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적 가치를 담은 뮤지컬
윈드밀 극장 (Windmill Theatre)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 폭격이 이어질 때도 유일하게 문을 닫지 않고 공연을 이어갔다. ‘우리는 절대 문을 닫지 않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전쟁 중에 영국적 기상을 높인 상징적 존재였다. 영국 최초로 전라의 퍼포먼스를 도입한 극장이기도 했다. 헨더슨 부인이 극장을 사들인 뒤 하루 종일 연달아 공연하는 논스톱 버라이어티를 도입한 윈드밀 극장은 경쟁자들이 너도나도 비슷한 공연을 올리자 최초로 전라의 여성들을 무대에 올려 경쟁자들을 따돌린다. 실화만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2005년 주디 덴치와 밥 호스킨스를 주연으로 만든 영화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이 이야기를 귀엽게 화면에 담았다. 그리고 다른 영국 영화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도 동명의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영국 무비컬의 계보
최근 몇 년간 웨스트엔드에는 새 뮤지컬이 1년 이상 공연을 이어간 사례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 영화를 원작으로 한 무비컬이 계속 제작되고 있다.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메이드 인 다겐함>과 <슈팅 라이크 베컴>처럼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소박한 영국만의 이야기를 담은 2000년대 영국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수년간의 개발 과정을 거쳐 2015년 트라이아웃 형태의 초연으로 배스의 왕립극장(Theatre Royal Bath)에서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가 베일을 벗었을 때 평론가들은 영국 냄새 가득한 이 작품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2016년 이 작품은 본래 윈드밀 극장이 있던 웨스트엔드로 향했다.
미망인이 된 로라 헨더슨이 극장을 사들여서 매니저 비비안 반 담과 손잡고 전쟁 중에도 극장을 운영한다는 내용의 코미디 영화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화려한 무대 뒤 백스테이지를 담고 있는 만큼 처음부터 공연을 위해 쓰인 이야기처럼 무대와 잘 어울린다. 영화 음악을 맡았던 조지 펜튼이 사이먼 체임벌린과 함께 뮤지컬의 음악을 담당했고 <선셋대로>의 작사가 돈 블랙이 가사를 썼다. 그리고 뮤지컬 <라카지(La Cage aux Folles)>를 연출한 테리 존슨이 대본과 연출을 맡아 영화보다 사랑스럽고 정돈된 작품을 탄생시켰다. 영화의 일부 설정과 장면을 과감하게 바꿔 관객들이 뮤지컬만 보고도 온전한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각색했다. 영화와 뮤지컬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한 면이 엿보인다. 1930년대 웨스트엔드의 공연 문화와 전쟁 당시를 담고 있어서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헨더슨 여사의 뚝심
무대의 막이 오르면 재기 발랄한 보드빌 느낌의 음악과 함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언이 만담을 하듯이 윈드밀 극장과 1937년의 현 상황을 간략히 소개한다. 옛날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농담으로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극 중간중간, 장면을 전환할 시간이 필요할 때나 몇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야 할 때 등장해 분위기를 띄우면서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설정은 분위기를 풀어주면서 이야기의 연결이 헐거울 때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만큼 극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했다.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극중극과 백스테이지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데 느슨한 주제로 연결된 짤막한 음악과 춤 공연이 이어지는 레뷔처럼 잘 짜인 장면들이 변사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짧은 장면 뒤에는 암전이 이어졌고 대사로 처리하는 부분이 많았다. 극 초반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갈수록 전개가 느려지고 시간적 배경에 따라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이 아쉬웠다.
