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향한 동경과 도전
1925년에 출간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 번 다른 장르로 변주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2012년 런던에서 공연된 뮤지컬 <개츠비>도 있다. 초연 후 거의 매년 런던 소극장으로 돌아온 이 작품은 리니 리드먼과 조 에반스 콤비가 세운 극단 ‘루비 인 더 더스트 (Ruby in the Dust)’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명작을 뮤지컬로 각색하는 작업을 주로 했는데, <개츠비>도 리니 리드먼이 각색과 연출을, 조 에반스가 음악을 맡았다. <개츠비>는 두 사람의 프로덕션 레퍼토리 중에서도 특히 꾸준히 공연됐다. 처음엔 원작과 동일한 제목으로 공연한 초기 버전은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지만, 제목에서 ‘위대한’을 빼고 재정비를 거쳐 그냥 <개츠비>로 변신한 후 계속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천천히 발전해 나가는 중이다.
그냥 ‘개츠비’의 한계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를 각색할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탄탄한 원작의 틀을 고스란히 살려 그 힘을 빌리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아예 원작에서 탈피해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뮤지컬 <개츠비>가 이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택했다는 것이다. 서로 공존하기 힘든 두 가지 방식을 다 끌어안으려다 보니, 이 작품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힌다.
뮤지컬 <개츠비>는 원작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던 닉 캐러웨이 대신, 개츠비의 동업자인 울프심을 이야기꾼으로 택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원작을 따라간다. 소설에서 닉 캐러웨이는 사촌 데이지 뷰캐넌과 동창 톰 뷰캐넌, 이웃 제이 개츠비와 각각 관계를 맺고, 그들과 함께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의 갈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정작 울프심의 역할도 애매해졌다. 뮤지컬에서 울프심은 개츠비에 대한 연민을 강하게 드러내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지만, 실질적으로 사건에 연계되지 않아,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하기는 힘들다.
한편, 닉은 늘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에 함께 있지만, 관찰자로서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 별다른 역할 없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한 존재가 됐다. 그리고 작아진 닉의 입지만큼, 조던 베이커의 역할은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속사정이 긴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개츠비와 데이지, 톰의 갈등과 긴장도 고조되지 못하고 쉽게 사그라졌다. 결국 이 작품은 어느 한 인물도 중심에 두지 못하고, 그 속까지 깊이 파고들지 못한 채 겉으로 보이는 일에만 치중하다가 인물들을 깊이 있게 그려내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공연 시작 전, 객석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배우들은 바에 모여 있는 관객들에게 다가갔다. 1920년대 미국의 사치스러운 파티를 즐기는 인사들로 분한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걸고, 그들을 작품 속 시대의 파티장으로 이끌었다. 관객들이 어느 정도 들뜬 상태로 객석에 자리 잡으면 배우들의 술 취한 웃음과 화려한 춤이 분위기를 띄운다. 하지만 이내 동이 터오기라도 한듯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고독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가 등장해 개츠비의 동업자였던 울프심을 찾는다. 개츠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개탄하는 울프심에게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이 남자가 닉 캐러웨이다. 울프심은 개츠비의 유품인 스크랩북을 소개하며, 그의 비극적인 죽음 뒤에 한 여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울프심이 개츠비와 데이지의 과거, 머틀과 톰의 관계 등 세세한 사연까지 스크랩북의 책장을 넘기듯 설명하면 그의 해설을 통해 주요 장면과 장면 사이가 헐겁게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개츠비>에서는 원작의 화자인 닉 대신 울프심이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우선 데이지의 결혼식을 보여준다. 들뜬 표정이던 데이지는 편지 한 통을 받은 후에 결혼을 못하겠다고 울지만, 부잣집 딸은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충고에 못 이겨 결국 예정대로 톰과 결혼한다. 이후 1920년대에 어울리는 재즈풍 넘버가 톰 뷰캐넌의 넉넉한 재산과 부부의 호화로운 생활을 설명한다. 뷰캐넌 부부가 시카고에서 결혼한 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뉴욕의 이스트에그에 정착한 데까지 이야기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 나면, <개츠비>는 자연스럽게 다시 닉의 시선을 따라간다. 