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로맨틱 코미디
<쉬 러브스 미>
뮤지컬로 만들어진 대표 로맨틱 코미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펜팔은 꽤나 유행이었다. 한창 유행일 때는 잡지에 펜팔을 구하는 사람들의 간략한 정보가 실려 있기도 했고, 영어 공부를 핑계로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 펜팔을 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로의 얼굴도, 배경도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과 편지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은 소셜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지금의 세대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외양이 아니라 내면적인 부분에 이끌려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아날로그적 감성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왔지만, 나와 영혼이 통하는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는 일이니 말이다.
지난 3월에 개막해 관객들의 사랑 속에 연장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뮤지컬 <쉬 러브스 미>는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에 호소한다. 마치 사랑 넘치는 귀여운 백인 할머니 집에 가서 1930년대 왈츠를 들으며 살랑살랑 음악에 몸도 맡겨보고, 사탕을 까먹으며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 얘기들을 듣는 기분이랄까. <쉬 러브스 미>는 할머니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자칫 지루하고 진부할 수 있는 옛날 얘기가 사랑스러워지는 것 같은 작품이다.
<쉬 러브스 미>의 원작은 헝가리에서 태어나 미국에 귀화한 작가 미클로스 라슬로가 1937년에 쓴 연극 <퍼퓨머리(향수 가게)>로, 미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첫 작품은 1940년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이 만든 <길모퉁이 상점>이었고, 1949년에는 주디 갈란드 주연의 <좋았던 그 여름에>라는 뮤지컬 영화로 제작됐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은 1998년 할리우드 스타 멕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출연한 영화 <유브 갓 메일>일 것이다. 그녀가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멕 라이언식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랐던 영화는 당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 펜팔을 이메일로 대체했다. 그 외에도 배경과 구체적인 상황들이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오직 편지로 소통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간 남녀의 실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기본 플롯에는 변함이 없다. 1963년 뮤지컬로 만들어진 <쉬 러브스 미>는 제리 복이 작곡을, 쉘든 하닉이 작사를 맡았고 <카바레>로 이름을 알린 조 마스터로프가 대본을 써 초연부터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제리 복과 쉘든 하닉은 196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잘나가던 콤비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창작진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덕션은 <쉬 러브스 미>의 세 번째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으로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라운드어바웃시어터 컴퍼니가 프로듀싱을 맡았다.
동화같이 달달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막이 오르면, 무대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는 유럽 풍의 집들과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마치 인형의 집같이 생긴 마라첵의 향수 가게(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화장품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배경은 1930년대의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실 드라마 전개상 굳이 배경이 헝가리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설정은 2016년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시공간적 거리를 염두에 두고 극적인 상황에 조금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 의미로 현악 선율이 유려한 서곡과 함께 관객들 앞에 드러나는 파스텔 톤의 무대 세트와 조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동화 속 어딘가를 연상시켜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되는 하루, 등장인물들이 아침 일찍 가게 앞으로 모여들면서 막이 오른다. 관객들은 첫 곡을 통해 남자 주인공인 조지 노박을 비롯해 늘 유쾌한 라디슬라브 시포스, 바람둥이 스티븐 코달리, 코달리와 복잡한 연애를 하고 있는 일로나 리터, 그리고 야망이 넘치는 막내 알파드 라슬로, 가게 주인인 졸탄 마라첵까지 모두 만나게 된다. 인물들의 성격을 대강 가늠케 하는 오프닝 곡이 끝나고 그들이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라첵의 가게는 마치 인형의 집이 열리듯이 가운데부터 양쪽으로 펼쳐지는데, 이는 가게의 내부를 보여줘서 동화 같은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성은 흔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른다.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는 조지 노박은 별다른 문제 없이 열심히 일하는 착한 청년인데, 한동안 론리 하츠 클럽(외로운 싱글 모임)이라는 펜팔 클럽을 통해 편지를 교환해 온 ‘친구’에게 많은 애정을 품고 있다.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그녀와의 서신 교환은 조지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말리아 발라시라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갑자기 가게를 찾아와 일을 구한다. 아말리아 발라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자리를 얻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지와 아말리아는 시작부터 서로 삐걱거린다. 아말리아 발라시의 등장과 함께 관객들은 아말리아 역시 론리 하츠 클럽의 회원이고 누군가와 열심히 편지를 교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게 주인 마라첵은 얼마 전에 익명의 존재로부터 부인의 불륜을 고발하는 메모를 받은 후 조지와 부인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마라첵은 늘 조지에게 까칠하게 대하는데, 조지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두 사람의 갈등이 고조돼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조지가 그렇게 기다려오던 ‘친구’와 부다페스트의 로맨틱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다. 조지는 약속 장소에 갈까 말까 망설이다 라디슬라브와 함께 그 자리에 나가는데, 자신의 특별한 친구가 그렇게 싫어하던 아말리아라는 것을 멀리서 보게 된다. 잠시 고민에 빠진 조지는 결국 자신이 아말리아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우연히 그 가게에 들른 척 연기하며 아말리아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 마라첵은 부인의 불륜 사실을 밝히기 위해 고용한 사설탐정을 통해 불륜의 대상이 조지가 아닌 코달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지에 대한 미안함과 부인의 불륜에 자살을 시도하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막내가 그를 막아서 가벼운 총상으로 끝난다.
