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대로 산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격언이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져 왔다. 가상 세계의 허구 인물인 캐릭터 경우도 이름이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캐릭터 이미지를 형성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작품 완성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가령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보여주는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이 카사노바라면 어떨까. 극이 진행되는 내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최후의 반전이 있는 건 아닐지 의심하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이름에는 신분이나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 계급 또는 출신 성분 같은 정보가 담겨있기도 하다. 뮤지컬에서 대표 왕자님 캐릭터로 꼽히는 <오페라의 유령>의 젊은 자작 ‘라울’이 프랑스 귀족 남자의 이름인 것처럼 말이다.
캐릭터 이름의 조건
작가들이 생각하는 좋은 캐릭터 이름의 조건은 무엇일까?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작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름에 캐릭터의 성격이나 운명이 상징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름만 들어도 성격이 짐작될 수 있도록 캐릭터 성격에 기반을 두고 이름을 짓는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남북군의 우정을 그린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한정석 작가의 말이다. 남북 군인이 함께 갇힌 무인도 탈출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북한 소년병 ‘순호’는 겉보기엔 온순해 보이지만 속은 단단한, 외유내강 기질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과부를 짝사랑하는 남한군 석구는 단순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라 ‘石’(돌 석)과 바보 캐릭터의 상징인 영구의 ‘구’가 합쳐져 탄생했다. 의문의 살인 사건 이후 기억을 잃은 네 남매의 이야기 <블랙메리포핀스>의 주인공들도 이름에 성격적인 비밀을 담고 있다. 살인 사건의 핵심에 있는 유일한 여자 형제 안나는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회피하려는 심리인 방어기제를 연구한 정신 분석학자 프로이트의 막내딸 이름인 안나 프로이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고(기억 ‘안나’의 안나이기도 한), 아이들 유모이자 미스터리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메리가 따뜻한 보모의 대명사가 된 캐릭터 메리 포핀스에서 따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여담으로, 둘째 헤르만은 작가가 사춘기 시절 몹시 좋아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에서 따왔다고.)이다.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하는 동시에 관객들의 뇌리에 쉽게 기억될 수 있도록 예쁘고 불리기 좋은 어감의 이름을 찾는 것도 작명의 중요한 과제다. 남자 기생 풍월들의 이야기를 그린 <풍월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풍월의 이름이 부르기 편하고 기억하기 쉬운 외자, ‘열(悅, 기쁠 열)’인 이유다. 열과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인물의 이름 또한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을 고민 한 끝에 죽어서 사랑을 갚는다는 의미의 ‘버릴 사(舍)’, 짊어진다는 뜻의 ‘멜 담(擔)’을 써 ‘사담’이라고 붙였다. 풍월들이 모여 있는 기방 운루를 지키는 캐릭터의 원래 이름은 산처럼 늘 한자리에서 우직하게 여왕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붙인 ‘산’이지만, 극 중에서 딱 한 장면을 제외하곤 모두 운루의 장을 뜻하는 ‘운장’으로 불리는 이유도 관객들이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풍월주>를 쓴 정민아 작가는 “평소에 특이한 지명이나 이름을 발견하면 따로 만들어둔 인명사전에 적어 놓고 대본을 쓸 때 활용한다”고 한다.
캐릭터가 자체가 특정한 집단 또는 세계를 상징하는 경우, 그 의미를 상징하는 뜻을 담아 이름을 짓기도 한다.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하는 팩션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 ‘휘’가 바로 그러한 예다. 휘는 명성황후에 때문에 어머니와 정혼자를 잃지만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인물로 백성을 상징하는 존재다. 대본을 쓴 장성희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름에 쓴 ‘휘’는 ‘諱(숨길 휘, 꺼릴 휘)’로, 첫 번째 의미는 ‘숨기다’ 또는 ‘꺼리다’이지만 높은 사람 이름에 쓰는 한자어로 우리의 조상이자 백성을 대표하는 높은 존재의 이름을 무엇으로 쓸까 고민한 끝에 탄생한 이름이다.
한재은 작가가 말하는
<팬레터> 주인공들의 작명 비화
히카루는 이름 때문에 성별 오해를 사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어울릴 만한 중성적인 일본 이름 가운데 작품의 시간적 배경을 고려해 과거와 현재에 두루 쓰이는 예쁜 이름을 고민했다. 작명 당시 최종 후보에 있었던 이름이 ‘히카루(光, 빛 광)’와 ‘카오루(薰, 향풀 훈)’였는데, 캐릭터 성격이 예술적인 영감을 주는 뮤즈라는 점, 또 어두운 시절의 빛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향보다는 빛이 이미지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히카루’로 이름을 결정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사나 대사에 ‘섬광’, ‘빛’의 상징을 활용했다. 처음엔 히카루의 쌍둥이 같은 캐릭터 세훈의 이름으로 ‘히카루’의 한자인 ‘빛 광’을 쓸까 했는데, 이름에 ‘광’을 쓰면 어감이 예쁘지 않고, 너무 쉬운 선택 같아서 앞서 언급한 최종 후보 ‘훈(카오루)’을 사용해 세훈의 이름을 짓게 됐다. 세훈의 ‘세’는 가제였던 ‘섬세한 팬레터’에서 따왔는데, 캐릭터의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는 데 적절한 어감이라고 생각해 처음부터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려고 정해놓고 있던 한자였다. 이 한자 조합이 실제로 이름에 쓰이진 않지만, ‘옅은 향’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인기 아이돌 엑소 멤버와 전 서울 시장의 이름과 겹쳐 잠시 당황한 적도 있지만, 나이를 뛰어넘어 사용되니 적용 시대가 넓어 1930년대에 있었을 법한 가능한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세훈의 동경의 대상이자 히카루와 사랑에 빠지는 김해진은 캐릭터의 모델이 된 소설가 김유정의 이름처럼 여자의 이름으로도 쓰이면서 다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줄 수 있는 이름을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다. 해진은 여자 이름에 많이 쓰이는 ‘혜진’과 발음이 유사하면서 ‘해’가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발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팬레터>의 세 주인공 이름의 한자 표기는 히카루(光), 정세훈(鄭細薰), 김해진(金海振)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