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뉴시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뉴욕 거리를 누볐던 신문팔이 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다. 뉴스보이들이 하나로 뭉쳐 언론 거물 조셉 퓰리처에 맞선다는 이 이야기는1899년 일어난 실제 파업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그러나 당시 뉴스 보이가 처한 현실은 뮤지컬처럼 춤과 노래로 가득하지는 않았다. 세기의 전환기에 놓인 그들의 삶은 뮤지컬보다 훨씬 어둡고 위태로웠다.
거리의 아이들
라디오도 TV도 존재하지 않던 그 시절, 신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매체였다. 신문사 간의 경쟁이 치열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890년대 뉴욕에서는 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발행되는 십여 개의 주요 일간지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포스트, 헤럴드, 트리뷴, 타임스 같은 건실한 신문들이 선정적인 ‘옐로 저널리즘’ 신문의 도전을 받았다. 조셉 퓰리처가 발행하는 ‘뉴욕 월드’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발행하는 ‘뉴욕 저널’은 바로 그 옐로 저널리즘을 이끄는 양두마차였다. 월드지와 저널지 사이의 경쟁은 실제 길거리 싸움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양 신문사는 폭력배를 고용하여 다른 신문을 불태우고, 배달 차량을 망가뜨리고, 판매자를 폭행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 건실한 신문사조차 이런 일에 가담했다.
뉴스보이는 이 전쟁의 총알받이인 동시에 지상부대였다. 당시 뉴욕에는 맨해튼을 중심으로 만여 명의 뉴스보이가 살고 있었다. 대여섯 살부터 십 대 후반까지 폭넓은 나이대의 뉴스보이들은 대부분 고아나 가출 청소년이었다. 집도 가족도 없던 이들은 주로 거리에서 먹고 잤다. 운이 좋아봐야 부랑자 보호시설이나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수십 명이 함께 묵는 형편이었다. 신문 판매는 그런 아이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이른 새벽이면 유통 대리점 앞에는 신문을 사려는 뉴스보이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들은 100부 단위로 묶인 신문 꾸러미를 50센트에 사서, 거리의 행인들에게 되팔았다. 팔고 남은 신문은 다시 반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각까지 신문을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루 종일 거리를 뛰어다니며 버는 돈은 고작 끼니를 때우기에도 빠듯한 액수였다. 게다가 번 돈의 일부는 다음 날 팔 신문을 사기 위해 아껴두어야 했기에, 아이들은 늘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뉴스보이들은 신문이 잘 팔리는 명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각 신문사 유통 대리점은 자기네 신문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알게 모르게 그들의 싸움을 부추겼다. 거리를 떠도는 사납고 굶주린 뉴스보이들은 마치 들개를 연상시켰다.
이처럼 열악한 근무 환경은 오랫동안 신문사와 뉴스보이 사이에 분쟁을 일으켰다. 1866년 첫 뉴스보이 파업 이후 1884년, 1886년, 1887년에 연이어 신문 값 삭감을 요구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중 어떤 파업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는 못했다. 거대 신문사의 횡포에 맞서기엔 아이들의 조직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폭력배를 고용해 파업에 참여한 뉴스보이를 응징하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뉴스보이를 이용함으로써 손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적어도 1899년 파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파업을 일으키다
1898년, 미국이 쿠바 독립 전쟁에 개입하면서 벌어진 스페인-미국 전쟁은 신문 사업에 ‘대박’을 불러왔다. 그중에서도 전쟁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 월드지와 저널지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든 신문이 가격을 100부당 50센트에서 60센트로 인상했다. 그럼에도 증가한 판매량 덕에 뉴스보이는 계속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신문사는 다시 가격을 내렸다. 하지만 문제의 월드지와 저널지만은 그러지 않았고, 분노한 뉴스보이들은 두 신문의 판매를 거부하고 나섰다.
1899년 7월 21일 시작된 이 파업은 이전까지와 달리 놀랍도록 조직적이었다. 그 무렵 뉴욕 거리에서 펼쳐진 수많은 노조 투쟁(특히 전차와 트럭 운전사 파업)이 아이들에게도 연대의 가치와 대규모 시위의 파괴력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파업을 주도한 맨해튼 뉴스보이들은 일찌감치 브루클린 뉴스보이들의 협력과 지지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이스트강 양편에서 모인 5천여 명의 뉴스보이가 브루클린 다리를 장악하고 시위를 벌였다. 소년들은 월드지와 저널지를 찢어발기고, 시민들에게도 두 신문을 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며칠 동안 이어진 시위는 교통을 마비시켰고, 신문이 외곽 지역으로 배달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뉴저지행 기차 주변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이어져 허드슨강 건너편으로의 배달을 막았다.
경쟁사의 불운에 신이 난 다른 신문들은 열성적으로 파업 상황을 보도했다. 바니 피너츠, 레이스 트랙 히긴스, 크레이지 아르본 등 흥미진진한 별명의 뉴스보이들이 연일 신문 지면에 오르내렸다(영화와 뮤지컬에 등장하는 잭, 데이비, 크러치의 이름 또한 실제 파업에 가담했던 뉴스보이에게서 따온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모은 인물은 파업의 리더 ‘키드 블링크(Kid Blink)’였다. 파업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그의 진짜 이름은 루이스 밸러렛(Louis Ballatt). 하지만 한쪽 눈을 실명해 안대를 차고 다녔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키드 블링크라고 불렀다. 블링크는 집회 때마다 뉴스보이들 앞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펼쳤는데, 그 연설 내용은 특유의 브루클린 억양을 살려 기사화되곤 했다.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이여, 지금은 우리가 풀처럼 끈끈히 뭉쳐야 할 때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며 그것을 쟁취할 것이다. 설령 우리 눈이 멀었다 할지라도(Friens and feller workers. Dis is de time when we’se got to stick together like glue. We know wot we wants and we’ll git it even if we is blind).”
월드지와 저널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신문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배를 고용했다. 경찰도 단속과 체포에 나섰다. 하지만 뉴스보이들은 파업을 굳게 고수했고, 파업을 무시하고 월드지나 저널지를 판 배신자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어른들조차 소년들에게 반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들었기에, 뉴스보이의 일을 대신해 줄 인력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두 신문의 판매량은 뚝 떨어지고 말았다.
2주 후, 언론 거물들은 백기를 들었다. 퓰리처와 허스트는 신문 가격을 내리지 않는 대신 팔리지 않은 신문을 다시 사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뉴스보이들은 다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파업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승리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파업을 지켜본 다른 신문사들은 소년들의 분노가 방향을 돌리지 않도록 자신들도 신문을 되사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고, 개혁이 계속되었다. 이 사건에 영향을 받은 다른 파업도 이어졌다. 1910년대에는 몬태나에서, 1920년대에는 켄터키에서 뉴스보이 파업이 일어났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가난한 뉴스보이들이 보여준 것은 누구든 나이와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