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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서울예술단 30주년, 서른 살 맞은 서울예술단의 과거와 현재 [No.150]

글 |박병성 사진제공 |서울예술단 2016-03-23 6,299

서울예술단 30주년, 서른 살 맞은 서울예술단의 과거와 현재




지난해 가을 예술의전당에서는 명성황후를 소재로 한 두 편의 뮤지컬이 오페라극장과 CJ토월극장에서 같은 시기에 올라갔다. 오페라극장에서는 국민 뮤지컬 <명성황후> 20주년 공연을 하고 있었고, CJ토월극장에서는 서울예술단의 <잃어버린 얼굴 1895>가 공연 중이었다. 중간 휴식 시간도 비슷해서 관객들이 로비로 쏟아져 나왔다가 2막을 보기 위해 들어갔다. 두 곳으로 이동하는 관객층이 확연히 구별됐다. 오페라극장으로는 정장을 차려입은 중장년층 관객들이 주로 몰린 반면, CJ토월극장으로는 20~30대 젊은 여성 관객들이 향했다. 올해 30주년을 맞는 서울예술단의 변화를 실감하는 풍경이었다.



서울예술단의 창단 과정


서울예술단은 1986년 8월 1일 초대 단장으로 극작가 차범석을 영입하여 ‘88서울예술단’이란 이름으로 창단했다. 애초 계획은 단원 200명을 확보한 대규모 종합예술 단체였지만 창단 당시에는 1차적으로 50명의 단원을 선발하여 창단식을 치렀다. 운영 주체는 한국방송광고공사였다. 왜 1980년대에 대규모 예술단체가 필요했던 것일까?

1985년 9월 정부에서는 ‘민족 대교류 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 간에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게 된다. 이때 평양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극단, 무용단, 합창단 등에서 선발한 50여 명으로 급조된 단체가 서울예술단이었다. 반면 서울 공연을 한 북한의 평양예술단은 300여 명의 상시 단원을 거느린 만수대 예술단이나 피바다 가무단에서 정책적으로 육성해 온 팀이었다. 국내 언론에서는 전체 예술을 지향하는 북한의 예술단에 대해 “잘 길들여진 꼭두각시”라고 폄하했지만, 배우들의 기량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남북한 간의 문화 예술 교류를 위해서는 대형 종합예술 단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대기하고 있었다. 남북 문화 교류 이외에도 국제적인 행사에 선보일 문화 예술 단체가 필요했다.

88서울예술단은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88서울예술단이 첫 작품으로 선보인 작품은 총체극 <새불>이었다. 부제로 ‘KOREA 1988’을 붙였다. 오태석이 쓰고, 연출을 맡았으며, 김영재가 작곡했다. 총체극을 표방하고 결성된 단체인 만큼 종합예술극에 대한 장르적 고민이 많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해 작품적 평가는 좋지 않았다. 총체극이라기보다는 무용에 가깝다는 평과, 한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뒤섞여 결국은 국적상실의 작품이 되었다는 지적까지 88서울예술단의 첫 작품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창작자의 예술적 고민에서 창의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관 단체의 필요에서 양식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서울예술단을 괴롭히는 질문이 된다.




가무극, 가무악, 무용, 뮤지컬


서울예술단은 뮤지컬 배우, 무용수 등 종합예술이 가능한 단원을 선발하여 뮤지컬은 물론 무용을 선보이는가 하면, 한국적 공연 양식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가무악과 가무극을 개발하기도 했다. 총체극 <새불>로 첫선을 연 88서울예술단은 1987년 2대 단장인 박근숙이 오면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뮤지컬을 제작하는 단체로 선회한다. 그러나 1989년 3대 단장 이종덕이 취임하면서 원래 취지인 ‘한국적 뮤지컬 양식’ 개발을 다시 추구한다.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단체로서 공공적인 미션 수행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구식 뮤지컬을 답습하지 않고 한국적 공연 양식을 개발하기 위한 서울예술단의 시도는 지속된다.

