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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미스 원자폭탄> [No.151]

글 |조연경(런던통신원) 사진 |Tristam Kenton 2016-05-11 3,784

황당한 시대의 어이없는 소동극

1951년에서 1954년 사이, 미국 네바다 주의 사막에서는 미군의 핵폭탄 실험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진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냉전의 시대, 애국심과 공산주의가 철저히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원자폭탄의 유해성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미군은 별다른 방해 없이 실험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약 100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라스베이거스에는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생기는 ‘아름다운’ 버섯구름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 기묘한 원자폭탄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미스 원자폭탄’을 선정하는 미인 대회가 진행되던 시절의 촌극을 그려낸 <미스 원자폭탄>은 5년의 개발 기간을 거친 영국산 뮤지컬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고군분투

<미스 원자폭탄(Miss Atomic Bomb)>에는 각자의 다급한 사정을 안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서로 쫓고 쫓기며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뮤지컬은 1952년 미국 네바다 주의 라스베이거스와 근처 사막을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해질녘의 붉은 빛으로 막을 연다. 원자폭탄을 둘러싼 열기와 광풍을 즐기러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쇼걸들의 무대로 환하게 빛난다. 그러나 모든 호텔이 다 호황인 것은 아니다. 다 쓰러져 가는 ‘황금거위 호텔’의 부매니저 루는 매출이 안 오른다고 자신을 구박하던 매니저가 갑자기 찾아온 호텔 주인 마피아 보스의 총에 맞아 죽자, 졸지에 매니저로 승진해 호텔을 살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중책을 맞게 된다. 한편, 사막의 양 목장에서 일하는 캔디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트레일러를 상속받자 패션디자이너를 지망하는 친구 머나와 캘리포니아로 떠나 새 삶을 시작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날 밤, 핵 실험장으로 전진 배치될 부대에서 탈영한 조이가 캔디와 만나게 된다. 캔디는 도망치는 조이를 비웃지만 하룻밤 숨겨주게 되고, 조이는 물론 캔디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다음 날, 조이가 떠난 후 캔디를 찾아온 은행원은 할머니가 엄청난 빚을 남겨서 트레일러가 차압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한다. 결국 캘리포니아로 가는 꿈이 좌절된 캔디는 원래 일하던 양 목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원인 모를 병으로 모든 양이 폐사했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한편 머나는 캘리포니아에 못 가더라도 양 목장으로 돌아갈 순 없다며, 군에서 디자이너를 채용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핵 실험장으로 향한다. 머나가 맡은 일은 실험장 모델하우스에 배치될 마네킹에게 옷을 입히고, 돼지의 털을 다듬는 것. 마네킹 가족에게 자신의 능력을 한껏 살린 옷을 디자인해 입히면서 머나는 꿈을 이룬 듯 즐거워한다. 한편, 탈영병 조이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황금거위 호텔’을 운영하는 형, 루를 찾아간다. 매니저가 됐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해 마피아 보스에게 협박당하는 루를 본 조이는 일단 형을 살리기 위해 아무 이야기나 늘어놓다가 사막에서 만난 캔디 이야기를 꺼낸다. 캔디는 원자폭탄이 폭발할 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고 말했다. 루는 거기서 영감을 얻어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배경으로 최고의 미인을 선발하는 미인 대회’를 열기로 하고 겨우 마피아 보스를 설득해 목숨을 부지한다. 루와 조이는 군의 다음 실험 일정에 맞춰 미인 대회를 준비하고 홍보에 나선다. 조이는 엄청난 빚에 짓눌린 캔디를 돕기 위해 사막으로 돌아가 미인 대회에 꼭 나오라고 그녀를 설득한다. 양 목장에서 일할 기회가 사라지면서 빚을 갚을 길이 없어진 캔디는 미인 대회의 우승 상금을 노리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면서 머나에게 자신의 의상을 맡아줄 것을 부탁해 둘이 함께 사막을 떠나게 된다. 한편 빚 독촉으로 캔디를 괴롭히던 ‘악역’ 은행원은 둘이 사라진 것을 알고 분노해 그들을 쫓아간다.