2막은 마라첵이 건강을 회복하면서 조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심지어 자신의 가게를 조지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조지는 아파서 가게에 나오지 못한 아말리아를 찾아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조지에게 아말리아는 따뜻함을 느끼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코달리는 해고당하고, 코달리에게 늘 2순위로 대접받았던 일로나도 그녀를 더 존중해 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집에서 몸조리하는 마라첵을 대신해 가게를 관리하는 조지의 지휘 아래 가게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데, 마지막에 아말리아와 조지는 서로에 대한 각자의 사랑을 인정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
사실 아말리아와 조지의 사랑이 엮이는 과정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아니, 그 둘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작품의 개연성이 많이 부족하다. 요즘 신작들은 보통 짜임새 있고 개연성이 탄탄한 구성이 요구되고, 인물들의 감정 변화가 작품의 내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제대로 설명이 안 되거나 인물들이 전형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 비판의 화살을 받는 것은 당연시되곤 하는데, 1960년대에 만들어진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필자 역시 개연성의 부족은 작품의 고전스러움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나름 재미있게 봤는데,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을 충실하게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쉬 러브스 미>에는 최근 사랑받은 많은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평도, 두뇌를 자극하는 똑똑한 가사도 없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짝 언급한 무대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연기, 음악, 그리고 연출에 이르는 모든 요소들이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그리고 그 장르가 지향하는 익숙한 달달함을 위해 다 맞춰져 있어서, 부족한 개연성을 통일성과 로맨틱 코미디의 힘인 웃음으로 만회한다.
일단 인물만 봐도 그렇다. 남녀 주인공은 상황으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물들은 그들 각자의 스타일대로 다들 어딘가 과장된 설정을 통해 웃기는 캐릭터들인데, 가장 뻔하게 웃긴 바람둥이 코달리는 젠체하는 캐릭터로 웃긴다면 일로나는 남자에 자꾸 목매는 부분이 부각되어 웃기고, 가장 멀쩡해 보이는 라디슬라브는 그가 가진 소시민적이고 일상적인 성격과 과장된 캐릭터가 어울리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비중이 적은 막내조차도 사회적으로 어딘가 좀 어색한 점이 과장되게 그려지면서 재미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런 웃음의 장치들은 균형이 생명인데, 그 균형을 만들어낸 가장 큰 공은 연출과 배우에게 있다. 1993년 라운드어바웃시어터 컴퍼니가 자체 제작한 첫 번째 뮤지컬로 <쉬 러브스 미>를 선택해 무대에 올렸을 때 연출로 참여했던 브로드웨이 베테랑 연출가 스캇 엘리스가 이번 연출에도 참여했다. 지난 시즌에는 <쉬 러브스 미>와 비슷한 점이 많은 <20세기 열차>를 맡아서 연출했고, 그 전에도 <커튼즈>(2007)라든가 에드윈드루드의 <미스터리>(2012)처럼 고전적인 매력이 있는 작품을 맡아왔다. 이 작품의 배우들도 각자의 개성 안에서 작품이 지닌 유머와 순수함, 그리고 어딘가 어리숙한 달달함을 연기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지난 2013년에 작품적으론 혹평을 받았던 <퍼스트 데이트>에서 헌칠한 키와 순수한 마스크로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으로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줘 인정받았던 재커리 리바이뿐 아니라 브로드웨이에서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오른 브로드웨이의 믿음직한 여배우 로라 베난티,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드 <앨리맥빌>의 일레인으로 잘 알려진 제인 카라코스키, 감초 연기의 달인 피터 바틀렛에 이르기까지, 핫한 스타 캐스팅은 아니지만 잔잔한 내용에 잘 어울리는 배우들은 작품의 매력을 잘 살려냈다.
무엇보다 <쉬 러브스 미>의 가장 큰 강점은 관객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도와주는 무대와 음악, 그리고 그에 적합하게 짜인 안무에 있다. 앞서 잠시 얘기한 것처럼, 마라첵의 가게를 기본 세트로 아말리아와 조지가 만나기로 한 로맨틱한 레스토랑과 마라첵이 회복 중인 그의 방, 아말리아가 아파서 누워있는 그녀의 방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장면에 데이비드 락웰의 무대와 데이비드 홀더의 조명은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 이야기의 진행과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음악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 상대적으로 개연성이 부족한 이야기 진행에 작품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제리 복의 음악이다. 요즘의 작품처럼 색다른 매력은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악과 키보드 소리가 많이 어우러져 있는데, 어떤 인물을 위한 음악이냐에 따라 왈츠나 탱고 등이 섞여 단조로움을 피했고, 다양하게 변주되는 조지와 아말리아의 주제 멜로디는 공연이 끝나고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그 외에도 가게의 점원들이 손님을 맞이할 때와 인사할 때 화음을 맞추어 부르는 짧은 레치타티보는 극 중에서는 마라첵의 향수 가게의 품격을 더해 주는 역할을 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멜로디와 대비되어 관객들이 지치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군무가 있는 뮤지컬은 아니지만 향수 가게나 레스토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동작들에 리듬과 스타일을 더해 만들어진 안무 역시 무대 위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관객들의 상상을 이어가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로맨틱 코미디는 요즘 브로드웨이에서도 그다지 흔하지 않고, 가끔 새로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평단의 평가들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시즌에 한 작품은 이런 식으로 고전을 성공적으로 제작해서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로맨틱 코미디의 수명을 연장시키곤 한다. 이것이 브로드웨이의 큰 강점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로서 이 작품은 인물들의 의도나 감정의 변화에 대한 이유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소들을 통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무대 위 세상을 만들어주었고, 그 덕택에 <쉬 러브스 미>는 그 작품 자체로 충분히 즐겁고 사랑스럽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2호 2016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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