한국방송광고공사 소속 단체로 출발한 88서울예술단은 1990년 문화부 발족과 함께 재단법인 형태로 바뀐다. 이때부터 지금의 ‘서울예술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서울예술단이 한국적 총체 연극을 표방하며 개발한 장르 중 가무악(歌舞樂)은 꽤나 독특한 양식이었다. 1992년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활동하고 마지막 남은 남사당의 한 사람인 최종실과, 전통무용과 판소리를 전공한 채향순을 조감독으로 영입하고 타악 기능과 무용 전공 단원을 보강해 가무악 팀을 구성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가무악을 만든 첫 작품이 <소리의 환상 ’92>였다. 가무악이 기존 공연과 다른 점은 일정한 줄거리를 지닌 작품에서 배우가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악기까지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판 액터 뮤지션(Actor-Musician)인 셈이다. 이후 1994년 가무악 <한마당 우리소리>가 서울예술단의 정기 공연으로 편성되는 등 2005년 <무천, 신화가>까지 서울예술단은 꾸준히 가무악 작품을 개발해왔다. 하지만 실험성이나 예술성과는 별개로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지는 못해 결국 <무천, 신화가>를 마지막으로 정기 공연에서 가무악을 올리지 않고 있다.

서울예술단은 ‘가무극(歌舞劇)’이라는 장르를 선보이기도 했다. 가무극은 옛날 문헌에도 등장하는 명칭으로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극을 일컫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전통 연희는 춤과 노래, 극이 구별되지 않았고 전통 연희의 양식을 일반적으로 가무극이라고 했다. ‘노’, ‘가부키’ 등을 언급할 때 전통 가무극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미 가무극에는 어느 정도 ‘전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울예술단에서 ‘가무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바로 ‘서구식 뮤지컬과 구별된 작품’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다. 우리식 뮤지컬에 대한 양식을 실험하면서 그것을 ‘가무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서울예술단이 정기 공연으로 처음 올린 가무극은 1990년 <백두산신곡>이었다. 도올 김용옥이 극본을 쓰고, 미추의 손진책 연출과 국수호 안무, 당시 중앙국악관현악단 단장이었던 박범훈이 곡을 썼다. 혼돈의 세계에서 하늘이 열리고 신화의 주인공 하님과 다님이 아시달로 내려와 인간세계를 만든다. 흑두거인이 인간을 쓰러뜨리자 백두거인이 악을 물리치고 하님과 다님을 구해 조선을 연다는 줄거리다. 신화적인 내용에 춤과 노래가 중심으로 펼쳐지는 무대였다. 이후 2005년 신선희 단장 시절 가무극 <바리>를 정기 공연으로 올렸다. 바리데기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신선희 단장이 취임 초기인 1999년 같은 소재의 뮤지컬 <바리-잊혀진 자장가>를 올린 바 있다. 가무극 <바리>

는 대만의 안무가 린시 우웨이가 안무를 맡았다. 이 작품은 기존의 뮤지컬과 다르게 전통 무용적인 요소가 강화돼 어느 정도의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2010년 이후 올린 서울예술단 작품들, <잃어버린 얼굴 1895>, <뿌리 깊은 나무> 등은 ‘가무극’이라는 명칭으로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무극은 서울예술단의 앞선 가무악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서울예술단의 중흥기


1980년대 창단부터 서울예술단은 국책 기관으로서 남북 문화 교류와 해외 문화 교류의 사절로서 목적에 부합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편으로는 한국적 뮤지컬 양식 개발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이런 작업들이 창단 목적에는 부합하였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서울예술단의 존재감을 대중들에게 인식시킨 것은 법인화 이후 5대 단장으로 취임한 신선희 이사장 시절이다. 1998년 6월에 부임한 후, 1999년과 2002년 연임하면서 2005년까지 서울예술단을 맡았다.

신선희 이사장 시절까지만 해도 서울예술단의 설립 목적인 한국적 음악극 양식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무용 팀과 뮤지컬 팀으로 나뉜 단원들을 무용 팀과 가극 팀으로 바꾸며 의지를 표명했다. 외부 연구위원과 자문위원을 초빙해서 전통을 고증하면서도 현대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드라마투르기 역할을 둔 것도 신선희 이사장 시절의 일이다.

