 이 뮤지컬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우정과 긍정적인 믿음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지난 40년, 60년간 지켜온 체면 때문에 주저하다가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전에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이 프로젝트가 실수로 기억될까 봐 망설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그들의 마음이 전례 없던 기금 마련을 이끌어냈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노래하는 이 이야기 속 중년과 노년의 여성들이 느끼는 해방감과 기쁨이 고스란히 관객석에 전해졌고, 코믹한 장면들을 보며 정신없이 웃는 사이 긍정적인 기운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영국의 지역색을 드러내면서도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은 <더 걸즈>의 상징인 노란 해바라기가 런던 웨스트엔드에 자리한 극장 외벽을 오래도록 장식하고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3호 2017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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