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NOW IN NEWYORK] <컬러 퍼플> [No.155]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사진제공 |Matthew Murphy 2016-08-11 5,784

무겁지만 희망적인 보라색  

<컬러 퍼플>




작품성을 인정받는 <컬러 퍼플>


<해밀턴>으로 시작해 <해밀턴>으로 끝난 2016 토니상에서 자기 자리를 조금이라도 지키는 데 성공한 단 하나의 작품은 올해 최우수 리바이벌 부문을 수상한 <컬러 퍼플>이다. 흑인 소설가이자 인권 운동가인 앨리스 워커가 1982년에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인데, 국내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하고 우피 골드버그가 출연한 1985년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작 소설은 1900년대 초반 미국 남부 농장에 사는 흑인들을 주인공으로, 가부장적이고 폭압적인, 또는 무능력하거나 무책임한 남자들 사이에서 맺어진 흑인 여성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와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뮤지컬 <칼라 퍼플>은 극작가인 마샤 노먼이 극을 쓰고, 브렌다 러셀, 앨리 윌리스, 스티븐 브레이가 함께 작곡과 작사를 맡았는데, 200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후 세 차례에 걸쳐 성공적인 미국 투어를 마쳤다. 2013년에는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올리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은 극장 메니에르 초콜릿 팩토리 시어터에서 존 도일의 연출로 새로운 프로덕션을 꾸린 바 있다. 지난 2015년 겨울에 오픈한 이번 리바이벌 공연은 2013년 영국 프로덕션이 뉴욕으로 온 것으로, 영화 <드림걸즈>의 에피 역할로 인정받았던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의 제니퍼 허드슨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제니퍼 허드슨은 지난 5월에 하차했지만, 헤더 헤들리라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가 그녀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호평을 받고 있다.


제목인 ‘보라색’, 또는 ‘자색’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보랏빛 향기를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보라색은 가볍고 여리여리한 연보라가 아니라 진한 자색의 느낌이 더 강하다. 14세의 흑인 소녀 씰리가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의 모습과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보라색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은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 씰리에게 슈그 에이버리가 앞에 있는 보랏빛 꽃을 보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감사해야 한다며 ‘컬러 퍼플’을 부를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보랏빛 향기와는 현저하게 다른 의미의 보랏빛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상상할 수 없을 어려움들을 겪었을 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있는 들판의 보랏빛은 나를 위한 절대자의 배려라는 걸 기억하고 감사하자고 노래하는 슈그의 태도는 오랜 노예 생활을 거치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지켰던 흑인 사회의 전통의 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색은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색깔이 된다. 아픔이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한’과도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한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절대자를 통해 그 아픔에 더 이상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상징한다.



흑인 소녀의 자아 찾기


공연이 시작하면 갈색 톤의 무대 중간에 씰리와 그녀의 동생 넬리가 앉아서 손뼉치기 놀이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의 놀이는 얼마 안 가 신 나는 멜로디의 교회 찬송에 묻혀 버리는데, 관객들은 마을 사람들의 가십을 통해 씰리가 그녀 아버지의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찬송이 진행되는 동안 씰리는 아이를 낳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아이를 씰리에게서 떼어놓는다. 두 아이를 다 잃은 씰리는 마침 결혼 상대를 찾고 있던 미스터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게 된다.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미스터의 집에서 씰리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는데, 씰리가 집을 떠난 후 아버지는 넬리에게 접근한다. 넬리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씰리의 집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씰리와 넬리가 함께 있는 좋은 시간도 잠시, 미스터가 넬리에게 접근하고, 결국 넬리는 편지를 쓸 것을 약속하며 도망치듯 씰리를 떠나게 된다. 넬리가 떠나고 씰리는 또다시 의지할 데 없이 혼자 남겨지지만, 미스터의 아들인 하포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소피아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다. 소피아는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조용한 성격의 씰리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싫은 건 절대 싫다고 얘기하는데, 하포와 미스터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소피아를 보면서 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스터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소피아는 결국 중간에서 자기편을 들어주지 못하는 하포를 떠난다. 그러고 나서 씰리 앞에 슈그 에이버리라는 가수가 등장하는데, 슈그는 미스터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헤어져야만 했던 여자다. 처음 씰리와 슈그 사이에 어딘가 모를 긴장감이 드러나지만 둘은 금세 서로를 이해하고 자매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씰리는 슈그를 통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아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1막은 씰리가 미스터가 숨겨놓은 넬리의 편지를 알게 되면서 막을 내린다. 2막은 씰리가 넬리의 편지를 통해 동생의 사랑을 깨닫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씰리는 동생의 소중한 편지들을 숨겨놓고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미스터에 대한 분노로 집을 떠나 바지 디자이너로 살아간다. 그러다 구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살게 된 씰리가 넬리와 버려진 줄 알았던 자신의 아이들과 재회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막을 내린다.