재단장으로 바쁜 무대 위에서 비비안 반 담과 로라 헨더슨이 처음 만난다. 헨더슨 부인은 여장부처럼 호기롭게 등장한다. 공연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결정과 선택이 빠르고 의리 있게 식구들을 지켜 나가는 캐릭터다. 반 담과 만나자마자 싸우면서도 매니저로 고용해 극장을 맡기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 극장에 차를 배달하러 온 모린을 즉시 채용하고, 후에는 모린의 매력을 발견해서 배우로서 무대에 서도록 독려해 윈드밀 최고의 스타로 만든다. 반 담은 하루 한두 번의 공연이 전부인 다른 공연장과 다르게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공연을 이어가는 논스톱 버라이어티 쇼, 보드빌(Vaudeville)과 레뷔(Revue)를 혼합한 ‘레뷔드빌(Revudeville)’을 제안하고, 극장 운영과 오디션을 놓고 헨더슨 부인과 끊임없이 언쟁하면서 극장을 제대로 된 형태로 갖추어 나간다. 이 과정을 담은 넘버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10분 가까이 이어지면서 초반의 흥겨운 분위기를 확 잡아준다.
곧이어 ‘시간이 얼마나 남았든(Whatever Time I Have)’이라는 헨더슨 부인의 솔로 넘버가 이어진다. 이 곡은 왜 굳이 노년에 공연장을 샀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을지라도 내면은 늘 스물세 살이라고 대답하며 눈을 반짝이는 헨더슨 부인의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다양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채용해서 개막한 윈드밀 극장의 ‘레뷔드빌’은 이내 관객 수가 급락해서 헨더슨 부인에게 큰 손해를 안긴다. 밀린 의상비가 많다는 이유로 투덜대던 헨더슨 부인은 곧 참신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파리의 물랑루즈처럼 누드쇼를 선보이자는 것이다. 영국에서 전례가 없던 일이지만 헨더슨 부인이기에 곧 망설임 없이 추진해 결국 성공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헨더슨 부인은 공연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끊임없이 참견하고 한편으로는 반 담을 든든하게 지지하면서 극장이 성공할 수 있도록 온갖 일을 도맡아 한다. 1차 대전 중에 아들을 잃고, 근래에 남편마저 먼저 떠나보낸 후 헨더슨 부인은 자신의 노년을 윈드밀 극장에 전부 쏟아 붓는다. 극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배우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감싸주고 앞장서서 지켜준다. 극장이 흔들릴 때는 헨더슨 부인의 건강이 안 좋은 것으로 그려지고, 다시 일어설 때는 부인의 목소리도 강해지는 모습을 보면 헨더슨 부인이 윈드밀 극장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헨더슨 부인의 역할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헨더슨 부인 역을 맡은 배우 트레이시 베넷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여장부 같은 모습을 잘 전달하며 극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누드를 소비하는 방식
1930년대 보수적인 영국에서 무대 위 노출은 검열의 대상이었다. 하물며 누드를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헨더슨 부인은 국립 미술관에 걸려 있는 루벤스, 보티첼리, 르누아르의 그림 속 여성의 벌거벗은 몸과 그리스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파하며, 그림과 조각상이 예술이라면 어찌 사람의 몸은 예술일 수 없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여배우들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나체를 허용한다는 합의에 이르게 된다. 검열관은 이 합의 과정에서 영국 특유의 완곡어법을 사용하며 영국식 코미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정면 돌파하는 헨더슨 부인의 단도직입적인 언어가 큰 웃음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이 누드에 접근하는 방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작품의 기반은 코미디이고, 옷을 벗은 여성들을 무대에 세우려는 이유가 흥행을 노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 지점에 접근하는 방식은 직설적이고 당당하다. 반 담은 배우들을 미술관에 데려가 명화를 보여주면서 여성의 몸은 예술 작품이며,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최종 리허설 중에 옷을 벗어야 할 때가 오자 모린이 주저하는 동료들을 독려한다.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은 한번 시도해 볼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들만 옷을 벗는 것은 불편하니 남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옷을 벗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윈드밀 극장의 ‘윈드밀 걸스’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움이 아닌 해방감을 느낀다.
성 소수자나 나체가 등장하는 작품을 연출한 경험이 많은 테리 존슨은 이 작품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을 영리하게 처리하는 능숙함을 보여준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옷을 벗고, 당당하게 무대에 선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이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1930년대의 실제 ‘윈드밀 걸스’를 보러 간 관객이나 현재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 속 여배우들을 보러 가는 관객들의 속내까지 컨트롤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 존중하고 당당하게 신체를 드러내는 배우들과 그에 대한 연출은 왜곡된 시선의 폭력성을 줄이는 데 한몫한다.