이후로는 익숙한 장면과 대사의 향연이다. 닉이 데이지의 집에 방문해 조던 베이커를 소개받고, 톰의 불륜 사실이 폭로되며 개츠비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이야기들은 소설의 요약본처럼 익숙하게 전개된다. 톰은 닉에게 자신의 내연녀 머틀을 소개한다. 머틀은 톰이 아내 데이지의 성화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에게 빨리 이혼할 것을 강요하지만 톰은 되려 머틀이 데이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화를 낸다. 한편, 그 후 닉은 조던과 함께 이웃 개츠비의 파티에 간다. 닉을 통해 개츠비와 데이지가 다시 만나고, 인물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결국 개츠비의 차에 머틀이 치여 죽는 사건이 있기까지 <개츠비>는 그저 앞만 보고 달린다.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들과 날 선 감정으로 부딪치는 주연들의 긴장 관계 사이에 음악이 낄 자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개츠비는 옛사랑, 혹은 성공의 트로피 같은 데이지를 얻기 위해 안달이 났고, 데이지는 남편의 불륜에 맞대응하는 것처럼 오랜만에 만난 개츠비와 연애 놀이에 장단을 맞춘다. 그리고 데이지와 개츠비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톰은 내연녀인 머틀을 멀리하며 개츠비의 뒷조사를 하는 등 둘을 주시하고, 머틀은 불륜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자신을 감금하려는 남편을 피해 심드렁한 톰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조던은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닉은 모든 사건의 중심이지만 한 발짝 떨어진 채 인물들의 갈등을 관망한다.
<개츠비>는 개츠비의 지고지순한 사랑보다 완벽한 성공을 위한 그의 욕심에 초점을 맞췄다. 데이지는 여러 남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어떤 남자와 함께 하든 자신의 말처럼 ‘예쁜 바보’의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톰을 택한다. 머틀의 죽음은 허무했고, 머틀의 남편인 윌슨의 복수와 자살은 공허했다.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차별점을 두지 못한 이 뮤지컬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반복되는 장면이다. 닉은 자신들의 죄를 개츠비에게 덮어씌운 뷰캐넌 부부에게 실망하고, 개츠비의 죽음을 목격한 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울프심을 찾아온다. 그리고 처음과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때 닉의 어조가 다르다.
초반 장면에서는 기계처럼 무미건조했던 닉의 대사에 감정이 실리고, 물기가 더해졌다. 그렇게 함께 개츠비를 추모하는 닉과 울프심의 동지 의식을 마지막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개츠비의 죽음으로 문을 연 작품이 같은 장면으로 문을 닫으면서 이 작품은 둥그런 원을 이루듯 완성된다. 하지만 이런 각색 시도에도 불구하고 <개츠비>의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원작의 사건을 빠짐없이 따라가느라 숨 가빠 보였고, 그 사이에 원작의 결은 물론이고, 뮤지컬로서 재미나 인물들의 감정의 깊이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어찌 보면 복잡하게 꼬여 있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장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뮤지컬 <개츠비>는 그것을 살려내면서도 음악이 돋보이는 장면을 부연하느라 바빠 러닝타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소박해도 한껏 화려하게
<개츠비>는 소박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지만 작품의 배경인 1920년대 미국의 화려한 파티를 한껏 펼쳐 보인다.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된 배우들은 매일 밤마다 열리는 개츠비의 파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재즈풍의 신 나는 음악에 맞춰 쌍으로 맞추는 댄스의 합이 변변찮은 세트도 없는 무대를 1920년대로 소환했다. 그들이 끊임없이 뱉어대는 수다와 웃음은 파티에 흠뻑 취한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개츠비>는 주요 인물의 감정선을 무르익게 할 시간이 부족할 만큼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 빠르게 달려갔지만 결코 화려한 그들만의 파티를 소홀하게 다루지 않았다. 공연 전부터 관객들과 어울리던 네 명의 배우들은 개츠비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매일 밤 개츠비의 파티에 와서 파티가 끝날 때까지 실컷 놀고 가는 역할로 분위기를 책임졌다. 한껏 화려해야 하는 작품인 『위대한 개츠비』를 소극장 무대에 올리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공간이 주는 필연적인 한계는 극복하기 쉽지 않다. 이 작품도 배우들의 의상과 음악은 충분히 화려했지만, 작고 낡은 극장의 공간이 주는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더해져 아쉬움으로 남았다. 차라리 극을 더 발전시켜 대극장에 도전했더라면 나았을까. 화려한 파티라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게 아니라 진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파티였다면, 개츠비가 더 고독해 보였을까. 그래도 개츠비에게 오지 않는 데이지가 더 애석했을까.
