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의 동명의 시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희대의 러브 스토리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각색해 무대화한 작품으로, 백석의 시를 차용한 가사들로 기대를 모은다. 불멸의 시인 백석은 지금도 주옥같은 시로 후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며,시인들이 사랑하는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향토적인 색채가 돋보였던 시인. 당대를 주름잡은 모던보이었지만, 해방 이후 월북해 남과 북 어디에도 인정받지 못한 채 농장의 일꾼으로 남은 생을 보내야 했던 비운의 시인.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백석의 시와 사랑 이야기를 들여다 보았다.
모던보이의 아름다운 시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정기행으로,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할 때까지 이 이름을 썼다. 백석이 다닌 오산학교는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시인 김소월이다. 그 때문인지 백석은 선배인 김소월의 시를 탐독하며 그를 매우 동경했다. 이후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1년간 고향에 머물며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해 문인의 길에 발을 디뎠다. 그것이 바로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당선된 「그 모(母)와 아들」이다.
백석은 집안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동향 출신의 사업가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야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를 진학한 백석은 그곳에서 틈틈이 시를 읽고 습작했다. 특히 일본 문학계를 풍미했던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 영향으로, 이후 발표한 시집 『사슴』에 실린 작품들이 대부분 단시이거나 산문 형태의 시였다. 백석은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스물세 살 4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그야말로 모던보이였다. 큰 키와 헌칠한 외모,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영어에 능통한 지식인이었고, 서구와 일본의 현대시를 수용한 모던 작가였다. 1934년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한 그는 틈틈이 조선일보에 외국 수필을 번역하고 단편 소설도 발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1936년 백석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시집 『사슴』을 출간하며 눈길을 끌었다. 100부 한정판이었던 이 시집은 33편의 시를 싣고 있었다. 이는 발간되자마자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고,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경림, 윤동주 등이 백석의 시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시는 모더니티를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모국어의 힘을 깨닫게 해주는 특별함이 있었다.
백석과 자야, 영원한 사랑
1936년 백석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떠났다. 그리고 함흥영생고보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백석은 함흥에서 자신의 사랑 자야를 만났다. 영생고보 교사들과 요릿집 함흥관을 찾은 백석은 그곳에서 한 기생을 유심히 보게 된다. 백석은 진향이란 예명의 그 기생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고 말없이 술잔을 받았다. 그리고 술에 취한 백석은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 따위는 없을 거야.” 이렇게 두 사람은 불꽃 같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하루는 잔향이 백화점에 갔다가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을 구입했는데, 백석이 이를 한참 동안 뒤적이더니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단다.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자야’라고 부를까 해. 어때?”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계속되었지만, 백석은 부모님의 강요로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해야 했다. 토라진 자야를 위해 백석은 만주로 떠나 같이 살자고 제안하지만 자야는 거절했다. 그리고 백석 몰래 짐을 꾸려 경성으로 떠나 청진동에 집을 마련했다. 그것이 백석과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석은 수소문 끝에 자야의 집을 찾아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몇 달 만에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함흥으로 가야했던 백석은 자야에게 시 한 편을 내밀었다.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한 번은 자야가 명동에 나갔다가 백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넥타이를 선물했는데, 백석이 날마다 그것을 매고 다녔다고 한다. “이 넥타이 속에 당신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아.”
백석과 자야는 청진동 집에서 1년 남짓 동거생활을 했다. 하지만 백석은 또다시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두 번째 결혼을 했고, 자야는 그를 원망하며 펑펑 울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자야는 백석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이런 자야에게 백석은 같이 신징으로 떠나자는 제안을 하지만 단호히 거절한다. 우는 자야를 뒤로 하고 백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이때가 1939년, 백석과 자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백석은 북한에서 가족을 꾸리고 오로지 번역 작업에만 매달렸다. 이 무렵 자야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요정을 차렸다. 백석은 북한 문학계의 주류와 거리를 두면서 번역이라는 우회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러다 1956년에 들어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등을 발표하며 다시 창작을 시작했다. 노골적인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백석을 아동문학의 길로 이끌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던 중 1957년 백석은 ‘학령 전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리고, 1959년 북한의 최고 오지인 삼수군에 파견되어 목장에서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낸다. 한편 자야는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고 당시 1000억 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길상사다. 자야는 생전에 일 년에 단 하루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그 날이 바로 백석의 생일이었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흰 바람벽이 있어」
1941년 일제 당국의 강제 폐간 조치에 의해 종합문예지인 <문장>, <인문평론> 등이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이는 작가들이 조선어로 작품 활동하는 것을 막으려는 일본의 조치였다. 백석은 <문장> 폐간호에 「흰 바람벽이 있어」를 비롯해 「국수」, 「촌에서 온 아이」를 발표했다. 이 시는 고향을 떠나온 화자의 고백으로 발화되며, 당시 백석의 현실인식과 고뇌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석의 시구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인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가 담긴 명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은 북한에 남아 있으면서도 자신의 시를 귀하게 여기는 친구 허준에 의해 남한의 잡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시로 1948년 10월 <학풍> 창간호에 실렸다. 민족적, 토속적인 상상력이 두드러진 백석의 대표작이다. 그는 고향의 지명이나 사투리 등을 그대로 시에 옮겨 적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학풍>은 소식란에 1948년 말 백석의 두 번째 시집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백석과의 통로였던 허준이 월북함에 따라 무산된다. 민족 분단으로 인해 남한 정부가 월북 작가에 대해 날카로운 각을 세웠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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