새로운 양식 개발과 더불어 청소년을 중심으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대중성 있는 뮤지컬 개발도 함께했다. 과거 서울예술단은 전통 소재나 역사적 인물을 토대로 작품을 개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청소년 명작극장 시리즈에서는 익숙한 고전 소설뿐만 아니라 해외 명작까지도 소재로 받아들여 대중성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입장 변화에 힘을 실어준 것은 1999년 제작된 뮤지컬 <태풍>의 흥행이었다. 한국적 양식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서울예술단에서 셰익스피어 원작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작품 내외적으로 많은 것을 설득해야 하는 도전이었다. 다행히 작품이 성공하면서 도전에 힘이 실렸다. 체코 작곡가 데니악 바르탁의 음악과 김대성의 범패, 정가, 태평가를 응용한 전통음악을 혼용했고, 박일규는 선무도를 활용해 안무를 짰다. 한국 전통 예술이 결합돼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태어난 <태풍>은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품상, 음악상, 안무상, 기술상 등 총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서울예술단의 청소년 시리즈의 첫 작품은 2000년 <놀부전>을 판소리와 랩,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을 조화시킨 <대박>이었다. <대박>은 독일 연출가 디에트마 렌츠를 초빙해 서커스의 광대 이미지와 전통 연희 양식을 해체 구성한 작품이었다. 이후 김진 원작의 만화를 뮤지컬로 꾸민 <바

람의 나라>(2001), <로미오와 줄리엣>(2002), <크리스마스 캐롤>(2004)이 이어졌다. 이 중 <로미오와 줄리엣>과 <크리스마스 캐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재공연을 이어갔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품상, 연출상, 음악상, 남녀 신인상, 기술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예술단의 흥행작이 등장하면서 이전까지만 해도 재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일 공연으로 그쳤던 것에서 레퍼토리 공연이 가능해졌다. 신선희 이사장 시절 최고 히트작인 <태풍>은 초연 이후 2000년, 2001년, 2002년 4년 연속 공연했고, 2002년 초연한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2005년, 2008년 재공연됐다.

신선희 이사장 퇴임 이후 한동안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던 서울예술단은 2012년 이후 <윤동주, 달을 쏘다.>를 시작으로, <잃어버린 얼굴 1895>(2013), <뿌리 깊은 나무>(2014), <신과 함께_ 저승 편>(2015) 등 최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작품을 소개하며 제2의 중흥기를 맞고 있다.

서울예술단의 꽃, 배우들



서울예술단은 국내에서 드물게 단원제를 유지하는 가무극 단체이다. 예그린악단의 전통을 잇는 서울시뮤지컬단이 단원을 보유하고 있고, 1989년 롯데월드 예술극장 역시 단원제로 유지됐다. 1986년 50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서울예술단은 해마다 퇴단하는 단원들보다 새로운 단원을 더 많이 영입해 한때는 9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현재 서울예술단 단원은 가극 단원 11명, 무용단원 15명, 타악 4명을 포함 총 30명이며, 기술 스태프 4명 역시 단원으로포함되어 있다.

법인화된 후 서울예술단은 기존 국공립 단체에서 호봉제를 하던 것과 다르게 1991년부터 지금까지 연봉제를 이어오고 있다. 호봉제는 실력이나 기여도와 상관없이 근무 연한에 따라 호봉이 오르는 제도이다. 서울예술단의 연봉제는 경력에 상관없이 개인의 역량과 활동 실적을 열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차등하여 월급을 지급했다. 단원들이 타성에 젖는 것을 방지하고 자극이 되고자 하는 의도였다.

