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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섬세한 재능을 가진 천재 라흐마니노프 [No.155]

글 |박보라 2016-08-10 5,701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을 그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초연한다. 작품은 라흐마니노프가 신곡 실패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려 고통받은 후 치유되기까지 여정을 그렸다. 뮤지컬이 조명한 라흐마니노프의 삶 이외에도 실제 그는 천재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사랑하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아름다운 음악을 남긴 그의 인생을 짚어본다.




고국을 그리워한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작곡가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는 사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명성을 먼저 얻었는데, 9세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3년 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수재다. 1905년 모스크바 황실 극장 지휘자에 이름을 올린 그는 미국 및 유럽 연주 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했다. 연주와 지휘에만 몰두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스웨덴 연주 여행 도중 독일 드레스덴으로 망명했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공화정 지지자로, 이런 영향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독일에서 삶을 이어 나가던 라흐마니노프는 보스턴 교향악단의 초청을 계기로 미국에 방문,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가 미국으로 1935년 제2의 망명을 떠난다. 그는 약 25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가족과 몇몇 친구들과의 친분을 유지했고 평생을 고국 러시아와 러시아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는 해마다 유럽에서 순회 연주를 하며 러시아로 돌아가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1943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난다.


망명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주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는데, 생계를 위한 연주가로 활동하면서 창작에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에 머물던 시기의 활발한 작곡 활동과 달리 망명 후에는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코랠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곡 제3번’, ‘교향적 춤곡’ 등 소수의 작품만 남겼다.




섬세한 아름다움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아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다양한 악곡 형식과 장르를 포괄하지만 슬라브적인 경향을 짙게 나타냈고,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을 표현했다. 특히 198cm에 이르는 키, 13도의 음정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만큼 큰 손 등 듬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정열적인 연주와 기교는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콥스키 등의 작품에 그만의 독자적인 해석을 불어넣었다. 그가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된 비결은 바로 커다란 손에 있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손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큰 탓에 일반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전설적인 기교와 13도의 음정까지도 정확하게 연주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해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음악학교에 재학하면서는 절대음감과 기억력으로 천재성을 드러냈다. 일례로 그는 악보를 한 번 훑어보고도 능숙하게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는데, 이런 성격 탓에 그는 평생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웃 사람에게 귀한 꿀을 선물하려고 나섰지만, 꿀단지를 문 앞에 두고 돌아왔다. 이유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폐가 될 것 같아서였다. 이런 라흐마니노프의 성격은 불우한 유년 시절에 형성됐다.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부유한 장군의 딸과 결혼했지만, 도박과 여성 편력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의 어머니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기에 이르렀다. 쓸쓸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 탓에 라흐마니노프는 늘 말이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그는 타고난 감성과 재능에도 자신을 존중하는 대신 평생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취미 중 하나는 드라이브였다. 그는 1914년에 구입한 자동차에 온갖 애정을 쏟았다. 심지어 라흐마니노프는 자동차에 약간의 상처가 나는 것도 견딜 수 없어해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자동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지 않았으며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차를 맡기지 않았다. 이 밖에도 라흐마니노프는 옷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했는데, 특히 좋은 슈트에 대한 사랑은 패션계의 어떤 인사보다도 유명했다. 그는 늘 영국산의 최고급 슈트를 착용했고, 콘서트 후 관객과의 만남에서 한 관객이 슈트에 대해 칭찬을 하자 이에 대해 매우 흡족해 했다는 일화도 있다.




운명적인 만남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교향곡 제1번 d단조 Op.15’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지만 완벽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신곡에 엄청난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혹평에 깊은 실의에 빠졌고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만다. 이 곡의 실패 원인으로는 다양한 이유가 제기됐는데, 지휘를 맡은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해 있어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이유다. 또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에게 배타적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은 무리였다는 평도 있다. 결국, 이 곡의 실패로 새로운 곡을 창작하는 데 자신감을 잃은 그는 거의 3년간 아무 곡도 쓰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수소문 끝에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았다. 니콜라이 달 박사는 그에게 ‘자기암시 요법’이라는 처방을 내렸는데, 이는 환자에게 가벼운 최면을 걸어놓고 그 귓가에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협주곡은 성공을 거둡니다”라고 듣거나 말했고 3개월이 지나자 그는 서서히 자신감을 찾기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마침내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를 발표해 대성공을 이뤘다. 작곡가로 명성을 회복한 그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이런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 박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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