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사이코패스
지난 4월 21일 정식 개막해 순항하고 있는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미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호평받고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으로 나온 동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은 미국 작가 브렛 이스턴 엘리스가 1991년에 발표한 소설이 원작이다. 1980년대 말 호황기이던 뉴욕을 배경으로, 잘나가는 젊은 은행가가 밤에는 끔찍한 연쇄 살인범으로 돌변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뒤틀린 인간성과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2000년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013년에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져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여정은 한국에서 지난 몇 년간 화두로 떠올랐던 원소스멀티유즈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낯설지 않은 1980년 말의 이야기
작품의 기본적인 구성은 원작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는다. 1989년을 배경으로, 패트릭 베이트만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비슷한 결말을 맺는다. 극장에 들어서면 객석과 무대 사이에 스크린이 내려와 있는데, 그 뒤로 한쪽 벽에는 비디오장이, 다른 쪽 벽에는 얼룩말 그림의 큰 액자가 걸려 있는 모노톤의 무대가 보인다. 무대 앞은 넓고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인데, 전반적으로 구식 텔레비전 수상기를 연상시킨다. 공연은 TV 정규 방송이 끝난 후 나오는 화이트 노이즈 화면이 보이다, 비명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피가 튀기면서 시작한다. 잠깐의 암전 후에 무대에 다시 조명이 켜지면 패트릭 베이트(뮤지컬 <블러디 블러디 앤드루 잭슨>에서 디바 앤드루 잭슨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던 벤자민 워커 분)가 속옷 차림으로 태닝 머신 앞에 서서 탄탄한 자신의 몸을 감상하고 있다. 그가 자랑하는 것은 몸만이 아니다. 1989년 당시의 전자 기기들이나 - 자동으로 뒷면으로 넘어가는 기능이 있는 워크맨, 분할 화면이나 슬로 화면을 볼 수 있는 TV 등 - 패션 센스를 통해 그의 성공적인 삶을 드러내는데, 패트릭 베이트가 집 밖으로 나서면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빨간색의 톤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해 그를 지나치며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영혼을 팔아가며 살아가는 뉴욕의 삶에 대해 노래한다.
패트릭이 회사에 도착하면 그와 비슷한 정장 차림의 금융인들이 자신의 명함이나 패션 트렌드, 최고급 레스토랑에 대해 노래한다. 그의 여자친구 에블린은 패트릭의 생일을 준비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온갖 럭셔리 브랜드를 열거하는 리스트 송(같은 종류 것들을 열거하는 노래로, 라임을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You Are What You Wear’를 부르는데, 이는 작품의 유머 백미 중 하나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갈등의 중심에는 패트릭이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폴 오웬(영화와 소설에서는 성이 다르다)이 있다. 패트릭은 폴 오웬을 살해한 후 그 집에서 여자 여럿을 추가로 죽이고 혼란스러워하면서 형사에게 음성 메일을 남겨 자수한다. 그러나 우연히 클럽에서 만난 형사는 자신이 직접 폴 오웬을 만났고 그의 집에서 살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패트릭의 말을 웃어넘긴다. 더욱 혼란에 빠진 패트릭은 폴 오웬의 집을 찾아갔다 깔끔한 상태로 있는 그 집을 팔려고 내놓은 부동산 중개업자를 만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패트릭은 혼란 속에 마치 혼자 남겨진 듯한, 인간 같지 않게 느껴지는 자신의 상황이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노래 ‘This Is Not An Exit’를 내레이션하듯 부른다. 그리고 “나는 스물일곱 살이고, 뉴욕에서 살고 있다. 내게 패트릭 베이트만으로 사는 삶이란 바로 이렇다”는 마지막 가사가 끝나면 공연은 막을 내린다.
사이코패스는 노래할 수 있는가
<아메리칸 사이코>에 대한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사이코패스인 남자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이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었다. 뮤지컬에서 노래는 관객들이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도구인데,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감이 어려운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가진 패트릭이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게 성격상 말이 되는지, 또 어떻게 해야 말이 되게 노래를 시킬 수 있는지가 일차적인 질문이었다. 곡 작업을 의뢰받은 작곡가 던컨 쉭 역시 처음에는 이 같은 의구심을 품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브로드웨이를 사로잡았던 던컨 쉭은 음악 잡지 <롤링 스톤스>와의 인터뷰에서 패트릭 베이트만이 무대에서 노래한다는 게 처음에는 상상이 안 갔지만, EDM(Electronic Dance Music)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자음이 심하게 섞여서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의 EDM은 사회와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패트릭이 사는 세상을 표현하기에 딱 들어맞는 사운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던컨 쉭의 노랫말 역시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회와 일반적인 얘기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물두 곡의 뮤지컬 넘버 가운데 EDM 스타일이 아닌 곡은 전체 앙상블이 장송곡처럼 부르는 ‘In The Air Tonight’과 패트릭의 비서 진이 자신의 마음을 관객에게 고백하며 부르는 ‘A Girl Before’, 그리고 패트릭이 마지막에 부르는 ‘This Is Not An Exit’ 등 몇 곡 되지 않는다. 또한 앞서 얘기한 것처럼, 패트릭과 에블린, 진이 함께 부르는 ‘If We Get Married’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곡의 가사들이 인물의 내면 설명보다는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패트릭이 엔딩 신에서 부르는 노래도 개인적인 소회라기보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희망 없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노래다. 노랫말에서는 우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하지만, 사이코패스가 뮤지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 사회와 유리된 개인의 일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었고, 사실 패트릭이 저지른 살인들이 결국 그의 망상 속에 있는 사건이라는 점도 패트릭의 노래를 가능케 한 이유다.