이 작품은 주인공들이 감정을 쌓아가는 장면이 거의 다 대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뮤지컬 넘버가 적다. 하지만 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개츠비의 파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모여 소문만 무성한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 수군수군하는 뮤지컬 넘버는 특히 일품이다. 주요 인물이 많고, 그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만큼, 그들이 즐겁게 주고받는 대화가 노래로 이어질 때 <개츠비>가 추구하는 음악의 힘이 살아났다. 배우들은 일부 장면에서 뮤지션으로 변신해 오케스트라를 더 풍부하게 받쳐주기도 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액터-뮤지션의 연출이 아니라 단지 배우로서 연기하고 연주자로서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음악은 풍부해졌지만 닉이 갑자기 의자에 자리 잡고 색소폰을 부는 등 어색한 연결은 어쩔 수 없었다.
노래가 시작되면 극의 전개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은 아쉬웠다. 초반 전개는 음악의 힘을 빌려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지만 후반 전개는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개츠비, 데이지, 닉, 조던, 톰의 긴장감 있는 대화와 비극적인 사건까지 쭉 이어지는 마지막 시퀀스가 펼쳐지는 동안 음악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음악이 있는 장면은 구성이 좋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이나 음악이 없는 부분은 드라마로서 더 다듬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개츠비가 놓친 것
관찰자의 위치에서 밀려난 닉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사건에 적극 개입하는 주인공으로 편입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머틀과 톰의 관계를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데이지와 개츠비의 만남에서도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 그런 그가 언제 개츠비에게 친구로서 깊은 감정을 키웠는지도 극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개츠비의 죽음에도 분노보다 공허함을 표출할 뿐이다. 그리고 극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만큼, 뉴욕의 향락에도 그다지 지치지 않은 모습이다. 이 작품의 닉은 모든 사건 이후에도 뉴욕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갈 듯한 느낌마저 주는 캐릭터다. 개츠비에게 연민을 드러내는 인물은 물론 닉 대신 관찰자이자 해설자의 위치를 차지한 울프심이다. 하지만 개츠비와 불법적인 사업을 함께할 정도로 도덕적이지 못한 울프심이 내비치는 연민은 관객들이 감정 이입하기 어렵고, 그렇게 개츠비의 죽음은 더욱 공허해졌다.
반면, 톰 뷰캐넌은 나쁜 남자로서의 매력이 극대화된 캐릭터였다. 그를 연기한 배우가 감정을 잘 잡은 공이 컸다. 극 초반에 머틀과 있을 때부터, 몸은 머틀과 있지만 그래도 영혼의 동반자는 데이지인 것처럼 머틀이 데이지를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단속하더니, 개츠비와 데이지가 가까워진 후로는 더욱 데이지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다. 데이지가 자신의 외도에 맞대응하려는 목적으로 개츠비와 만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데이지의 마음을 잡으려고 진심으로 애쓴다.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톰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라고 강요할 때, 신혼여행 때조차 날 사랑하지 않았냐고 데이지를 설득해 결국 데이지가 개츠비를 내치게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후 데이지를 전혀 비난하지 않고 품어준다. 자신이 완전히 데이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판단 후 개츠비와 데이지를 한 차에 태워 보낸 것도 승리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끔찍한 사고 이후에 당황한 데이지를 품어주고, 즉시 짐을 싸 떠나는 모습은 데이지에게만큼은 신뢰를 주었다.
이 작품은 개츠비를 지고지순한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한 남자로 묘사하기보다, 자신이 이룩한 부와 명성에 화룡점정을 찍어줄 데이지를 쟁취하려는 남자로 그리고, 그런 그가 데이지를 놓친 후에 공허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타까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톰이 은근하게 윌슨을 사주한 음모에서 비롯된 개츠비의 죽음은 장례식은커녕 닉과 울프심의 대화로 짧게 추모될 뿐이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을 빼버린 <개츠비>는 그렇게 개츠비의 허울을 벗기고, 그에게 연민조차 주지 않는다.
<개츠비>는 강력한 원작을 뒤집어 여러 장치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 원작의 색깔을 더 지우고, 음악과 드라마의 균형을 적절히 잡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공연은 지금처럼 원작과 각색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 아니라 조금 더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자신만의 중심을 잡은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2호 2016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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