1990년대 서울예술단은 뮤지컬 전문 교육 기관이 없었던 시절, 가무극 능력을 갖춘 배우를 양성하는 기관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단 이후 지금까지 배우 훈련 프로그램이 상시 트레이닝과 작품별 단기 프로그램으로 지속되고 있다. 상시 훈련 중에는 무용과 관련한 트레이닝이 가장 많았는데 전통 양식의 현대화를 모토로 한 단체이다 보니 한국무용이 중심이었다. 그 외에도 현대무용, 재즈, 발레, 애크러배틱까지 워크숍이나 지도 위원을 두고 상시 교육을 받았다. 춤뿐만 아니라 배우로서의 연기나 마임, 화술 훈련, 그리고 성악 등 가창 훈련을 받았다. 일반적인 뮤지컬 배우를 양성하는 프로그램 이외에도 서울예술단이기에 필요한 교육도 받았다. 민요, 구음, 남도소리, 경기민요, 정가 등 전통음악과, 탈춤, 설장고, 사물놀이, 소고춤, 살풀이, 승무 등을 별도로 교육받기도 했다. 인문학적인 교육도 특강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동서양 연극사, 페미니즘 극, 경극, 미학 등의 강의가 해당 강사를 모시고 진행됐다. 서울예술단은 가무극 양식을 개발함과 동시에 그에 적합한 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아카데미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상시 교육뿐만 아니라 작품마다 필요한 단기 교육이 이루어졌다. <태풍> 공연 때는 선무도를 배우고, 이윤택 연출의 연기론 강의, 이태주 교수의 셰익스피어 특강을, <대박> 공연에 앞서 판소리, 경기민요, 디에트마 렌츠의 연출 워크숍을 실시하는 등 작품을 위한 별도의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단원들은 작품을 거치면서 다양한 실력을 갖춰 나갔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뮤지컬 교육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서울예술단을 거친 배우들은 한국 뮤지컬이 지금과 같은 발전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용태, 박철호, 남경읍, 남경주, 유희성, 조승룡, 이희정, 김성기, 김법래, 민영기 등 든든한 중년의 남자 배우들과 이경미, 이정화, 신영숙, 김선영, 조정은 등 국내 내로라하는 여자 배우들이 서울예술단 출신이다. 지금 이들은 한국 뮤지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역할을 다하고 있다.



서울예술단의 역할과 비전


서울예술단의 창단 배경에는 남북 문화 교류라는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나아가 예술적 공감대를 확대하여 통일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비롯 세계 엑스포 등 중요한 국가적인 행사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단체로서의 역할도 부여받았다. 국내외 주요 스포츠, 문화 행사에서 축하 공연을 담당했으며,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현지 동포들을 위로하고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알려 왔다. 지금까지 서울예술단은 국내 대표적인 종합예술 단체로서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창단 초기에 부여한 역할은 상당히 희석되었다.

국가적 문화 행사를 일임할 예술 단체로서의 임무와 함께 서울예술단이 부여받은 중요한 임무는 한국적인 뮤지컬 양식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전통 극예술 양식에 현대적인 정서를 가미하려던 가무악과 가무극 작업들은 바로 이러한 임무에 답한 결과였다. 여전히 서울예술단의 최근 작품들은 가무극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이들 작품들이 전통 극예술을 현대화하려던 초창기의 <백두산신곡>이나 <바리>

와는 다른 작품임에도 이런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창단 초기의 설립 목적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 시점에서 전통을 기반한 종합예술 양식 개발이 여전히 필요한가는 의문이다. 사회, 문화의 변화에 따라 서울예술단의 역할도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부터 지속된 역할 중 한국의 대표 작품을 개발하고 만들어내는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특히 2010년대에 들어서면 적지만 안정된 제작비와 풍부한 제작 경험, 그리고 적절한 아이템 개발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서울예술단은 예산 집행 과정의 문제 때문에 장기 기획을 세우지 못한다. 공연 관계자들은 서울예술단의 작품이 좀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당해 연도 내에 기획되고, 제작되고, 공연되며 결산까지 이루어지는 환경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유명 뮤지컬은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 이상 개발되는 작품들이 허다하다. 뛰어난 종합예술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서울예술단에서는 기획과 제작 과정이 길어야 9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바람의 나라>나 <잃어버린 얼굴 1895>와 같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낸 제작력이 놀라울 뿐이다. 장기 기획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예술단을 이야기할 때 늘 정체성 문제가 언급되는데, 창단 당시의 미션에서 벗어나 대표적인 예술 콘텐츠를 생산하는 단체로서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질 필요가 있다. 영국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세계적인 히트 뮤지컬

<레 미제라블>과 최근작 <마틸다>를 제작한 것처럼 서울예술단은 지금까지의 제작 경험과 안정된 재정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서울예술단은 정기 공연 이외에도 지역의 문화 소외 계층을 찾아가 문화 향수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도 해왔다. 창단 후 10년간 199회 지방 순회공연과 33회 탐방 공연을 해왔고 지금도 너나들이 문화여행의 일환으로 서울예술단의 우수 레퍼토리가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청소년 예술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너의 꿈소리가 들려’와 ‘꿈이 나에게로 왔다’와 같은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계를 이끌어갈 미래 세대를 교육하고 준비하는 것 역시 서울예술단이 놓지 말아야 할 일들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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