미니멀하지만 효과적인 무대, 의상, 조명, 그리고 배우


존 도일이 가장 최근에 크게 인정받았던 작품들은 배우가 악기 연주를 직접 맡는 액터 뮤지션 스타일이거나 미니멀하고 스타일리시한 분위기였는데, <컬러 퍼플>은 후자에 속한다. 무대의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겹겹이 세워진 나무판자 벽에 붙어 있는 의자들이다. 장면에 따라 이 오브제는 벽에 다시 걸리기도 하고, 배우들이 앉는 의자나 철장으로 쓰이면서 다양한 역할을 한다. 특히 벽에 걸려 있는 설정은 앨리스 워커가 원작 소설에서 얘기한 것처럼,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뜬 흑인들의 영을 기리고 기억하게 하는 상징성을 띤 듯 보여 특히 마음이 짠했다. 씰리의 출산 장면과 씰리가 넬리의 편지를 읽으면서 편지 속의 아프리카를 상상해 보는 장면에서 사용된 패브릭 역시 인상적이었다. 갈색 톤의 무대와 대조되는 원색의 천은 아프리카를 상상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출산 장면에서 배에 두르고 있던 천을 몸짓으로 빼내면서 배냇저고리를 입은 아기처럼 만드는 연출은 작품에 연극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단순하기 때문에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무대를 채운 것은 조명과 의상이었다. 특히 의상의 색 대비가 시각적으로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슈그 에이버리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색상의 옷을 입던 씰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씰리가 미스터를 떠나 자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찾아 바지를 만들어 입히기 시작하면서는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 원색이 갈색의 무대와 조화되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조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적절한 분위기를 만들어줬고, 무겁지만 어둡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효과적으로 해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제니퍼 허드슨의 바통을 이어받은 헤더 헤들리가 나왔는데, 그녀의 마르고 선이 굵은 외모는 조금은 냉소적이고 날카롭지만 씰리를 통해 따뜻함을 회복하는 슈그 에이버리에 잘 어울렸다. 소피아 역을 맡은 다니엘 브룩스는 여성 보호 감호소 이야기를 다뤄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넷플릭스의 시리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보통 OITNB로 줄여서 부른다)에 나와서 잘 알려진 배우로, 이번 작품이 브로드웨이 데뷔였는데 큰 무대 경험이 적은 것에 비해 캐릭터 소화력과 무대 장악력이 엄청났다. 소피아가 앞서 설명한 대로 자기주장이 워낙 강한 캐릭터긴 하지만 극의 중간에 상황이 좀 달라지면서 소피아 특유의 성깔을 잃는 부분이 있는데, 조용히 앉아 있다가 웃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브로드웨이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신시아 에리보는 원래 영국에서 활동을 하는 배우 겸 가수로, 말 한마디 못하고 두려움과 자신 없음으로 점철되어 있는 씰리가 그녀의 삶 속에 등장한 여러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삶의 주인이 되어 가는지 그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품의 성격상 씰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어린 시절부터 장년 시절까지의 스펙트럼을 소름 끼치게 잘 표현해 냈다. 특히 씰리가 2막 중간에 미스터를 떠나겠다고 하며 저주를 퍼부을 때나, 마지막에 미스터가 씰리에게 진정 어린 사과를 하며 다시 결혼해 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씰리가 단호하고 쿨하게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할 때, 관객들이 환호하는데 신시아 에리보가 씰리로서 얼마나 관객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명확하게 보였다.



남자 배우들의 역량이 특별히 아쉬웠던 것은 아니지만 극이 씰리를 중심으로 여자들의 관계, 소위 말하는 ‘시스터후드’에 좀 더 집중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세 명의 여배우가 훨씬 더 돋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덕션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세 여인의 이야기와, 이 세 여인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는 남자들의 이야기의 밸런스를 잘 맞췄다는 데 있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씰리의 남편 미스터나, 강한 여자인 소피아를 사랑하는 남자로서 자기 아빠의 강압적인 태도를 벗어나는 하포, 그리고 슈그 에이버리의 자유로움을 품어주는 그녀의 남편 그래디까지, 이 세 명의 남자들은 씰리와 소피아, 그리고 슈그의 이야기를 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인물이 평면적인 것도 아닌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외부적인 요소로서 작용하고 중심에 있는 시스터후드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다. 가십을 퍼트리는 마을 사람들의 역할 역시 세 명의 아줌마가 하는데, 가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인 코멘터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역시나 여성의 목소리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런 의미에서 <칼라 퍼플>은 같은 시즌 올라간 흑인이 주인공인 뮤지컬 <셔플 어롱>과는 또 다른 여성주의적인 의의를 지닌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 인종 갈등


공연을 보러 간 날, 뉴욕에서는 유색인종에게 특히 더 엄격하고 폭력적인 미국 경찰들의 과잉 진압에 대한 대대적인 시위가 열렸다. 오바마가 대통령을 맡고 있는 지난 8년 동안 인종 문제가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막상 오바마의 퇴임과 곧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뉴욕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인종 갈등으로 파생된 문제들이 더 심각하게 번져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보고 나오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씰리가 겪은 아픔들은 1900년대 초반 노예제가 존재해 인종주의적인 시각이 당연시 여겨졌던 시대상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누군가는 씰리라는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했다. 작품이 끝나고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한 배우들에게, 특히 그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씰리에게, 눈물로 기립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이 있는 극장 속 작은 세계와 바깥 현실 세계의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던 이유는 뭘까. 모쪼록 백인 위주, 남성 위주의 이야기가 특히 중심을 이루고 있는 브로드웨이에 <컬러 퍼플>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어 주면 좋겠다. 작은 움직임들이 언젠가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