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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비운의 이인자들 [No.151]

글 |박보라 2016-05-02 5,065

모차르트에게 밀려난 비운의 이인자 살리에리를 무대 가운데로 끌어낸 <살리에르>가 주목받으면서 세기의 라이벌이자 잊혀진 패배자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고만을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살벌한 라이벌 게임이 막을 내렸을 때, 승자는 칭송되고 패자는 묻힌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패자, 안타까운 이인자들을 살펴본다.




천재에게 밀려난 노력파, 안토니오 살리에리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인자다. 살리에리는 1950년 이탈리아 레그나로에서 태어나 15세 때 스승 레오폴드 가스만을 만난 후 그를 따라 빈으로 왔다. 살리에리는 레오폴드 가스만이 죽은 후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1788년부터 1824년까지 빈의 궁정악장을 역임했다. 그는 일생 동안 <다나이스(Les Danaides)>, <오라스(Les Horaces)> 등 40여 편의 오페라를 발표하며 성공을 거둘 정도로 18세기 가장 인정받는 작곡가였다. 심지어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때 공연되었던 <황제 디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는 살리에리에게 의뢰되었지만, 너무 바빠 그 대신 모차르트가 썼다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살리에리는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의 제자들을 양성하며 음악 지도자로서, 또 비엔나 예술가 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음악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사회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열등감을 느낀 살리에리가 그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무성한 소문은 당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나 최근 230년 만에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합작품인 ‘오필리아의 회복된 건강을 위하여’라는 성악곡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또 다른 국면을 맞았다.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랜 시간 다양한 작품에서 끊임없이 다뤄질 만큼 흥미로운 이인자의 이야기임엔 틀림없다.




결국 헤어나지 못한 절망, 플로렌스 발라드   

<드림걸즈>의 모티프가 된 여성 그룹 슈프림스(The Supremes)에서도 안타까운 이인자는 존재한다. 영화와 뮤지컬로 많은 사랑을 받은 <드림걸즈>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슈프림스의 멤버였던 다이애나 로스와 플로렌스 발라드의 이야기다. 다이애나 로스와 플로렌스 발라드는 초창기 프리메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1년 흑인 음악의 성지라 불리는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며 3인조 여성 그룹 슈프림스로 탈바꿈했다. 당시 백인 중심의 음악계에서 흑인답지 않은 목소리와 분위기를 지향한 이들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찍었다. 모타운의 창립자이자 매니저인 베리 고디 주니어의 능력이 이들의 성공에 한몫했다. 그는 이후 폭발적인 가창력의 플로렌스 발라드를 배제하고 백인 취향에 더 적합한 다이애나 로스를 리드 보컬로 내세운다. 이후 그룹은 비틀스를 위협할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얻었지만 리드 보컬 자리에서 밀려난 플로렌스 발라드는 다친 자존심과 자기 관리 소홀로 멤버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팀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다이애나 로스는 플로렌스 발라드가 팀을 떠난 이후 ‘다이애나 로스 앤 슈프림스’로 이름을 바꾸고 3년여 동안 활동하다 솔로로 전환한다. 플로렌스 발라드도 재기를 꿈꾸지만 모타운의 방해로 솔로 활동은 백지화됐다. 게다가 모타운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하고 불행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며 상당한 경제적 어려움과 우울증,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플로렌스 발라드는 다시 한 번 복귀를 꿈꿨지만 3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며 안타까운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일인자를 누른 이인자, 니콜라 테슬라             

전기를 발명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니콜라 테슬라 또한 비운의 이인자다. 고용주와 직원으로 만난 두 사람의 운명은 전류로 갈렸다. 에디슨은 한쪽으로 전기가 흐르는 직류 전류를 바탕으로 발전소를 세웠지만, 테슬라는 주기적으로 전류의 방향이 변하는 교류 전류의 상용화를 주장했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에디슨과 테슬라의 임금 문제였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모터와 발전기의 성능을 높이는 계량을 주문하며 그의 55년치 연봉인 5만 달러를 제안했다. 불가능할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주문을 테슬라가 보란 듯이 성공하자 에디슨은 원래 약속한 금액 대신 임금의 50%만 인상했다. 화가 난 테슬라는 망설임 없이 에디슨의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회사를 세웠다. 심지어 테슬라는 웨이팅하우스사의 투자를 받으며 2년 만에 교류 전류로 다양한 발명품을 만들고 교류 전류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까지 갖추게 됐다. 본격적인 ‘전류 전쟁(War of Currents)’의 막이 오른 셈이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주장한 교류 전류의 안전성을 지적하며 전기의자를 발명했다.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전기의자를 통해 동물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중계했고 심지어 사형 집행장에 전기의자를 들여놓기에 이른다. 그러나 전기의자를 통한 사형 집행은 에디슨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교류 전류가 인간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결과만 확인하게 됐다. 전기의자에 앉은 사형수가 쉽게 목숨을 잃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약 8분 동안 이어진 전류를 통해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했던 것. 여기에 테슬라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장에서 25만 개의 전구를 켜는 대형 사업을 위해 자신의 몸에 직접 교류 전류를 통과시키며 안전성을 확인해 에디슨을 난처하게 했다. 전류 전쟁의 막이 내린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테슬라와 그의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에디슨 또한 파산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그의 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로닉스는 지금까지도 명성을 이어 나가고 있다. 현재까지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한 최초의 인간이자, 1000종이 넘는 특허 발명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에디슨이 주장한 직류 전류는 건전지에만, 테슬라가 주장한 교류 전류는 현재 널리 사용 중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1호 2016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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