그 시절을 향한 향수
1막은 구태의연한 부연 설명 없이 곧장 핵심으로 직행했다. 넘버 한 곡으로 여러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등 빠르게 달려가던 이 작품은 1막 중간부터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한다. 헨더슨 부인이 반 담을 만나 극장 운영 계획을 세우고 주요 인물을 캐스팅하는 부분부터 ‘레뷔드빌’ 형식의 공연을 거쳐 누드 아이디어를 내고, 성공적으로 개막 공연을 하기까지의 긴 여정을 전부 1막에 담아내려다 보니, 장장 90분에 이르는 공연 시간이 버겁게 느껴졌다. 개막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몇 년이 지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네덜란드계 유태인인 반 담이 괴로워하는 모습, 폭격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모린이 굳건히 공연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가는 부분까지 꽤 긴 시간에 걸쳐 다양한 사건이 1막에 담겨 있다.
더구나 2막은 전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1막의 생기를 잃고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모린이 임신으로 공연을 그만두고 길거리에서 피난민들을 돕다가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와 지친 헨더슨 부인을 위로하고, 다시 공연을 이어가기로 결심하는 부분까지 2막은 어쩔 수 없이 어둡다. 그리고 모린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영국의 강한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고, 극 중 공연도 군인들의 사기를 높일 만한 애국적인 내용으로 구성되다 보니 무리하게 애국심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도 든다. 모린의 대표 넘버인 ‘산이 오르기 쉬웠다면(If Mountains Were Easy To Climb)’은 마치 모린이 웅변하는 것처럼 헨더슨 부인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들이 공연을 이어가면서 영국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지쳐서 공연장의 문을 닫으려던 헨더슨 부인도 이에 설득되어 공연을 계속 이어가려고 결심하면서 작품이 끝난다.
아쉬운 점은 이 작품을 하나로 관통하는 줄거리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듯, 작품 속 전쟁도 이야기를 모두 흩어버린다. 모린과 잘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에디가 입대하면서 둘의 관계도 흐지부지해지고, 카리스마로 공연장을 이끌던 반 담은 전쟁으로 인해 무력해진다. 그리고 헨더슨 부인 역시 점점 나이 들어 지친 모습을 보여준다. 공연의 개막과 성공을 향해 달리던 백스테이지 스토리가 목적을 달성했으니 갈 곳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극의 후반부를 채우는 피난 장면과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공연 장면들은 초반의 좋은 기운을 이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한편으로는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공연 문화를 추억하는 작품이다. 당시 성행했던 공연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면서 레뷔 형식의 쇼가 유행하던 시절을 추억한다. 영국의 가장 암울했던 전쟁 시기에도 공연을 이어간 윈드밀 극장을 조명하여 굴복하지 않는 영국적 가치를 보여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하게 일상생활을 지속하는 영국인들의 정신이 전쟁의 승리를 이끈 일등 공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은 코미디와 유머다. 만담과 슬랩스틱, 흥겨운 탭댄스와 무희들의 군무 그리고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여배우들의 아름다운 신체가 이 작품을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대극장보다 중소 규모에 어울리는 소소한 작품으로, 통통 튀는 멜로디에 실린 언어유희가 공연이 끝나고도 계속 귓가에 맴돈다. 비록 전쟁에 밀려 코미디가 급격하게 빛을 잃지만 그 자리를 특유의 애국심이 채우면서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는 현재 가장 영국적인 뮤지컬이 되었다. 그들만의 유머 코드와 자부심이 가득한 작품인 만큼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셀링 포인트가 있는, 분명 잘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웨스트엔드에서만큼은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고 앞으로도 무난하게 관객 몰이에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세스 헨더슨이 자신 있게 선보이는 작품, <미세스 헨더슨 프리젠츠>가 언제까지 공연을 이어갈지 기대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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