센스 있는 비주얼
무엇보다도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비주얼이다. 팝부터 오페라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린 페이지의 안무는 전형적인 1980~90년대의 클럽 댄스를 기반으로 하는데, 어떻게 보면 촌스럽지만 기발하다. <블러디 블러디 앤드루 잭슨>의 상징이 된 붉은 빛 조명을 디자인한 저스틴 타운젠드의 조명, 그리고 1980년대의 의상 컨셉을 제대로 살리면서,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색의 조합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준 카트리나 린지의 의상 또한 작품의 비주얼적 완성도를 높인다.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는 1980년대 말의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데, 진지한 1980년대라기보다는 패러디가 가미되고 2016년에 맞게 업데이트된 1980년대 느낌이다. 특히 앙상블이 무대에 등장하는 신에서 종종 쓰이는 LED 조명이 설치된 테이블 대도구나 패트릭과 같이 일하는 금융맨들이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 사용되는 네온 조명과 네온 의상들은 1980년대와 2016년의 조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대는 양쪽에 원형 회전무대를 설치해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는데, 뉴욕의 길거리를 연상시키는 장면에서는 뒷면과 옆의 벽이 들려 올라가고, 다른 장면들에서는 프로젝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공간을 지정해 주는 식으로 작품 전체에 기계적인 느낌을 살렸다. 공연 내내 패트릭은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러 가야 한다면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곤 하는데, 그런 핑계는 마치 TV 수상기처럼 보이는 무대 공간,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전파음과 뒷벽 전체에 비치는 화이트 노이즈 화면과 함께 패트릭의 삶이 사실은 현실이 아니라 상상 속, 혹은 비디오 속의 이야기라는 복선을 준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에선 종종 간과되는 음향디자이너(<젠틀맨스 가이드 투 러브 앤드 머더>, <리틀 나잇 뮤직> 등에 참여한 브로드웨이 베테랑 댄 모세스 슈리어)의 역할이 특히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연출을 맡은 루퍼트 굴드는 런던 알메이다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을 거치면서 미국의 엔론 사태를 비판하는 <엔론> 같은 유수의 연극을 연출했던 경력이 있다. 미국과 뉴욕의 상류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는 <아메리칸 사이코>가 굴드의 첫 뮤지컬인데, 작품의 성공적인 초연을 밑거름 삼아 지난 2014년 영국에 올라간 신작 <메이드 인 대거넘(Made in Dagenham)>을 맡아 호평받기도 했다.
작품의 성과와 한계
<아메리칸 사이코>는 원소스멀티유즈의 성공적인 사례다. 원작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장르적 특성에 맞게 구성 요소들을 바꿔 기존의 내용과 새로운 포장이 유기적으로 맞아떨어지게 잘 만들어냈다. 뮤지컬 <아메리칸 사이코>의 가장 큰 강점이 음악과 비주얼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아주 의미가 깊다. 뮤지컬의 또 다른 성과는 이야기를 너무 무겁게 풀어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말의 최신형 전자기기에 대해 뿌듯하게 말하는 패트릭,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자기 손에 들린 센스 있는 명함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 그의 친구들, 럭셔리 브랜드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마치 하이 패션 브랜드의 잡지 모델 같은 포즈를 취하는 에블린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뜬금없이 패트릭의 아파트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는 설정으로 등장하는 난쟁이 톰 크루즈에 이르기까지, 작품 전반에 걸쳐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고, 그런 의미로 브로드웨이 연쇄 살인범 뮤지컬의 고전인 <스위니 토드>보다 많이 웃긴다. 작품을 뮤지컬로 옮기면서 뮤지컬이라는 틀과 2016년의 관객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많이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원작이 지닌, 잔혹성에서 오는 깊이는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작품 전체에서 대놓고 저지르는 살인 장면은 두 번 나오고, 연쇄 살인을 마구잡이로 벌이는 시퀀스가 한 번 있는데, 이 장면들을 안무를 통해서 표현해 낸 것이 효과적이긴 했지만 끔찍하기보다는 멋있었다. 무대에서 보이는 폭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화보다 임팩트가 적었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인 패트릭이라는 인물의 가장 중심적인 성격이 인간과 사회가 품은 극도의 잔인함이라는 점에서, 임팩트가 적은 폭력은 곧 인물의 임팩트가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작품의 무게도 가벼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원작 소설과 영화를 뮤지컬로 옮기기 위해 부단히 고민한 흔적들이 작품 곳곳에서 보이고, 그렇기에 내용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짜임새나 비주얼, 음향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3호 2016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