마침내 다가온 미인 대회 당일, 대회 준비하랴 성질 급한 마피아 보스의 추궁을 피하랴 바쁜데 하필 군의 장군까지 탈영병을 찾겠다고 헤집고 다니는 판에 조이는 랍비로 변장한다. 또 하필 진행을 맡기로 했던 미치광이 과학자가 마피아의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조이가 정체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미인 대회의 진행을 맡는다. 허접한 후보들을 모아놓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미인 대회에서는 캔디가 단연 눈길을 끌지만, 러시아 스파이가 있다는 첩보에 군의 핵 실험이 취소되면서 미인 대회도 돌연 중지된다. 숙박비를 환불해 달라는 손님들이 호텔에서 소란을 피우고, 마피아 보스는 루를 당장이라도 쏠 것처럼 쫓아온다.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루, 조이, 머나, 캔디가 마피아의 총구 앞에서 정신없이 변명과 설득을 하던 중에 마피아 보스는 바닥에 놓인 호텔 기념 비누를 밟고 기절하고, 그 덕에 넷은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캔디는 그동안 수상하게 여겼던 변태 과학자를 스파이로 제보하고, 그가 체포되면서 미인 대회도 재개된다. 이때 도착한 은행원이 빚을 지고 도망간 캔디를 잡아가려고 하지만, 스파이를 제보한 애국자라는 군의 비호로 캔디는 무사히 미인 대회의 우승 상금을 타, 빚을 갚을 수 있게 된다. 모든 게 해결된 캔디는 미인 대회 왕관을 버리고 사막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히는데, 조이는 그녀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한편, 각각 동성애자인 머나와 루는 전략적 결혼을 약속하고, 호텔의 상징으로 번영을 가져다 줄 미인 대회 왕관은 머나가 대신 받는다.



쉬지 않고 웃기는 코미디

이 작품은 황당한 해피엔딩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촌극이다. 중간 중간에 발생하는 거대한 구멍들을 황당한 우연들로 메우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웃음을 이끌어낸다. 루를 계속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마피아 보스와 부하는 시도 때도 없이 총질을 하고, 루가 양발에 연이어 총을 맞게 되면서 공연 내내 절뚝거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조이는 탈영한 자신을 찾아다니는 장군을 피하기 위해 랍비나 미친 과학자로 변장해서 상황을 모면하고 장군은 그런 그를 끝까지 알아보지 못한다. 나중에 루가 반쯤 탄 채 발견됐다며 조이의 군복을 장군에게 건네자 장군은 그가 폭심지로 잘못 도망가서 죽었다고 생각해 수배를 풀고 특진 명령을 내리기까지 한다.


나중에 스파이로 몰리는 변태 과학자는 곳곳에서 활약한다. 사막에서 낙진 때문에 죽은 양들을 영양실조로 규정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러운 강의를 하는가 하면, 다음 장면에서는 미인 대회를 준비하는 대기실에 나타나 변태같이 사진을 찍으며 즐기고, 미인 대회의 심사 위원으로 참여한다. 마피아의 협박 앞에서 변명과 설득, 논쟁과 말다툼이 난무하는 배우들의 말재주와 연기도 볼만하다. 결혼을 약속하는 머나와 루의 탱고 장면이 특히 압권이다. 둘은 서로 계약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들을 수상쩍게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을 타파하고, 비즈니스 파트너로 성공할 것을 다짐한다. 탱고 풍의 넘버에 맞춰 밖에서는 사이좋은 부부인 척, 안에서는 남인 척 살면서 호텔업과 패션업계를 주름잡으며 라스베이거스와 미국을 호령하는 제국을 건설하자고 꿈꾸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결혼하겠다고 하는 둘의 주장에 캔디와 조이가 황당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 역할 하는 배우들의 가치

정신없이 이어지는 소동들에 가려 비중이 덜하긴 하지만, <미스 원자폭탄>에서도 로맨스는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다. 조이는 탈영 중에 우연히 만난 캔디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언제나 도망치며 살아온 조이와 삶이 얼마나 힘들건 강하게 맞서면서 살아온 캔디의 삶에는 아주 큰 간격이 있다. 둘의 듀엣 ‘삶이 힘들면(When Things Get Rough)’은 각자의 문제 해결법이 얼마나 다른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보여주는 넘버지만 묘하게 낭만적으로 들린다. 조이는 천문학적인 빚을 떠안고도 도망치지 않고 정직하게 갚으려고 하는 캔디에게 점차 감명받게 된다. 조이는 이후 라스베이거스에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맞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캔디에게 인정받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결국 조이의 진면모를 본 캔디도 서서히 조이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다.


5월부터 런던의 알라딘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 딘 존-윌슨이 조이 역할에 더 큰 매력을 불어넣었다. 캔디 역을 맡은 신예 플로렌스 앤드루스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로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능청스러운 코미디가 주특기인 배우 사이먼 립킨과 캐서린 테이트가 루와 머나 역할을 맡아 호흡이 잘 맞는 만담을 선보인다. 사이먼 립킨은 총에 맞아 절뚝거리는 연기뿐 아니라 그럴듯한 탭댄스까지 선보이며 작품의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캐서린 테이트는 우스꽝스러운 과장 연기로 존재감을 과시한다.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처럼 캔디를 쫓아다니는 악독한 은행원 역을 맡은 다니엘 보이스는 장 발장의 ‘24601’ 패러디 넘버를 잘 살리며 웃음을 보탠다.


<미스 원자폭탄>에는 목장 일꾼, 패션디자이너, 군인, 과학자, 쇼 진행자, 쇼걸, 트랜스젠더, 마피아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인물들을 이야기 속에 빠뜨려 정신없이 휘젓는다. 정신없는 소동극을 만들면서도 황당한 줄거리를 관객들에게 최대한 납득시키기 위해 애썼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모여 있지만, 사건의 배경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야기의 한 구석이 밋밋해졌을 정도로 작품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웃음의 안전장치를 두 겹, 세 겹 마련해 놓은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뻔하지만 어려운 정공법

<미스 원자폭탄>은 황당한 줄거리가 설렁설렁 이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흠 잡을 데가 딱히 없는 작품이다. 공연 시간 내내 늘어지지 않고, 전개가 황당해도 웃기니까 납득이 되는 적정선을 유지한다. 아담 롱과 알렉스 잭슨-롱, 가브리엘 빅이 공동으로 작품을 구상해서 썼는데, 가브리엘 빅은 대본, 가사, 작곡에 모두 참여했다. <톱 햇>으로 올리비에 어워드 안무상을 받은 빌 디머가 안무를 맡았다. 그 덕에 사이먼 립킨이 쇼걸들과 함께 우스우면서도 멋진 탭댄스를 선보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연출은 아담 롱과 빌 디머가 공동으로 맡았다. 무대 배경은 영상 프로젝터를 활용했다. 특히 핵폭발을 재현한 조명이 눈길을 끈다. 당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섬광을 관객들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조명으로 재현해 사실감을 더했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정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작 100킬로미터 떨어진 사막의 핵 실험장에서 인체에 유해한 실험을 수없이 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회 문제로 그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 황당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삐딱한 시선을 얹는다. 비현실적으로 어이없는 일을 코믹하게 보여주면서, 실제로 비슷한 일들이 발생했다는 데에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게 연출의 포인트인 것 같다. 진짜 핵 실험이 있었고, 원자폭탄을 둘러싼 인기가 대단했고, 원자폭탄을 찬양하는 미인 대회가 열렸으며 낙진에 따른 피해가 속출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네바다 핵 실험장은 현재 방사능 피해 지역으로서 일반인 접근이 금지되어 있고 종종 미국 영화에 공포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모델하우스에 단란한 가족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네킹들이 있는 유령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흥겨운 커튼콜 후 빈 무대에는 앞서 머나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마네킹들이 폭탄에 엉망으로 부서진 모습으로 서 있다. 가볍게 작품을 즐긴 관객들에게 현실 감각을 돌려주려는 것 같다. 그래서 뮤지컬 <미스 원자폭탄>은 미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무엇보다 영국적인 코미디다. 황당한 시절을 깔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영국 특유의 반어적 유머가 녹아 있다. 해피엔딩 같지 않은 해피엔딩이 마음 한구석을 찝찝하게 한다. 이 작품은 무비컬과 주크박스 뮤지컬의 대세를 거스르고 오랜만에 등장한 순수 창작물이지만 가볍고 황당하다는 이유로 평론가들에게서 대체로 박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차라리 과하게 밝은 분위기로 환상을 보여주는 게 때로는 뮤지컬이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이다. <미스 원자폭탄>도 그 전략을 택한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1호 2016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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